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되는 사이

그래도 되는 사이 01

처음 뵙겠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형, 심지어는 누나까지도 줄줄이 직업 군인을 배출한 광산 김씨 집안에서 유일하게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2남 1녀중 막내 김영빈이었다. 물론 집안 어르신들은 광산 김씨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쳐 살아봐야 하는 거 아니겠냐며 아주 어린시절부터 영빈네 3남매를 군인으로 만들기위해 조기교육을 시켰으나 김영빈은 그 뜻에 반기를 든 유일한 인간이었다. 군인이기를 거부했으나 광산 김씨 집안 누구보다 대쪽같기로는 장군감이라 다들 영빈이 군에서 육군병장 만기 제대를 했을 땐 진심으로 아쉬워들 하셨다.

 

다행이도 영빈의 아버지는 집안 어르신들과 달리 막내 아들의 다른 꿈을 응원해 주셨는데, 영빈이 제 아들이라서 이기도 했고 아버지 본인도 할어버지 손에 이끌려 억지로 사관학교에 입학한 탓에 제대로 된 꿈을 가져보지도 못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고 싶은 게 뭔지 안다는 건 엄청 멋진거야."

 

영빈의 아버지는 군인이 되지 않을 거라는 막내아들에게 호탕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해주셨다. 어차피 안된다고 하셔도 밀어붙일 생각이었다고 영빈은 태연하게 덧붙였다. (그 말을 했을 때 영빈의 아버지는 너한테 정말 군인 피가 흐르기는 하는구나, 딱 장군감이네. 하며 또 한바탕 웃으셨다.)

 

뼈대가 유독 가는 영빈은 어릴 때부터 운동을 질색했지만 그 피는 어디 가지 않는다고 뛰었다 하면 달리기 1등, 던졌다 하면 3점 슛, 찼다 하면 골대 안이었다. 덕분에 남중 남고를 나오면서 육상부, 농구부, 축구부 등등 내로라하는 운동부라면 김영빈 한 번 탐내 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중학교 때는 사내놈은 무조건 나가 뛰어야 한다고 할아버지가 닦달하는 바람에 억지로 축구부에 들었지만, 그마저도 뛰어다니기는 싫다는 영빈의 강력한 항의에 골키퍼를 했었더랬다. 그리고 그해 안양시청장배 중학교 축구대회에서 영빈은 골키퍼로 드물게 MVP를 받은 전적도 있었다. 타고난 운동신경이라는 말이었다.

 

너 운동 뭐 좋아해? 라고 물으면 영빈은 말라빠진 가는 팔다리를 보여주며 숨쉬기. 라고 답했다. 그 말라빠진 살가죽이 전부 근육이라는 건 불알친구 김인성밖에 몰랐다. 그야말로 군인이 되기 위해 타고난 신체와 천부적인 재능, 대쪽같은 성격을 가지고 김영빈이 선택한 직업은,

 

"주문하신 예가체프 한 잔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바리스타였다.

 



그래도 되는 사이 01

 재윤 x 영빈

W. 갈피




김영빈과 김인성이 열게 될 카페의 점주는 표면상 인성이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명의는 공동이었다. 애초에 꿈 없고 하고 싶은 일 없는 천하제일의 부르주아 백수 김인성을 꾀어서 카페를 기획한 것도 영빈이었다. 카페, '그라치오소'는 이름만 김인성이 짓고 외관부터 내부까지 전부 영빈의 손이 닿았다. 그래놓고선, 사장이든 점장이든 너 해. 나는 커피만 만들 수 있으면 돼. 하고 쿨하게 공동 명의자의 권위를 벗어던졌다. 영빈은 책임자 같은 건 딱 질색이었다.

 

"근데 명색이 디저트 카페에 파티시에는 언제 와? 베이킹룸까지 내가 손댈 순 없어. 애초에 난 빵은 잘 모른단 말야."

 

그냥 음료만 하자는 걸 수익성이 있으려면 디저트도 같이 해야 한다며 김인성이 고집을 부렸다. 어디서 파티시에를 데려올 건데? 소박하고 작은 카페를 원했던 영빈은 갑작스러운 인성의 디저트 타령에 조금 기분이 상해서 툴툴거렸다. 내 커피만으론 수익성이 없다는 거야? 눈썹을 이렇게 추켜 올리곤 큰 눈을 모로 뜬 영빈에게 인성은 그냥 샐샐 웃어 보였다. 저 사람 좋아 보이는 영업용 미소, 영빈은 지는 척하며 넘어가기로 했다. 김인성은 하고 싶은 게 없어도 맡은 바엔 계획이 다 있는 놈이었다. 그래서 점장직을 믿고 맡긴 것도 있었으니까, 뭣도 없이 디저트 카페 얘길 꺼낼 녀석은 아니었다.

 

"내가 아는 파티시에한테 부탁했는데 한 번 와 보겠데."

"애초에 그 사람 생각하고 디저트 카페로 만든 거면서."

"그렇긴 하지."

 

김인성이 0.1초도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말한 거면 무언가 상대가 거절 할 수 없는 미끼를 던져놨다는 뜻이었다. 김인성은 호구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웃고 있지만 웃는 사이 사람을 홀리는 녀석이다. 그러니까 초중고 대학 내내 저 녀석에게 목을 매다가 허공에 마음 흩뿌리고 울면서 떠난 사람들이 한 트럭인 거라고 생각하면서 영빈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물론 그걸로 손해도 많이 본 녀석이었다. 대가 없는 호의를 사람들은 어느샌가 권리인 줄 알고 인성을 상처 입혔다. 영빈은 그걸 다 알고도 김인성 옆에 그냥 소나무처럼 있어 준 사람이었다. 친구 좋다는 게 뭐야, 믿으라면 나는 그냥 믿는 거지. 영빈은 언제나 인성에게 한결같이 사람에게 다정할 수 있는 건 대단한 일이라고 말했지만 반대로 인성은 영빈에게 다정하지 않고도 옆에 사람을 둘 수 있는 영빈이 대단하다고 말했다.

 

"그럼 너만 믿고 베이킹룸은 손 안 댄다?"

 

조금 가벼운 표정을 지은 영빈이 카페의 설계 도면을 보다가 딴청을 피우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인성에게 톡톡 테이블을 쳐 주의를 집중시켰다. 인성은 누군가와 한참 연락을 주고받더니 난감한 표정을 해 보였다. 야, 너 나 이사한 거 알지? 대화의 흐름이 이상했지만 둘의 대화는 언제나 맥락이 없었다. 원래 서로에게만은 둘 다 저 하고싶은 말만 내뱉는 타입이라 아직 친구인 걸 수도 있었다.

 

"카페랑 출퇴근 가깝게 하려고 여기 위치 알아보면서 같이 이사했잖아. 그건 왜?"

"그래서 우리 집에선 아직 누가 와서 같이 지내려면 뭐가 많이 부족하고 불편 할 것 같아서."

"하고 싶은 말은 요점만 말할래? 돌려 말하는 거 딱 질색하는 거 알잖아."

"그 파티시에가 우리 카페를 오케이 했는데 공사 시작하는 날부터 당장 서울에 지낼 곳이 없데."

"그래서?"

"그래서는 뭘 그래서야, 서울에서 집 구할 때까지 너희 집에 신세 좀 지자는 거지."

 

갑자기? 응, 갑자기.

 

김인성이 다 계획 있긴 개뿔. 무계획이 가장 완벽한 계획이라더니 그 계획, 참 훌륭했다. 김영빈은 맺고 끊음이 확실한 편이지만 유독 사람 사이 정에 약하고 감정에 휘둘리는 편이었다. 집도 절도 없지만, 우리랑 일하겠다고 프랑스 유학까지 조기로 마치고 귀국하는 사람인데 하필 집이 부산이라 카페 내부 공사 일에 맞추려면 미리 와서 집을 구하는 건 좀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긴 유학 생활을 끝내고 모처럼 한국에 오는 건데 집에 들러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냐는 인성의 말에 영빈도 동감을 하는 터라 당장에 갈 곳이 없어진 신원 모를 사람을 일단은 집에 들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물론 영빈이 정 싫다고 하면 저 준재벌 점장님은 호텔이라도 알아봐 주겠지만,

 

"내가 거절 못 할 거란 거 너무 잘 써먹는다?“

 

영빈이 푸념하듯 입술을 툭 빼물어도 인성은 그런 걸 보고 꿈쩍할 인물이 아니었다. 아니, 타인한테 다정하고 예의 있는 것만큼 친구한테도 그래 보지? 영빈이 툴툴거리며 말하면 인성은 어깨를 으쓱했다. 분명 너도 마음에 드는 사람일 거야. 여유롭게 말하는 모습은 좀 못 미더웠다. 김인성 사람보는 눈은 언제나 개 똥이었다.

 

 

 

”그래서 언제 온다고?“

이제 거의 도착 했을 거야, 방금 헤어졌어.

”마침 청소도 다 끝났는데 다행이네. 우리 집 주소는 알려 준 거지?“

 

한창 손님맞이 청소를 하느라 오랜만에 집안에서 분주했다. 혼자 독립하게 되면서 게스트룸을 만들어 놓긴 했지만, 가족들이 가끔 왔을 때 쓰거나 요 며칠 이사를 준비하던 인성이 와서 지냈던 것 말고 완전한 타인이 와서 게스트룸을 쓰는 건 처음이라 조금 신경 쓰였다. 나이는 우리보다 한 살 어리고,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 중이었고, 한국 고향은 부산이고.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는 사람이랑, 카페를 하는 게 꿈이었데.

 

그 말에 좀, 영빈은 눈이 번쩍 뜨였다. 설마 김인성이 내민 그 거절 할 수 없는 미끼가... 하고 생각했다가 아, 이건 좀 과잉이다. 하고 금방 생각을 접었다. 그러다가 문득 신경이 쓰이는 건 딱 그런 느낌이었다. 여태까지 전혀 모르고 지냈던 누군가가 있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걔가 사실은 너 좋아한다더라. 하면서 가십거리를 건네면 그 말에 신경 쓰여 그 애를 평소보다 배는 더 보게 되는 그런 느낌. 영빈은 괜히 핸드폰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곤 입술을 잘근거리다가 욕실에 가서 씻기로 했다. 그래도 첫인상은 좋게 남겨야지. 아침부터 청소하느라 꼬질꼬질한 느낌에 머리를 털기로 했다.

 

인터폰은 마침 영빈이 머리를 다 말렸을 때 울렸다. 오, 첫만남부터 타이밍 굿이네. 눈은 동그랗게 뜬 영빈이 드라이기 선을 잘 정리해 욕실 선반에 넣어두고 거울을 한 번 보며 머리칼을 털었다. 얼마전에 밝은 색으로 탈색한 머리칼이 개털같이 붕붕 떠오른 상태이긴 했지만 손님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서 일단 인터폰을 들었다.

 

”네.”

[아, 저... 그, 오늘부터... 여기서 지내기로 한...]

“아, 파티시에?”

[아, 예에...]

“문 열어 줄게요. 들어와요.”

 

목소리부터 말랑말랑한 느낌이었다. 빵만드는 사람이라서 그런가. 별 생각을 다하며 로비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현관문을 미리 열어 도어 스토퍼를 세워놓고 중문을 열어두었다. 짐을 옮기려면 현관에 신발은 없는게 좋을거 같아 제 신발도 전부 신발장 안에 가지런히 넣어두고 나자 딱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후다닥 달려다가 손부터 내미는데 목소리만큼이나 말랑하게 생긴 남자가 눈꼬리가 부드럽게 내려간 얼굴로 손을 맞잡아 왔다.

 

“반가워요. 나는 김영빈, 나보다 한 살 어리다고 들었는데 말 놔도 돼요?”

“아, 네.”

“너도 놔도 돼. 그냥 영빈이 형이라고 불러.”

 

초면부터 빠르게 말을 터야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아 낯가림이 있는 편이지만 일단 제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재윤이라고 합니다. 첫인사로 알려준 이름은 꼭 하얀 얼굴에 잘 어울리는 단정한 이름이었다. 재윤이 영빈의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 때만 해도 영빈은 왠지 호감 가는 첫인상에 웬일로 인성의 안목을 칭찬하는 중이었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들어 올린 재윤이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저를 끌어당길 때도 의외로 낯가림은 없는 건가 싶어 그대로 딸려갔다가 귓가에 쪽, 쪽- 하는 소리를 들으며 가볍게 붙었다 떨어지는 말랑한 뺨의 감촉을 느낀순간 놀란 토끼눈이 되어 재윤의 가슴팍을 밀고 후다닥 떨어져 양손으로 뺨을 감쌌다.

 

어? 뭔데? 뭐했어 너 방금?

 

영빈의 반응에 놀란 건 재윤도 마찬가지였는지 허공에 뻗은 손을 그대로 두고 똑같이 놀란 얼굴로 영빈을 내려 보는데 눈이 마주친 순간 이유 모를 웃음이 빵 터져 버렸다.

 

“아니, 그 프랑스에서는 인사를 이렇게 하는데요! 제가 습관이 되나 가지고요. 죄송합니다!”

 

눈코입이 다 열려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제 얼굴에 얼마나 당황했으면 하얀 얼굴이 새빨개진 재윤이 두 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뒤죽박죽으로 엉망인 사투리를 쏟아냈다. 재윤아 너 부산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거 어디 사투리야? 푸하하하- 크게 터진 웃음소리 사이로 눈물까지 맺힌 영빈이 현관 앞에 주저앉아 깔깔거리는 사이 재윤은 울상을 지으며 발을 동동거리는 중이었다.

 

“아, 미안. 재윤이 너 놀란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눈앞에서 안쓰럽게 휘적거리는 재윤의 팔 한쪽을 손을 뻗어 덥석 잡은 영빈이 응차 소리를 내며 일어서 괜찮다며 재윤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쳤다. 이제 들어가자. 먼길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내가 너무 오래 세워뒀다. 프랑스식 인사인지 뭔지 재윤을 두고 짐을 번쩍 들어 올린 영빈이 앞서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따끈해진 뺨을 손등으로 슥 훑었다. 남자애가, 피부가 엄청 좋네. 말랑말랑. 당황스러움에 웃어넘겼지만 가슴은 아직도 벌렁거려서 재윤이 제대로 따라 들어오는지도 확인하지 못하고 후다닥 게스트룸으로 짐을 옮긴 영빈이 뒤늦게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에 어깨를 움찔하고 놀랐다가 습습후후 괜히 심호흡하며 재윤을 맞이하러 거실로 향했다.

 

“더워? 얼굴이 좀 빨갛다.”

 

제 얼굴도 빨간 건 차마 모른 척하던 영빈이 좀 전보다 붉어진 재윤의 얼굴을 보고 에어컨의 전원 버튼을 눌러 온도를 내려놓자 재윤도 마지못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네요. 좀 덥네요. 여름이라. 눈을 굴리며 집안을 둘러본 재윤이 맞장구를 치자 영빈이 밥은 먹었어? 우리 우선 짜장면이라도 먹을까? 이것도 이사라면 이산데, 원래 이사 한 날은 중국 음식 먹는 거잖아? 그치? 하며 속사포 랩을 하듯 다다다 말을 건냈다. 어색하면 말이 많아지는 타입인 것 같았다. 재윤이 들고 있던 짐들과 메고 있던 백팩을 벗으며 아, 저는 좋아요. 하고 한 템포 느리게 답하자 영빈은 벌써 핸드폰으로 근처 중국집에 전화를 걸며 게스트룸의 문을 가리켰다. 너 저기 쓰면 돼. 일단 짐부터 풀고 좀 씻어. 청소는 내가 대충해놨어. 욕실은 저 쪽. 전화가 연결된 듯 집주소를 말하며 뭐 먹을래 묻는 영빈에게 대충 저는 짜장면이요. 하고 답한 재윤이 영빈이 주문하는 소리를 뒤로 제 임시 거처가 될 방안으로 조용히 들어섰다.

 

김인성(카페 점장님)

어때? 새로운 룸메이트는? PM 01:16

 

때마침 울리는 핸드폰 진동에 주머니를 뒤적거리자 인성의 카톡이 와 있었다. 어떠냐는 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 건가? 첫인상이 어땠냐고? 아, 음... 친절하시고 성격이 좀 급하신 것 같고... 우후죽순 떠오르는 영빈에 대한 첫 감상들을 꼭꼭 함축해 ‘좋으신 분 같아요.‘, 라고 딱 떨어지는 일곱 글자로 전송한 재윤이 영빈이 미리 가져다 놓은 제 캐리어 옆에 보스턴 백과 백팩을 추가로 밀어 놓으며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아, 음. 그러니까. 영빈의 첫인상은, 사실 인성이 프랑스에 있는 재윤에게 먼저 사진으로 보여 줬지만, 실제로 보니 좀 더. 친절하시고, 성격이 좀 급하신 것 같고 또, 좀... 귀여운 것 같아요.

 

***

 

사실 재윤에게 있어 커피는 빵을 만드는 제빵사로서 로망이긴 했지만 정작 커피 자체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막연한 느낌이었다. 아침에 씻고 나와 머리를 핸드드라이로 말리며 거실로 나왔을 때 코끝을 스치는 커피 향은 좀 신선한 충격이었다는 말이었다. 주방을 길게 가로지르는 아일랜드 식탁을 간이 카페로 만들어버린 영빈이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르게 말끔한 모습으로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고 있는 모습에 우와- 소리를 내며 홀린 듯이 다가가자 재윤을 발견한 영빈이 씨익 웃었다. 형, 지금 좀 잘생겨 보인다.

 

“너도 한 잔 마실래?”

“원래 이렇게 아침마다 내려 먹어?”

“내가 좀 아침형 인간이거든. 꼭두새벽에 일어나고 초저녁 잠 많고.”

 

군대에서 제대하고 그 습관 그냥 그대로 둔 거지 뭐. 사실 군대 가기 전에도 집안사람들이 전부 생활 방식이 아침형이라서 익숙하기도 했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식탁 의자에 앉은 재윤의 앞으로 코르크로 된 코스터를 놓아준 영빈이 커다란 머그잔에 방금 내린 고소한 향의 커피를 놓아주고는 손잡이를 잡으려는 재윤의 손을 저지하며 뜨거운 물을 반 넘게 가득 부어주었다.

 

“너 커피 잘 못 마시잖아. 연하게 마셔. 괜히 억지로 쓰게 먹지 말고. 좋은 커피는 이렇게 마셔도 향기, 맛, 다 그대로야.”

“오오, 프로패셔널?”

“놀리지 말고.”

 

말을 놓고 나니 확실히 더 벽이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거기다 확실히 둘이 서로에게 잘 맞는 타입 같기도 했다. 같이 지낸 지 겨우 한달 남짓이었지만 영빈과 재윤은 서로의 생활 패턴이며 취향들을 꽤 꼼꼼하게 기억하고 맞춰주는 편이었다. 우리 꼭 알고 지낸 지 엄청 오래된 사이 같다. 방금처럼 가끔 익숙한 듯이 말하지도 않은 서로의 취향을 고려해 줄 때면 영빈은 특유의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재윤을 바라보는데 재윤은 요새 영빈의 그 표정을 보는 게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내가 형한테 말 한 적 있어? 나 커피 잘 못 마신다고? 그렇게 물으면 영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아니, 하고 답했다.

 

“그냥 알아. 싫어하는 건 아닌데 잘 못 마시는 커피가 있는 건. 근데 그냥 취향인거지 내가 주는 커피는 잘 마시잖아.”

 

“형이 주는 건 신기하게 안 거북해. 원래 커피 마시고 나면 좀, 속이 거북하다고 그러나?”

 

“카페인 잘 안 맞는거 같더라고 너. 그래서 디 카페인으로 내린 거야. 샷 추가도 별로 안 좋아하고 달달한 커피 더 좋아하잖아. 산미가 있는 커피는 싫어하고 그래서 신맛보단 고소한 맛을 더 좋아하고.”


영빈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딱히 제 커피 취향을 정리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재윤이 사르르 웃었다. 관찰당하는 느낌이네. 그렇게 답하자 영빈도 따라 웃었다. 영빈이 웃을 때 입술의 안쪽으로 크게 벌어지는 입 동굴과 톡 튀어나오는 앞니 두 개가 유독 눈에 띄었다. 아, 저 표정. 영빈이 기분 좋을 때 나오는 표정이라는 걸 알아 챈 재윤이 조금 더 활짝 웃자 뺨에 쏙 들어간 보조개가 시원한 입술선을 따라 드러났다.

 

“커피 내릴 때 제일 중요한 게 뭐야?”

 

“제일? 나는 솔직히 전부 비중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물어보면 답을 해 줄 수가 없는데. 물 온도도 중요하고 몇 번 내리는지도 중요하고, 커피콩마다 맛도 다르고 레스팅 시간이나 방법도 중요하고.”

 

“멋있다.”

 

“비행기 태우지 말지? 나도 아직 공부하는 중이거든?”

 

“거짓말 아니고 진짜. 나 이런 핸드드립 커피 만드는 카페에서 빵 만드는 게 소원이었거든. 요새는 핸드드립 하는 데가 많이 없잖아. 다 기계로 하지.”

 

그렇긴, 하지. 답지 않게 눈을 초롱초롱 빛낸 재윤이 사탕을 보는 어린애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영빈을 바라보자 영빈은 또 뜨끈해지는 얼굴을 애써 외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제과제빵 하면서 그렇게 공부하잖아. 나도 빵 만드는 사람들 신기해. 아, 그, 빵 만드는 사람들은 손이 따뜻한 편이라며. 너도 그래? 왠지 쑥스러운 느낌에 말을 돌리려는 영빈이 그대로 티가 나는 바람에 재윤이 눈꼬리를 휘며 크게 웃었다. 형 지금 쑥스럽나? 툭 튀어나온 사투리에 얼굴이 새 빨개졌던 영빈이 그만 놀리라며 엄한 표정을 짓다가 여전히 크게 웃고 있는 재윤의 뺨을 별안간 검지로 콕 찔렀다. 응? 갑작스러운 터치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재윤에 이번엔 영빈이 새삼 평온한 표정으로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아니이, 너 여기이, 이거 보조개. 너무 예쁘다. 전부터 되게 신기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쏙 들어가지?”

 

콕 찌르는 걸로 모자라 그대로 멈춰버린 재윤의 뺨 언저리를 검지 끝으로 살살 문지르는 영빈에 재윤이 목석처럼 굳어 눈을 깜짝였다. 형, 뭐하는데? 더듬더듬 느리게 묻자 영빈이 예뻐서. 하고 답했다.

 

지금 예쁜게 누군데.

 

문득 떠오르는 말을 필사적으로 목 뒤로 삼킨 재윤이 대신 고르고 골라 다른 말을 뱉어내며 영빈의 손가락을 잡아 살짝 밀었다.

 

“귀여워.”

“뭐?”

 

“형은 엄청 귀여워.”

 

좀 더 천천히 생각해 보고 말할 걸. 재윤은 뒤늦게 후회했다. 예쁘다, 귀엽다 같은 말이. 그게 다 큰 성인 남성한테 쓰기에 적절한 말인가? 싶어서 얼굴이 자꾸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탓이었다. 벙찐 얼굴의 영빈에게 우리 이제 그만 카페 나가야 하지 않아? 하고 버벅버벅 버퍼링이 걸린 사람처럼 어색하게 자리를 뜬 재윤이 떠난 자리엔 반도 마시지 못한 커피잔이 덩그라니 남아 있었다.

 

***

 

 

“오늘까지 매장 가서 내부공사 마무리 하면 끝인가?”

“이제 홀이랑 인테리어 좀 보고, 간판 디자인도 골라야 하고.”

 

이른 기상 탓에 여유로운 아침 시간을 만끽한 두 사람이 함께 카페에 갈 준비를 하며 오늘 끝내야 할 리스트들을 꼼꼼하게 정리했다. 신발을 신는 영빈의 뒤에서 핸드폰에 영빈이 줄줄 말하는 스케줄들을 꼼꼼하게 받아적던 재윤이 어느새 신발을 다 신고 현관 앞에 서서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영빈에게 고개를 갸웃했다. 왜? 입모양으로 묻자 영빈이 신기해서. 하고 답했다.

 

“뭐가?”

“진짜로, 전부터 생각하긴 했는데. 겨우 한 달쯤인 시간인데, 재윤이 네가 너무 익숙해서.”

“칭찬이지?”

 

“나 좀 까탈스럽다는 소리 많이 듣거든. 성격이 좀 그래서. 이건 여기, 저건 저기. 물건들 정해진 위치도 꼭 맞춰야 하고 물건들이 놓여있는 모양도 맞춰야 하고. 김인성은 우리 집에서 지내다가 3일만에 내 잔소리에 노이로제 걸린다고 뛰쳐나갔어. 차라리 호텔이 났다고.”

 

“그정도는 아닌데...”

 

“아침형인것도 그렇고 네 할 일, 내 할 일 칼 같이 나누는 것도 그렇고. 너무 피곤한가 싶다가... 너는 왜 아무렇지 않은가 싶기도 하고.”

 

영빈은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달싹이며 머뭇거렸다. 돌려 말하는 방법을 모르는 영빈이라 늘 속사포처럼 다다다 말을 꺼내면 곱씹어 생각하고 천천히 느리게 하나씩 답하는 건 재윤이었는데 오늘은 어쩐지 재윤의 말투가 옮은 것처럼 느릿느릿하게 고민을 하던 영빈이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고 재윤의 향해 몸을 돌리채로 한참이나 말을 망설였다.

 

“그냥, 고맙다는 말이 하고 싶기도 하고.”

 

“새삼스럽게? 형 그렇게 까탈스럽지 않아. 나는 괜찮은데. 형이 그랬잖아, 우리 꼭 오래 알았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익숙하다고. 그게 일방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라고 생각했어?”

“아 뭐, 재윤이 네가 날 잘 맞춰주니까?”

 

“형, 나 그렇게 착한 사람 아닌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아침부터 우물쭈물 까다로운 저를 맞춰줘서 고맙다느니 하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재윤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까다롭고 까탈스럽다니 대체 누가? 어이가 없다는 듯 긴 숨을 코로 뱉은 재윤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마저 신발을 신은 채 성큼성큼 영빈의 앞으로 다가갔다.

 

“무조건적으로 타인한테 맞추라고 하면 나도 못해. 갈데 없는 내 편의 봐줘서 형이 여기 있으라고 해줬으니까 내가 뭐 형 눈치를 보고 있다면 모르겠는데, 나 그렇게 착한 사람은 아니라서 남 눈치 보는 거 잘못하거든. 근데 그냥, 그냥. 형은 배려해주고 싶어져. 형이 나를 먼저 배려해주고 있는 게 느껴져서 그런 걸 수도 있고.”

“...”

“말하다 보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아무튼. 형은 전혀 어렵거나 까다롭지 않다고, 적어도 나한테는. 그냥 우리가 잘 맞나보지.”

 

왜 그런걸로 걱정해? 갑자기? 무슨 일 있어? 걱정스럽다는 듯 영빈을 가까이에서 내려다보는 재윤의 눈빛이 퍽 다정해서 영빈은 입술을 꼭 다물고 있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냥, 김인성이 이상한 말 한 게 갑자기 생각나서. 무슨 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얼른 카페나 가자. 우리 오늘 바쁘잖아.

 

 

‘너 헤테로 아니야?’

‘헤테로가 뭐야?’

‘일반 아니냐고.’

‘사람이 다 일반이지 이반도 있어?’

 

왜 갑자기.

 

‘게이를 이반이라고 불러. 근데 너 재윤이한테 하는 거 보면 그렇게 보여.’

 

그 쓸데 없는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건지. 도대체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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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림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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