어떤 사이

어떤 사이 11

The Spring day

린당


꿈이나 미래 같은 걸 생각했던 적이 없었다. 학교에 적어 내는 장래 희망란에 꾸준히 써 냈던 희망직업은 그냥 '공무원'이었다. 엄마가 살아 계셨던 8살 무렵엔 뭐라고 적었더라? 적어도 공무원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나질 않았다.


살아 있으니까 사는 거라는 누군가의 말에 상혁은 절대적으로 공감했었다. 우산 없이 비가 오는 날 편의점을 코앞에 두고도 수중에 단돈 오천 원이 없어 빈손으로 머리 위를 위태롭게 가린채 흠뻑 젖은 몸으로 고깃집 알바를 갔었다. 바닥이 낡아 뒤꿈치가 헤진 컨버스화는 밑창으로 빗물이 줄줄 새 온종일 양말이 질척했지만 신발을 벗어서 말릴 틈도 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다 늦은 저녁에 집에 돌아와 퉁퉁 부은 발에서 양말을 벗겨내면서도 울고 싶진 않았다.


상혁은 웃으며 살아온 날이 없어서 울고 싶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 날은 좀 만사에 지치던 날이었다. 타일이 다 떨어진 곰팡이 슨 좁은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하나뿐인 교복 와이셔츠를 빨다가 갑자기 이유 없이 울컥했다. 아니, 이유가 없지 않았다. 전기세가 밀려 보일러가 끊기고 찬물밖에 나오질 않는 수도에 손가락 끝이 저리도록 시렸다. 지금은 너무 추워서 우는 거라고 되뇌었다.


소리 없이 눈물만 줄줄 흘리다가 밥을 달라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네- 하고 얼른 답했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와이셔츠 물기를 언 손으로 꼭꼭 짜 화장실 한편 옷걸이에 걸어 두었다. 밖에는 계속 비가 오고 집안은 온통 눅눅했다. 내일은 아마 덜 마른 구깃구깃한 와이셔츠를 입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빗물에 젖은 것보단 수돗물에 젖은 게 나았다. 물론 그게 빗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건 저뿐이겠지만. 상혁은 화장실을 나가려다 말고 문득, 벽면에 붙은 거울 속 저와 눈이 마주쳤다. 교복 안에 받쳐입었던 하얀 반소매 티셔츠 밑으로 얼룩덜룩 보기 흉한 멍 자국과 흉터가 가득했다.


상혁은 젖은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빗장뼈 위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흉터를 손끝으로 문지르다가 문득 찬장 구석에 놓인 아버지의 면도기가 눈에 들어왔다. 자주 사용하지 않아 끝이 무뎌지고 군데군데 녹이 슬었지만, 힘을 준다면 여린 살 때쯤은 베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꾸 거기서 눈이 떨어지질 않았다. 어차피 제 몸은 지금도 상처투성인데. 지워지지 않는 상처 하나가 더 생긴다고 해서 인생이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저 상처가 이 인생을 끝내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명치끝이 뻐근했다.


아주 잠깐, 아주 조금만 용기를 내면.

이 지옥이 끝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는 순간 밖에서 저를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턱 막혀오는 숨에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주저앉은 상혁이 온몸을 덜덜 떨었다. 방금까지 이 지옥을 끝내고 싶었으나, 제 이름을 부르는 끔찍한 목소리 끝에 상혁이 외친 건. 살려달라는 울부짖음이었다. 죽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간절하게 살고 싶었음을.





"상혁아, 왜 나와 있어?"


뒤에서 저를 안아오는 따뜻한 온기에 상혁이 물렁해진 표정으로 힘을 빼고 뒤로 몸을 기댔다. 단단하게 닿아오는 가슴팍에 뒷머리를 살짝 비비다가 고개를 위로 치켜들어 눈앞에 보이는 인성의 턱 끝에 쪽 입술을 부딪쳤다. 목울대에 상혁의 머리카락이 스쳐 간지러웠다. 흐흐, 바보처럼 흩어지는 인성의 웃음소리에 상혁도 덩달아서 히히 웃었다.


안 추워? 왜 베란다에서 이러고 있어. 아직 아침엔 좀 쌀쌀한데. 베란다 한가운데 공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고 앉은 상혁을 뒤에서 두 팔로 꽁꽁 감싼 인성이 상혁의 팔다리를 문지르며 언 몸을 녹였다.


"옛날 생각이 났어요."

"옛날 생각?"


"형 내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해요? 이생에 다 누리지 못한 욕망이 가득 차 있는 게 사후 세계라면 난 그만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었다는 말."


"...응."


기억하지. 인성은 상혁의 어깨 위에 턱을 대고 있다가 귀 뒤쪽에 쪽, 버드 키스를 했다. 온기가 닿는 느낌에 눈을 찡긋거린 상혁이 한참 말없이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새벽녘의 풍경을 응시했다. 어슴푸레한 하늘 가운데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비가 올 것 같았다.


문득 이 밤에 그날이 생각이 생각난 건 왜일까. 상혁은 한참 말없이 창밖만 바라봤다. 요즘은 부쩍 어머니 생각이 잦아졌다. 인성이 해 주는 모든 것들이 나도 엄마가 있었으면... 으로 이어졌다. 단순히 인성을 제 보호자로 느낀 걸까 싶어 가만히 새벽녘에 혼자 나와 제 감정을 되짚었다. 어린 감정은 치기로 치부되기엔 이미 너무 커져 있었고 인성은 보호자와 같은 대상으로 머물기엔 너무 소유욕을 들끓게 하는 사람이었다. 가질수 있다면 양껏 두 손 가득 쥐고 있고 싶었다. 처음엔 제 손을 쥐어주고 싶은 사람이었는데 이젠 손에 쥐었다면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절정에 다다라 저만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 아찔한 표정들이 자꾸만 머릿속에 인으로 배겨왔다. 이 사람이 좋다. 너무 좋아서 죽을 것 같다. 이 사람이라면 함께 죽어도 좋겠다. 함께 죽을 거라면, 이왕이면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 아주 오래. 행복하게.


인성과의 관계는 상혁에게 처음으로 소유욕을 불러일으켰다.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나는 그때도 너무 살고 싶었어요."

"... ... 그랬어?"

"살 방법이 없어서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나 봐요."


형이 날 살렸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에요. 상혁은 인성을 바라보지 않았지만 제 진심이 전해지고 있다고 믿었다. 인성의 손을 끌어와 손바닥 가운데 깊게 입을 맞추고 손을 계속 만지작거리다가 검지를 들어 크게 뭐라고 적어 내려갔다. 사, 랑, 해, 요. 마지막 온점까지 꾹 찍은 상혁이 저가 쓰는 글자들을 속닥속닥 제 귀에 그대로 읊어주는 인성에 부끄럽고 좋아서 소리 내 웃었다.


귀여워. 상혁이 웃는 소리에 인성이 그렇게 말하며 또 따라 웃었다. 눈만 마주쳐도, 손끝만 스쳐도 피부 위에 열이 오르고 입가엔 웃음이 퍼졌다. 간밤에 인성이 잘 씻겨주고 잠옷으로 갈아 입혀 놓은 보송보송한 상혁이 뒤를 돌아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인성의 무릎 위로 끙차 하고 올라앉아 마주 보고 배시시 웃었다. 형 이런 말 되게 뭐하긴 한데, 아침에도 건강하네요. 앉자마자 엉덩이 바로 아래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에 상혁이 빵 터져 까르르 웃었다. 인성은 민망함에 상혁을 폭 끌어안고 웅얼거렸다. 아침이라서 그래, 너보고 선거 아니야. 좀 모른 척해주라.


“아래는 안 아파?”

“왜 안 아파요. 형 잘 때 나 여기까지 나오면서 하반신이 없어진 줄 알았어요.”

“그럼 나 깨우지. 내가 데리고 나오면 되는데.”

“곤하게 자는 게 예뻐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더라구요.”


근데 형 나 얼굴 봐요. 완전 못 생겼어. 누가 이렇게 물고 빨았어요. 입술이 두 배야. 눈도 너무 부었어요. 붕어야 붕어. 상혁이 인성의 목을 끌어안고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더니 퉁퉁 부은 입술로 인성의 코끝을 콩콩 쪼며 부루퉁하게 말했다. 원래도 주름 하나 없이 통통하게 예쁜 입술이 썰면 한 접시가 나올 만큼 도톰하게 부어오른 걸 보고 인성이 히죽히죽 웃었다. 내가 만들었지 애기야. 형이 이렇게 물고 빨았지. 하면서 상혁의 엉덩이를 통통 두드렸다. 누구네 집 애기가 이렇게 예쁜가 몰라. 하고 물으며 잠옷이 흘러내려 드러낸 맨 어깨에 다시 한번 잇자국을 새긴 인성이 아, 아파요! 하고 제 어깨를 콩콩 두드리는 상혁의 주먹을 쥐고 간밤에 신경도 못 써 준 상처를 살폈다.


“이것도 아프겠다. 형이 자기 전에 한 번 소독해 놓긴 했는데.”


어쩐지 새 밴드가 붙어 있다 했더니 잠든 상혁을 씻기면서 손까지 소독해 놓은 모양이었다. 오늘은 집에서 쉬어. 형이 출근해서 너 아프다고 할게. 상혁을 안고 일어서 소파 위에 올려 앉힌 인성이 저는 소파 아래 앉아 상혁의 무르팍에 쪽 입을 맞추고 허벅지에 뺨을 대며 고양이처럼 고롱고롱했다.


“나 쉰다고 하면 우리 잔 거 영빈이 형도 알고 재윤이 형도 알겠다.”

“... 그건 그런데, 너 출근해서 네 얼굴 봐도 둘 다 알아채지 않을까?”

“우린 왜 연애도 동네방네 소문내고 섹스도 동네방네 소문내요?”


“좋은 걸 숨길 수가 없는데 어떡해. 연애도 하고 싶고 섹스도 하고 싶은데.”


“와, 지금까진 어떻게 참았어요?”


너 좋아하니까 참은 거지. 형은 네가 싫다는 건 다 안 해. 나 담배도 끊었어, 상혁아.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바람에 여간 졸린 게 아닌지 인성이 꾸물꾸물 소파로 올라와 상혁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그대로 잠이 들려던 인성이 이대로 잘 거예요? 나 허리 아픈데? 하는 상혁의 목소리에 가물가물하던 눈을 번쩍 뜨더니, 아 미안. 하고는 그대로 상혁을 들어 올려 안고는 침실로 들어가 침대 위에 상혁을 세상 얌전히 눕혔다. 이대로 같이 누우면 아예 못 일어날 것 같고. 그렇다고 바로 출근을 하자니 처음으로 함께 밤을 보낸 다음 날이라 발도 안 떨어질뿐더러 잠이 솔솔 몰려 왔다. 입술을 빼물고 한참 곰곰이 생각하는 인성을 향해서 보다 못한 상혁이 두 팔을 쭉 뻗어왔다.


“형아, 졸리다. 우리 조금만 더 자요.”


샐죽 웃은 하얀 얼굴이 너무 예뻐서 홀랑 넘어간 인성이 얼른 상혁의 두 팔에 제 커다란 몸을 구겨 넣고 이불을 덮었다. 상혁의 머리 밑으로 팔을 뻗어 팔 베게를 해 주고 마주 보고 누워 이마 위로 입을 맞추며 한 손으로 콘솔 위를 더듬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상혁아, 형아는 카페 사장님이고 형네 아빠는 사실 그 카페 건물주야. 그래서 형은 오늘 카페 문을 닫아 볼까 해. 영빈이랑 재윤이도 평일에 데이트 한 번은 해야지, 그치? 자기 합리화를 완벽하게 끝마친 인성이 제 말을 그대로 카톡으로 옮겨 재윤에게 망설임 없이 보냈다. 영빈에게 보내면 분명 잔소리 전화가 돌아올 것이므로 알아서 막아 달란 의미를 내포한 메시지였다.


재윤아 오늘 영빈이랑 데이트 잘해. 우리 오늘 카페 문 닫는다.


다행히 5분이 지나도록 핸드폰이 잠잠한 고로 인성은 상혁을 품에 안고 늦은 오후까지 세상 달콤한 낮잠을 잘 수 있었다.


***



기어코 3월 14일이 되는 날 상혁은 김인성이 보는 앞에서 그때 그 단발머리 소녀에게 선물을 받아버렸다. 저한테요? 소녀가 제 앞에 내민 커다란 츄파춥스 한 통을 들고 상혁이 당황해서 묻자 소녀는 여전히 고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작정 사탕을 들고 찾아와 기세좋게 고백을 할 때는 언제고 대답을 기다리는 듯 상혁의 앞에서 있는 대로 쑥스러워하는 소녀에게 상혁은 화이트데이는 원래 여자가 받는 날 아니에요? 하고 대답을 미뤘다. 소녀는 상혁의 그 말에 그쪽한테 받고 싶은데 그쪽은 나 모르잖아요! 하고 답했다. 당돌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여친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는 거 아니잖아요.”


나 기다리는 거 되게 잘해요! 어찌나 해맑게 웃는지 매장 내에 사람들이 간간이 호응하며 소녀의 용감한 고백을 응원했다. 상혁은 난감한 얼굴을 한 채 츄파춥스 통의 손잡이를 잡고 잠깐 뭐라고 말할까 고민하다가 뒤를 돌아 카운터에서 턱을 괴고 이쪽을 바라보는 인성과 눈을 마주치고는 웃음이 터졌다. 못마땅해 보이는 삐뚜름한 얼굴이 얼른 달려가 입을 맞추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워서. 귀엽네, 우리 형.


“내가 여자친구가 있데요?”

“네. 여기 사장님이 오빠 여자친구 있다던데? 연상이고 엄청 예쁘고, 돈도 많은!”


내가 언제? 소녀의 말에 인성을 돌아본 상혁은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와 입술을 꼭 물었다. 인성의 얼굴엔 딱 그렇게 쓰여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 라고. 연상이고, 예쁘고, 돈 많은 애인 여기 있어요, 근데 여친은 아님. 듣지 않아도 들은 것처럼 선명한 질투에 상혁은 사탕 통을 얼굴 높이까지 들어 얼굴을 가리고 큭큭 허리를 접어 웃었다. 인성은 방금 소녀의 입에서 나온 오빠, 라는 말에도 심히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나는 못 해 주는 말이지만 남자라면 다 좋아하는 말이라던 그 ‘오빠’. 소녀는 그걸 상혁에게 마음껏 해 줄 수 있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이미 한차례 패배감을 맛본 모양이었다.


팔짱을 척 끼고 상황을 지켜 보고 있던 인성은 상혁이 이렇다 할 거절 없이 웃기만 하는 데에 갑자기 울적해졌다. 누가 봐도 자연스러워 보이는 그림에 김인성 하나만 없으면 참 아름다운 한 쌍 같았다. 제 어린 연인은 누가 봐도 귀엽고, 예쁘고, 멋지고. 사람의 이목을 끌만큼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걸 꼭꼭 감추고만 살다가 이제야 꽃이 피어나듯 날로 화사해지는 데 막을 재간이 없었다. 막아서도 안 되는 일이고. 울적하지만 사랑받는 상혁을 보는 일은 행복한 일이었다. 웃프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씁쓸하게 한쪽 입꼬리를 밀어 올리는데 자꾸만 인성을 힐끗거리던 상혁이 소녀에게 사탕을 도로 내밀었다.


“미안한데, 이건 가져가셔야겠어요.”

“헐, 거절이에요? 그 연상 여친 때문에요?”

“아니요.”

“그럼, 수락이에요?”


거절이라는 말에 벌떡 일어나 상혁에게 달려올 준비 중이던 인성은 수락이라는 말에 청천벽력을 만난 표정으로 다시 주저앉았다. 이상혁 너 밀당할래?! 장난기 어린 얼굴로 제 표정을 살피려 다시 얼굴을 돌린 상혁을 향해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으로 제 두 눈을 한 번, 그리고 상혁을 한번 가리킨 인성이 ‘지켜보고 있다.’ 입 모양으로 뻐끔거렸다.


“여친은 아니지만, 그런 애인이 있는 건 맞아요. 그리고 웬만하면 제 애인보다 돈 많고 예쁘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사탕은 못 받을 것 같아요. 제가 그 사람을 많이 좋아해서 울리기 싫거든요. 소녀에게만 들리도록 조곤조곤 말을 건넨 상혁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해 넋을 놓고 있는 소녀에게 사탕 통을 쥐여주고는 소녀가 대답할 때까지 천천히 기다렸다. 그리고는 이내 정신을 차린 소녀가 뭐라뭐라 말을 건네는 걸 잠자코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는 소녀에게 잘 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특별한 날의 헤프닝으로 웅성거리던 손님들은 생각보다 싱겁게 막을 내린 꿀잼 고백 장면에 보다 빠르게 관심을 돌렸고 상혁은 어수선한 매장이 조용해지자 자연스럽게 인성을 향해 몸을 돌렸다. 카운터 밖에서 인성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모습이 꼭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아서 인성도 상혁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거절했어?

응, 거절했어.

뭐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안 들렸어.

그냥...


그냥 애인이 돈 많고 예뻐서 다른 사람 싫다고 했어. 상혁은 손님에게 했던 것처럼 조곤조곤 인성에게도 제 대답을 들려주었다. 손님은 뭐래? 예쁜 사랑하시라고. 사장님 진짜 예쁘게 생겼데. 여자들 촉은 진짜 무섭다. 나 사장님이라고 말한 적 없는 어떻게 알았지? 형아 나 잘했어? 배시시 웃는 얼굴에 동그랗고 반들거리는 뺨이 너무 예뻐서 인성은 차마 입을 맞추진 못하고 상혁의 뺨을 살살 둥글렸다. 테이크 아웃 잔에 커피 오더를 빼고 있다가 그 꼴을 발견한 영빈이 아니었다면 동네방네 사장님이랑 알바생이 사귄다고 소문날법한 자세와 표정인 걸 둘만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오늘도 복장이 터지는 건 영빈이었다.


왜 아주 대자보를 붙여, 우리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하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삿대질을 해대는 영빈을 재윤이 뒤에서 끌어안아 말렸다. 햄아, 손님들이 본다!


***



3월이 지나고 나면 마른 땅에 새싹이 돋고 앙상한 나뭇가지에도 어린잎이 돋았다. 온통 삭막하던 출근길에 문득 돌아본 거리가 싱그러운 연둣빛이라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상혁이 꽃피는 춘삼월의 끝자락에서 완연한 봄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활기찬 발걸음으로 매장문을 열고 미리 나와 베이킹 수업을 준비 중이던 재윤에게 꾸벅 인사했다. 오늘은 뭐 만들어요, 형? 유니폼을 갈아입고 나와서 앞치마를 두르던 상혁이 밀가루 포대를 들고 오는 재윤에게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오늘은, 마들렌.”


마들렌. 재윤이 미리 꺼내 놓은 조개 모양 틀을 만지작거리던 상혁이 재윤의 말을 따라 하다가 이제 시작할까? 하고 묻는 재윤에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달걀을 풀고, 거품을 내고, 버터를 녹이고. 한창 재윤이 하는 행동과 말을 뚫어져라 바라 보며 필기하고 눈에 익힌 상혁이 중탕 중인 달달한 버터 냄새에 씨익 웃으며 저 이 냄새 너무 좋아요. 하고 말하자 재윤이 따라 웃었다.


“나도 이 냄새 엄청나게 좋아해.”

“버터 냄새요?”

“아니, 마들렌 냄새.”


상혁아 니 책 좋아한다고 안 했나? 그 책 잃어 봤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고 그 책 시작이 이 마들렌을 홍차에 적셔 먹는 장면이거든? 홍차 적신 마들렌 냄새를 맡고 과거를 떠올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왜 노래도 있다 아이가, 들으면 그때를 떠 올리게 하는 음악 같은 거. 나한테도 마들렌이 그런 거다.


“어떤 기억인데요?”

“뭐겠어? 김영빈이지.”


처음 만들어 준 디저트거든. 처음을 떠올리게 하는 것 중에 내가 만든 마들렌, 형이 내린 커피.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게 좀 떠올릴 때마다 그냥 되게 좋아. 커피랑 디저트, 말만 들어도 어울리잖아? 그렇게 말하는 재윤의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꼭 저까지 행복해지는 기분이었다. 말만 들어도 어울리는 사이라는 거. 상혁은 그 말에 눈이 반짝했다.


형, 오늘 만드는 마들렌, 저도 인성이 형 줘도 돼요? 상혁이 망설이며 물으면 재윤이 왜 안 되겠냐며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몇 번쯤 재윤과의 연습 후에 만들어진 결과물을 인성에게 주긴 했지만 대체로 아직 상혁이 만드는 결과물들의 성공 여부는 반반쯤이었다. 게 중에서도 아주아주 잘 된 날은 인성에게 맛은 기대하지 말라며 쭈뼛거리며 내밀었고 대부분은 제가 테스팅 중에 먹어 없애거나 과감하게 버리는 날도 많았다.


오늘은 인성에게 줘도 되느냐, 고 묻는 건 오늘은 꼭 성공하고 싶다. 는 상혁의 다짐과도 같아서 재윤은 기특하다며 활짝 웃었다.



커피랑 디저트 같은 사이. 상혁은 그라치오소에서 일하게 되면서 영빈에게 커피를 배우고, 재윤에게 디저트를 배웠다. 뭐 하나가 더 좋아지면 늦게라도 선택해서 하나를 제대로 배울 생각이었다. 아직까진 뭐 하나가 더 좋다기보단 새로운 걸 배우는 게 너무 좋아서 여기저기 졸졸 아가 새 마냥 형들 뒤를 따라다녔지만, 문득 한 번도 그려 본 적 없었던 ‘미래’라는 것을 그려 보게 되면서 최근엔 둘 중 하나를 결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혁이 그리는 먼 미래에도 인성은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디저트와는 어울리지 않는 감색의 무심한 간판을 가진 카페의 사장님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신 카페의 규모는 지금보다 훨씬 작지 않을까. 홀에 있는 테이블은 두어 개 남짓. 영빈과 재윤이 따로 카페를 차려 나가면서 인성이 관리하는 매장은 작아지고 커피는 인성이, 디저트는 상혁이 하게 되는 그림이었다.


영빈과 재윤의 최종목표는 둘만의 카페를 만드는 일이라고 커피를 가르쳐주던 영빈은 수줍은 듯이 꽤 자주 그 말을 했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연인이 재윤과 영빈이다 보니, 상혁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연인의 관계도 두 사람을 가장 많이 반영하고 있었다. 재윤의 말처럼 커피와 디저트만큼 잘 어울리는 사이는 없으니까. 매일 달콤한 버터 냄새를 풍기는 상혁과 씁쓸하고 부드러운 향기를 풍기는 인성의 카페에서 많은 이들이 사소한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나누는 미래.


김인성이 있는 카페에서 디저트를 만드는 이상혁이라니, 상상만 해도 행복하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구만리였다. 방금도 중탕하던 버터를 다 식히지 않고 반죽에 부어버려 반죽을 새로 만드는 중이었다. 이런 것도 꿈이라고 할 수 있나? 너무 먼 미래 같은데. 상혁은 제 생각을 들여다보는 이도 없는데 괜히 민망해서 귓바퀴를 붉혔다.


상혁이 처음 디저트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을 때, 재윤은 말했다. 디저트는 식사의 마지막에 온점을 찍어주는 존재라고 생각한다고. 오늘 하루, 어떤 감정을 불태우며 살아왔든 마지막 한입으로 먹은 디저트가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도록 달콤한 맛을 내는 게 재윤이 원하는 파티시에라고. 저도 그런 디저트를 만들고 싶다고 문득 생각했다.




“마들렌이네?”

“아직 재윤이 형이 만든 것만큼 맛있지는 않아요.”

“상혁아, 형은 네가 만드는 건 다 맛있어.”


이번 마들렌은 꽤 성공적이었다. 마들렌은 기초적인 재료 외에는 크게 바꿀 수 있는 재료가 많이 없기때문에 무조건 재료의 상태가 중요하다고 재윤은 말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언제나, 만드는 사람 마음이지 뭐. 누구에게 먹이고 싶은가, 어떤 빵을 만들고 싶은가. 같은 거. 그냥 늘 그 마음으로 만들어, 인성이 형을 먹이고 싶은 빵을 만들겠다고. 그렇게 말하는 재윤이 얼마나 자신이 만든 빵에 애정이 있는가 하는 건 곁에서 그간 재윤이 만드는 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 온 상혁이 가장 잘 알았다.


영빈을 만나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졌고, 재윤을 만나고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그리고 인성을 만나 앞으로 제 인생에 없을 거라고 생각 했던 미래를 그렸다. 볕이 좋은 오후 봄바람이 살랑이는 카페 테라스에서 야외자리를 정리하던 인성을 앉혀 놓고 제가 만든 마들렌과 영빈이 내려준 커피 한 잔을 들고나온 상혁이 인성의 앞에서 잔뜩 부끄러워하며 웃었다.


“아주아주 나중에도, 형이 사장님으로 있는 카페에서 일하고 싶어요.”

“응?”


마들렌 부스러기를 입술에 묻힌 인성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제 앞에서 수줍은 듯 웃고 있는 상혁을 바라봤다. 왜 이렇게 점점 귀여워져요. 상혁은 테이블에 턱을 괴고 인성을 향해 몸을 숙여 남은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인성의 입술을 쓸었다. 얌전히 상혁의 손길을 받으며 부드럽게 웃던 인성이 애인이 엄청 어리거든요. 부지런히 젊어져야 해요. 하고 장난스레 말했다.


“아, 우리 애인은 엄청 멋진 어른이라서 저는 부지런히 자라야 하는데. 언젠가는 가운데서 만나겠네요, 그쵸?”


입술을 쓸어 준 손을 들어 인성을 뺨을 살살 간질이던 상혁이 제 손을 잡아 손끝에 쪽 입을 맞추는 인성에게 봄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상혁아. 응?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생각난다. 그때도 나는 여기 있었고 너는 봄 같았는데. 처음 본 순간 예쁘다고 생각했고, 그다음은 너무 신경 쓰였고. 그러다가 곁에 있고 싶어졌고, 나중엔 네 인생에 일부가 되길 바랐고.


“네가 그려주는 미래에, 내가 있다는 건 엄청 행복한 일인 것 같아.”


마들렌 맛있다 상혁아.

우리 나중에 함께 둘만의 카페를 차리게 되면 이 마들렌도 꼭 메인메뉴로 만들자.


형.

응?


“그러네요. 누군가가 그리는 미래에 내가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하네요.”


매 계절이 늘 겨울이던 상혁은 봄을 닮은 모습으로 한여름의 태양을 뚫고 인성에게 찾아왔었다. 마침내 마주 보고 웃는 두 사람 사이로 이르게 꽃을 틔운 벚꽃이 사랑스럽게 흩날리는 진짜 봄이었다.








어떤 사이 12, 완결로 찾아오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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