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이

어떤 사이 08

Like or Love

린당


언젠가 다가 올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일이 실제로 눈앞에 와 있을 때 사람은 당황 하고 만다. 그런 면에서, 확실히 인성은 어른이었다. 상혁은 인성에게 이 상황에서 어떻게 태연할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처음으로 제가 아직 어리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푸석한 얼굴을 한 채 거실에 나왔을 때 인성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 중이었다. 어, 상혁아 일어났어? 저를 보며 웃는 다정한 얼굴도 평소와 다름없었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에 띠게 시선을 피하는 상혁을 향해 세수하고 와. 아침 먹자. 하는 목소리는 평탄하기 그지없었다. 외려 과민반응 한 제가 더 민망할 정도여서 상혁은 제가 꿈을 꾼 건가 싶었다.


“오늘 서점 갈까? 베이킹 책 산다고 했었잖아. 재윤이가 골라 줬다면서.”

“아아.. 응.”


대충 고양이 세수를 하고 나온 상혁이 자리에 앉자 물기어린 앞머리를 살짝 쓸어 준 인성이 제 손길에 눈에 띄게 놀라는 상혁을 보고 잠깐 표정이 굳는가 싶더니 금세 웃는 낯으로 상혁의 앞에 토스트와 과일 샐러드를 밀어 주었다. 뭐지 저 표정은? 잘 못 본건가 싶어 다시 봐도 인성의 얼굴은 그늘하나 없이 생글거렸다. 아직도 꿈을 꾸나? 아니, 이게 꿈이었어도 문제인거 아닌가? 상혁은 사과 한쪽을 포크로 찍어 입안에 밀어 넣으며 영혼 없이 멍하니 입을 우물거렸다.


요컨대 문제는 꿈이라고 하기엔 인성이 너무 태연했고 꿈이 아니라고 하기엔 어제 제 허벅지에 닿았던 감촉이 아직 너무 생생했다는 거였다. 어찌 됐든 어제의 일이 뜻하는 바가 둘 중 한 사람이 욕구불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확실했다. 아니, 어쩌면 둘 다 일수도 있지. 그래서 지금 이렇게 아침부터 인성의 얼굴만 봐도 얼굴이 홧홧한 걸지도 몰랐다.


욕구불만이라니, 그 생각을 하자마자 아삭아삭 덜 씹은 사과 덩어리가 꿀꺽- 소리와 함께 목뒤로 넘어가다 사레가 들렀다. 컥- 소리와 함께 빨간 얼굴로 콜록 거리기 시작한 상혁에 인성이 놀라서 벌떡 일어나 상혁의 등을 힘주어 탁탁 쳤다. 목구멍에 걸린 꽤 큰 사과 조각이 위로 울컥 넘어오는 바람에 가슴을 주먹으로 팡팡 치던 상혁이 숨을 몰아쉬었다. 아, 죽을 뻔 했다. 눈물이 찔끔 맺힌 눈을 크게 깜빡이던 상혁은 제가 뱉어놓은 사과가 인성의 손바닥 위에 타액과 함께 올라가 있는 걸 보곤 헐, 소리를 육성으로 뱉었다.


“상혁아 괜찮아?”


상혁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숨이 막히는 와중에 인성이 상혁의 입 앞에 뭘 대고 상혁아 뱉어! 하고 소리치기는 했는데 그게 손일 줄이야. 뒤늦게 제가 뱉어 놓은 사과를 보며 미안해요, 형. 하고 제가 치우겠다며 손을 뻗었다. 그런 상혁의 손을 제지한 인성이 앉아 있어 형이 버릴게. 하면서 음식물 쓰레기통을 열어 손을 털었다. 주방 싱크대에서 손을 닦는 인성의 뒷모습을 보던 상혁이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 낮은 한숨을 쉬었다.


사과먹다 죽을 뻔하다니 무슨 백설공주도 아니고.


“상혁아 오늘 어디 아파?”

“...아니...”


식욕이 뚝 떨어졌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막상 꺼내질 못해서 입술을 달싹거리며 한참을 시간을 끌었다. 포크를 손에 쥐고 싱싱한 야채더미를 하릴없이 뒤적거리다가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제가 입 열기를 기다리는 인성의 시선을 피했다. 형 그... 어제... 입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힘들게 꺼낸 말을 끝까지 하고는 싶었는데 도무지 부끄럽고 쑥스럽고 그래서 계속 제대로 말을 못하고 끙끙 거렸다. 피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나쁜 일도 아니었고 연인이었으니 제게 반응이 없는 것보다야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상혁은 처음이라 조금 놀랐을 뿐이고 그래서 조금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인성에게 하고 싶었다. 지금 말해 놓지 않으면 계속 신경이 쓰여서 인성을 볼 때마다 이렇게 쭈뼛거리고 어디에도 집중을 못 할 것 같았다. 그럼 그건 또 인성에게 나름의 상처가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상혁아. 말해. 형 괜찮아.”


아, 제 앞에서 태연한 척 굴었던 인성은 이미 상처 받은 얼굴이란 걸 상혁은 그 목소리를 듣고 알았다.. 낮게 깔리는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인성은 늘 상혁의 표정이 알기 쉽다고 말했지만, 인성도 저 진실의 입 꼬리와 감정 모니터 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형, 겁먹었구나? 그 모습에 오히려 상혁의 어깨에서 긴장이 풀어졌다. 힘이 빠지고 나서야 알았다. 인성의 앞에서 제가 얼마나 긴장을 하고 온 몸이 굳어 있었는 지.


“어제, 무서웠니?”


그렇게 묻는 인성의 목소리가 좀 전 보다 훨씬 떨리고 있어서, 상혁은 갑자기 너무 미안해졌다. 인성은 사람들에게 상처받은 전적이 있었다. 본인이 한 행동이 다르게 해석 될 수 있다는 데 공포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란 소리였다. 상혁은 그제야 인성을 제대로 마주 보고 있었다. 일단 어제일은 꿈이 아니었다는 말이지?


“무서운 게 아니라, 놀란 거예요. 처음이니까, 나는.”


인성은 모른 척 한 게 아니라 상혁이 상처를 받았을까 괜찮은 척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떻게 말을 해줘야, 저 사람이 다시 웃을까. 상혁은 작은 머리로 조금 신중하게 답을 생각했다. 형이 하는 행동이 싫다거나 형이 무서웠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좀. 처음이라서 낯설고 놀란 거예요. 그리고, 음... 부끄러운 거예요.


상혁은 천천히 최대한 인성에게 닿을 수 있는 말들을 골랐다. 허공을 배회하던 상혁의 눈동자가 인성에게 와 닿고 그렇게 말하는 상혁의 귀 끝이 새 빨갛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워? 네가 왜? 인성은 상혁의 말에 여전히 내려앉은 입 꼬리를 올리지 않고 물었다. 일부러 저를 위로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야, 음.. 우리가 진짜로,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이라는 자각이 들었으니까.”


우리가 진짜 연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너무 갑자기 들어서. 언젠가는 형이랑 자게 될 거고, 나도 그게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만 하고 있던 거랑 실제로 그런 분위기가 잡힌 건 좀, 다른 느낌이었다고 해야 하나. 놀라긴 했지만 솔직히... 싫지는 않았고. 근데 나는 그냥,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랐던 것 뿐이예요.


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말이 길어질수록 정리가 되지 않는 문장들에 상혁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그러니까 같은 침실에서 같이 자자고 했을 땐, 상혁도 분명히 이런 상황을 예상했고 그래서 한사코 싫다는 인성을 먼저 꼬신 거였다. 그러나 연애경험 전무하신 갓 스무 살 이상혁은 그게 이정도로 부끄러울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김인성이, 정말 이상혁을 보고 ‘흥분’을 하는구나. 라는 사실이 주는 충격이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상처받은 얼굴 안했으면 좋겠는데, 진짜.”

“내 얼굴이 그래?”

“내가 상처받아서 형을 피하는 걸까봐 엄청 무서워하는 얼굴인데.”


인성은 잠시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벌리고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상혁이 저를 똑바로 보는 시선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살짝 흔든 인성이 그제서야 흐리게 웃었다.


“나는 아직도 형이 날 빤히 보기만 해도 부끄러운데. 그걸 왜 부끄럽냐고 물어보면 답이 하나 일 수밖에 없지 않아요?”


좋아하니까. 너무. 내가 형을.


스트레이트, 어퍼컷, 훅. 상혁은 붉어진 얼굴만큼 마음을 전하는 데 서툴렀으나 그만큼 상혁의 진심을 듣는 건 설레는 일이었다. 상혁의 모든 처음은 당연히 인성일거라는 아주 사소한 믿음. 거기서 오는 설렘이었다. 인성은 덩달아 홧홧해진 얼굴을 하고 있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커다란 손 옆으로 떨어져 나갈 듯이 붉어진 귀가 보였다.


상혁은 손에 든 포크에 커다란 딸기를 쿡 찍어 인성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형아- 딸기 먹어요 딸기. 아아- 곰살 맞은 짓을 하며 인성이 얼굴을 보여주기만을 기다리는데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린 인성이 제 손등을 두드린 상혁의 손목을 잡고 힘을 주어 훅 당겼다. 코 앞에서 마주한 새까만 동공과 밝은 갈색의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반짝 거렸다.


“키스해도 돼?”


그렇게 묻는 인성의 손이 조금 떨리고 있어서 상혁은 세상 기쁘게 웃었다. Of course. 얼마든지요. 가볍게 답하는 상혁의 말에 인성이 무겁게 입술을 눌렀다.


***


상혁은 책을 좋아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학교 도서관에서 근로학생을 하면 월 5만원의 지원금이 나온다기에 1학년 때부터 점심시간 마다 도서관 사서 일을 했었다. 대학 입시가 바쁜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은 그런 일에 쉽게 자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혁은 어차피 애 저녁부터 포기한 대학입시여서 망설임 없이 손을 들었었다. 어차피 학기 초에 기초 수급자로 이름이 알려진 후로 점심시간에 저와 같이 밥을 먹고 어울려주는 학급생도 없었던 터였다. 잘 됐다 싶었다.


전교생 중에 겨우 두엇 즈음이 도서관을 찾는 점심시간에 낡은 책장 사이에 박혀 책을 읽는 시간이 상혁이 학교를 다니면서 가장 좋아했던 시간이었다. 틈이 날 때마다 책을 읽었다. 그 시간은 온전히 학교에 있어도 누구의 시선도 받지 않는 시간이라 편했었다.



재윤이 추천해 준 베이킹 책을 골라 한 켠에 두고 인성에게 읽고 싶은 책을 좀 찾아봐도 되겠냐고 물었다. 물론 상혁의 말에 인성이 No라고 답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천사들의 제국’. 상혁은 조금 두리번거리다가 고민 없이 책을 뽑아들고 인성의 앞에 섰다. 이걸로 할래요. 읽고 싶은 책을 손에 들고 답지 않게 들 떠 있는 상혁은 또 색다르게 귀여웠다. 새삼 스무 살 같이 귀엽네 우리 상혁이? 인성이 놀리듯 말하는데도 상혁은 그저 웃었다. 이 책 좋아하는 책이야?


“고등학교 때, 사서 일을 했어요. 교내 도서관에서 근로학생 했었거든요. 졸업 전에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동명작가의 ‘타나토노트’라는 책이었어요. 사후세계에 관한 책인데 이 책의 스핀오프 같은 거요. 그래서 다음 편을 읽어 보고 싶었는데 카페 알바 하면서는 사서일을 그만 두게 돼서 책을 거의 못 읽었거든요. 이건 진짜 읽고 싶었어요.”


웬일로 아이가 종알종알 제 얘기를 꺼내는 탓에 인성은 상혁에게 책을 건네받고 계산을 마치면서도 신기한 눈으로 상혁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사후세계? 그런 거에 관심이 있어? 의외라는 듯 어깨를 으쓱한 인성에게 상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그런 걸 고민했던 시기가 있었거든요. 타나토노트를 보면 수많은 사후세계 탐자사 들이 자기가 생애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들을 단계별로 마주쳐요. 이 책처럼 더 이상 이 생에 미련이 없어질 만큼 좋은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곳이 ‘죽음’이라면 나는 죽어도...


거기까지 얘기 했을 때, 상혁은 문득 이런 말을 인성에게 해도 되는 걸까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 두 걸음 뒤에서 우뚝 멈춰버린 인성에 입을 다물었다. 상혁은 저도 모르게 아, 미안해요. 사과의 말을 먼저 뱉었다.


“그런,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는 게... 그러니까...”


동공지진을 일으키며 허둥지둥 거리던 상혁은 말없이 저를 품안 가득 와락 안아주는 인성에 입술을 꼭 깨물었다. 한참 만에 형, 화났어요? 하고 눈치를 보는 상혁의 어깨에 고개를 얹은 인성이 아니이... 하고 말꼬리를 길게 늘여 말했다. 상혁아, 지금도 사후세계가 궁금해? 그렇게 묻는 인성의 가슴팍에 이마를 누르고 상혁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지금은 가능한 한 오래, 형 옆에 있고 싶어요. 그냥, 잘 참고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인성은 조금 힘주어 상혁의 몸을 끌어 앉았다. 네 몸에 있던 흉터들 중에는 네가 너한테 낸 상처도 있었을까, 인성은 문득 소름이 끼쳤다. 그때보다 더 늦게 너를 발견했더라면, 네가 우리 카페로 와서 날 만나지 않았다면, 내가 너에게 첫 눈에 반하지 않았다면. 수많은 ‘만약’ 이라는 상황들이 우리 주변을 스치고 우리가 만나서, 너는 나로 인해 구원받고 나는 너로 인해 제대로 된 어른이 되고. 우리는 서로가 아니면 안 될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상혁아, 사랑해.”


좋아해. 보다 더. 마음을 가득 담은 말이었다. 상혁은 책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린 뻔 해서 부러 더 힘을 주었다. 얌전히 인성의 품에 안겨서 대답 없이 한 손을 뻗어 인성의 허리를 감쌌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언제 그런 소리를 타인에게 들어 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처음인 것 같았다. 미약하게 떨리는 상혁의 어깨를 그러안은 인성이 낮게 웃었다. 이런 말이 있어서 다행이야. 좋아해보다 더 큰 마음을 전 할 수 있는 말이.


그 다음엔 조금 아쉬워 졌다. 고작 그 세 글자로 다 전하지 못할 마음이 너무 많이 남아서. 이 작은 아이를 더 많이 사랑해 주고 싶어서. 인성은 그냥 사랑해. 하고 한 번 더 말했다. 겨울이 끝나가는 계절의 길목이었다.




***


한가로운 날의 오후였다. 제법 따뜻해진 바깥 날씨에 내일부터는 야외 테라스 테이블을 펼쳐야겠다고 영빈이 말했다. 상혁은 유리문 너머로 근 세달 넘게 켜켜이 쌓여 있던 테이블과 의자들을 눈으로 훑었다. 밖에 테이블 미리 닦아 놓을까요? 그렇게 묻는 상혁에게 영빈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 없을 때 미리 해 놓을까? 하는 영빈의 말에 상혁이 부지런히 카운터에서 일어나 비품실로 가 걸레며 세정제를 들고 나왔다.


“아, 그러고 보니 인성이는 언제 온데?”

“모르겠어요. 점심때 연락했는데 아직 답이 안 왔어요.”


인성이 본가에 갔다.


어머니의 생신이라고 했다. 같이 갈래? 그렇게 묻는 인성에게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장난 상혁을 보고 인성이 장난끼 섞인 얼굴로 새초롬하게 웃었다. 장난이야, 뭘 또 그렇게까지 굳어. 아침에 출근하는 상혁의 입에 딸기 잼을 듬뿍 바른 토스트를 물려놓고 평소와는 조금 다른 몸에 핏한 수트를 입은 인성은 꽤 멋졌다. 부모님을 만나러 본가에 가는데 수트까지 입고가요? 우물우물 빵을 입 안 가득 밀어 넣고 출근 준비를 하던 상혁이 막 현관에 있는 거울을 보면서 넥타이를 매던 인성을 보고 말했다.


어머니가 좀, 격식 있는 걸 좋아하셔. 아마 집에 가도 집보단 밖에 오래 있을 것 같고. 상혁은 보지 않고 넥타이에 집중한 인성이 마무리로 넥타이 핀까지 끼워 넣으며 자켓의단추를 잠궜다. 왁스로 깔끔하게 정리한 차분한 머리와 하얀 셔츠에 짙은 네이비색 수트, 새틴이 가미된 심플한 내로우 타이가 깔끔했다. 상혁아 형 어때? 상혁에게 검사를 받듯 빙글 돌아선 인성이 빵을 씹다 말고 입을 떡 벌린 상혁의 표정에 푸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늘 저랑 다른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오늘따라 정말 다른 사람 같았다. 형, 형 혼혈이었어요? 한국하고 천국? 상혁의 말에 인성은 나가려고 구두를 꺼내 신다 말고 다시 집으로 들어와 쪽쪽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아, 딸기쨈 맛 난다 상혁아. 달아.




퇴근 전에는 돌아 올 거라며 매장에서 퇴근 할 때는 함께하자고 말했는데, 점심시간이 돼서 외식하러 나왔다는 연락을 마지막으로 인성은 감감무소식이었다. 고작 하루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오늘따라 날은 좋고 시간은 더디고 인성은 보고 싶었다.


“인성이 형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세요?”

“나도 몇 번 뵌 적은 없는데, 인성이 아버님이 무슨 기업 총수시고 어머님이 어디 대학 교수시고. 암튼 두 분 다 좀 저명하신 분들이지.”

“아...”

“인성이가 어머니 따라서 어렸을 때 거의 해외에서 살았어. 대학교 때도 여행 진짜 많이 다녔고. 그때 프랑스에서 재윤이도 만난거래.”


오랜만에 환기 좀 하자며 잠시 매장에 브레이크 타임을 건 영빈이 재윤이 재료 준비할 시간에 우린 테라스 테이블 좀 닦자 하고 밖으로 나갔다. 햇빛이 쨍쨍하고 구름 한 점도 없는데 바람은 아직 차가워서 유니폼 차림으로 나온 영빈이 으으... 앓는 소리를 냈다. 상혁은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또, 또, 아가야. 너 혼자 머리 굴리면서 고민하는 거 다 보인다.”

“네?”

“내가 말했잖아. 고민 없이 김인성 빨아 먹으라고. 넌 아직 스무 살이고 네가 김인성 나이가 됐을 땐 김인성 집안이 하찮아 보일 정도로 엄청 대단한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어. 그게 김인성이 너한테 쉽게 못 다다간 이유고 나이가 어리다는 메리트거든?”


나이가 어리다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서 두렵고 무서운 게 아니라 무궁무진해서 설레고 대단한 거야. 당사자들이 느끼기엔 불안함 일 수 있어도 어른들 눈엔 그게 안 그렇거든? 내가 엄청 나이가 많은 건 아니지만, 우리도 그렇게 하고 싶은 걸 찾았고. 그리고 생각보다 인성이네 부모님 되게 다정하고 좋은 분들이야. 영빈은 고민이 많아 보이는 고요한 상혁의 얼굴을 보며 부러 더 과장 되게 위로를 건넸다. 제 얼굴이 그렇게 티가 나나 싶어 상혁은 괜히 입술을 삐죽거리며 걸레질에 속도를 붙였다.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저.


근데, 그 다정한 부모님들이 하나 뿐인 아들이 남자를, 그것도 아무것도 볼 거 없는 스무 살짜리 어린애를 만나는 것도 다정하게 괜찮다고 하시겠어요?


상혁은 아무생각도 안 한 게 아니라 그냥 온 종일 인성으로 가득 찬 머리에 괴로웠다. 인성을 만나기 전엔 살아가기 급급했던 인생이었는데, 여유가 생기고 마음이 떨리고 연애까지 하고 나니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제 인생에 버티고 살아 있기만 했던 지난날이 부끄럽고 창피해졌다. 막장 드라마 같은데 많이 나오지 않나? 감히 너 같은 게 내 아들을 넘봐! 하면서 물 따귀 때리는 재벌 집 사모님들. 무슨 기업 총수고 그러면 인성이 형도 대단한 집 아들이고 그런 거 아닌가.


“형, 그럼 인성이 형도 막... 재벌 아들이고 그래요?”

“어? 음... 뭐 우리 같은 서민 입장에선 비슷하지 않나? 중견기업 총수 아들이나 별세개짜리 기업 아들이나. 그렇게 따지면 김인성도 재벌이지 뭐.”


영빈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겠지만 그 말을 듣는 상혁은 이미 제가 인성의 부모님에게 거절당하는 오조 오억 개의 시나리오가 머릿속을 펼쳐졌다. 테이블과 의자를 정리하고 영빈에게 걸레와 세정제를 받아들고 비품실을 향하는 상혁의 입에서 연거푸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 나 사고 쳤나 보네. 영빈이 그 모습에 인성에게 이실직고하기 위해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너네 집 재벌이라고 장난처럼 입 털었더니 너네 집 꼬맹이가 계속 한숨 쉼]


상혁에게 연락이 잘 안된다고 했으니까 연락이 오려면 좀 멀었겠지 싶었는데 카톡을 보내자마자 바로 답장이 날아왔다. 발신자는 김인성. 상혁에게 2시간 전부터 연락이 끊겼다던 이 카페의 사장님이었다.


[넌 꼭 장난도 진담처럼 하더라. 유머도 없고 센스도 없어, 우리 상혁이랑 이제 말하지 마. 상혁이 시무룩해 하면 가만 안 둔다. 머리끄댕이 다 잡아 뜯을 거니까 딱 기다려. 지금 간다.]


지금, 온다고? 여기를? 어어... 영빈은 테라스 한 가운데 멀뚱이 서서 어느새 브레이크 타임 팻말을 오픈으로 바꿔 걸고 카운터로 돌아가는 상혁을 눈으로 쫒았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의 전개라서 괜히 카페가 있는 길목을 좌우로 넓게 살폈다. 그냥 짜증나서 하는 말이겠지? 나한테 조심하라고? 허허 웃은 영빈이 근데 왜 상혁이 카톡은 씹지? 떠오르는 의문을 뒤로 한 채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정확히 30분 후에 카페 문을 연 건 올림머리가 우아하고 차려입은 아이보리색 투피스 정장이 세련된, 너무 익숙한 얼굴의 손님이었다.


“어서 오세요, 손님.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오랜만에 햇살이 밝아 카페에 손님은 적당히 차 있었고, 그 덕에 영빈과 재윤이 커피와 디저트를 준비하느라 주방이 분주했다. 구두를 신고도 또각 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게 사뿐사뿐 걸어 온 손님은 카운터에서 인사를 건네는 상혁에게 고개를 살짝 내렸다 올리며 인사를 하곤 메뉴판을 훑어 카푸치노 한 잔을 주문했다. 포스기에 메뉴를 눌러 계산을 하던 상혁은 손님이 저기.. 하고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얼른 고개를 돌리고 네, 손님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하고 되물었다.


“혹시 이상혁씨 되세요?”


그 짧은 질문에 상혁이 대답을 망설인 건, 대답도 전에 카페 문을 열고 들어 온 인성이 엄마 벌써 들어오셨어요? 라고 세상 발랄하게 인사했기 때문이었다.


엄마...? 엄마라니, 누가.


머릿속에서 뚜, 뚜, 뚜 간헐적으로 울리던 경고음이 삐- 소리를 내며 터져 버릴 듯 울리고 인성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 봤던 여자 손님, 그러니까 인성의 어머니가 다시 고개를 돌려 상혁과 눈을 마주치자 상혁은 마치 고속도로를 주행하던 승용차 불빛에 놀란 아기 고라니처럼 왁! 하고 펄쩍 뛰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이상혁이라고 합니다!!”


맙소사. 머릿속을 꽉 채운 한마디는 그것뿐이었다. 상혁의 우렁찬 인사에 나와 본 영빈이 어, 아줌마 안녕하세요- 하고 반갑게 인사했고 어머, 하고 고상하게 입을 가리고 놀랐던 인성의 어머니는 고개 숙인 상혁의 모습과 인사를 건네는 영빈에 정신이 없어 난감해 하는 중이었다.


푹 숙였다가 일어서는 상혁의 얼굴이 딸기마냥 새 빨겠다. 얼른 다가 온 인성이 놀란 것 같아 보이는 상혁에게 미안, 미리 연락을 못했다. 알면 너 더 긴장할 까봐.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있으라고. 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래도, 그래도! 언질은 해주지 이 못된 형아야! 상혁이 입술을 질끈 물고 인성을 힘껏 노려보자 그 와중에도 상혁의 입술 걱정을 하는 인성이 어허, 이 버릇 고치라니까 하면서 상혁의 입술을 손으로 슥 훑었다.


“미쳤어요, 어딜 만져요!”


상혁과 어머니 사이를 가로막고 선 인성이 제 가슴팍을 투닥투닥 거리며 우는 얼굴로 잉잉 목소리를 죽이는 상혁을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아니, 나는 너 입술 상할까봐 상혁아. 근데 그런 멘트는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 나 그냥 입술 만진 건데. 이 와중에도 저를 향하는 인성의 목소리가 너무 장난스럽고 다정해서 상혁은 정말이지 울고 싶었다.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아 발만 동동 구르는데 뒤에서 인성의 등을 톡톡 친 어머니가 상냥하게 웃으면서 상혁에게 다시 인사를 건넸다.


“이 녀석이 카페에 새로운 사람을 들였다 길래, 점심 먹고 내가 너무 와보고 싶다고 졸랐어요. 너무 갑자기 와서 놀랐나 보다. 그쵸?”


상혁을 향해 말을 건네는 인성의 어머니는 목소리부터 자상했다. 어쩐지 너무 낯이 익은 얼굴이다 했는데 그러고 보니 끝이 얇은 눈매와 좁은 코 끝, 웃는 상의 입 꼬리까지 전부 인성을 닮아 있었다. 형 외탁했구나. 상혁은 속으로 실없는 한탄을 하며 아, 아니예요. 그냥 손님인 줄 알았는데 사장님 어머니라고 하시니까 너무 놀라서.


손사레를 치는 상혁의 동공지진을 바라보던 인성의 어머니는 저를 돌아보며 세상 뿌듯한 얼굴을 해 보이는 인성을 좀 얄미운 듯 웃으며 째려보셨다. 그렇게 좋니? 하고 묻는 말은 긴장한 상혁의 귀에는 전혀 들어가지 않았고 옆에 서서 재윤을 부르던 영빈만 정확하게 들었다. 헐, 소리 없이 입만 벌린 영빈이 인성을 바라보며 눈으로만 물었다.


너 설마 말했어?


말을 못 할 건 또 뭐야?


머뭇거림 없이 단 번에 어깨를 으쓱하며 개구지게 웃어 보이는 인성에 영빈은 상혁을 좀 안쓰럽게 바라봤다. 와, 사랑에 미친 김인성은 진짜 노빠꾸네. 불도저다 불도저. 이상혁 힘내라. 영빈은 조금 조심스럽게 인성의 어머니를 표정부터 살폈고 그래도 인성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다지 나쁜 상황은 아닌 것 같아 재윤을 인사시키고 주방으로 돌아섰다. 카푸치노 맞으시죠? 물으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던 인성의 엄마가 인성의 옆으로 비켜서 상혁의 앞에 반듯하게 섰다.


“혹시 바쁘지 않으면 내가 커피 마시는 동안 나랑 말상대 좀 해 줄래요?”

“제가요?”

“네, 상혁씨가요.”

“아...아.. 네.”


갑작스런 제안에 눈치를 살피던 상혁은 인성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알았다며 앞치마를 벗고 인성의 어머니가 걸음을 옮기는 창가자리로 쫄래쫄래 따라 걸었다. 오늘 아침에 봤을 땐 저 말도 안 되게 잘생긴 남자가 제 연인이라는 게 너무 뿌듯하고 행복했는데 지금 보니 수트를 차려입은 김인성이 너무 저승사자 같아서 가다말고 뒤를 돌아선 상혁이 인성을 향해 주먹을 들어 보이곤 인상을 썼다. 이따 봐요 진짜, 가만 안 둬! 입모양으로 중얼거리며 홱 돌아선 상혁에 인성이 그제서야 좀 긴장한 표정을 해보였다.


“오늘의 케이크랑 딸기 마카롱도. 같이 줘. 아이스 초코도.”


자켓을 벗어 카운터 뒤에 놓아둔 인성이 주방으로 다가가 추가 메뉴 몇 개를 더했다. 순전히 이상혁 취향에 맞춘 메뉴들에 영빈은 으이구- 하는 표정으로 이제 좀 무섭냐? 하며 인성을 나무랐다.


“아니, 엄마가 오자고 너무 막무가내였어.”

“네가 아줌마한테 얼마나 주접을 떨었으면 그러시냐고.”

“몰라, 갖다 주는 건 내가 할 테니까. 메뉴 준비 다 되면 불러.”


카운터에서 가장 먼 창가자리를 택해 상혁과 마주 보고 앉은 제 어머니의 표정을 저조차도 가늠 할 수가 없어서 인성은 안 그런 척 초조하게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오늘 이렇게 불쑥 말한 건, 기분이 가장 좋을 때 한 번씩 상혁을 언급해 익숙해 질 때쯤 소개시켜 드리려는 요량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불쑥 카페로 오게 됐는지. 후우... 괜찮은 척 하며 애써 웃고 있던 인성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야 커피랑 케이크 받아가.”


영빈은 픽업 대에 얌전히 놓인 쟁반을 밀며 인성을 불렀다. 풍성한 우유 거품과 시나몬 가루가 솔솔 뿌려진 부드러운 카푸치노와 달콤하고 차가운 아이스초코가 참 안 어울리는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쟁반을 받아 든 인성이 창가 자리로 다가가 쟁반을 내려놓을 때까지 줄곧 마주 앉은 채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던 인성의 어머니가 인성을 향해 웃는 낯으로 말했다.


“넌 이제 이 자리 근처엔 오지 마. 둘이 하고 싶은 얘기가 많으니까.”


인성은 잔뜩 굳힌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렸고 인성의 어머니는 얼른 가. 하고 인성을 향해 손을 휘이휘이 저었다. 상혁은 여전히 온몸이 잔뜩 굳은 채였고. 인성은 마지 못 해 발을 돌렸다.


“마셔요. 내가 사는 건 아니지만 우리 아들 카페는 커피도 디저트도 다 맛있더라고.”

“아, 네.”


“그래서, 우리 인성인 어디가 좋았어요?”


노빠꾸도 유전인가 봐. 평화롭던 상혁의 일상에 파동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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