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되는 사이

그래도 되는 사이 02

너는 내게 빠져든다.

원래부터 아들은 아빠랑 친하다지만 영빈은 어렸을 때부터 아빠 껌딱지 별명을 달고 살았다. 아빠 하는 건 전부 따라 하고 싶어서 뒤를 졸졸 따르며 밥도 아빠 무릎 위에서 게임도 아빠 옆에서 숙제도 아빠 서재에서 아빠랑 같이. 그렇게 자랐다. 별까지 달고 있는 장군 아버지는 여느 취준생들 자소설에 자주 등장하시는 것처럼 무뚝뚝하지만 자상하신 분이셨고, 원리원칙을 중요시 하시지만 그보다 더 가정의 행복을 소중히 하시는 분이었다. 집안 어른들 모두가 육사에 지원하지 않겠다고 반기를 영빈에게 불호령을 내릴 동안 혼자 꿋꿋하게 우리 막내아들 하고 싶은 거 다 해! 하고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신분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린 영빈은 누가 꿈이 뭐냐고 물으면 아빠 같은 아빠, 라고 답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아빠는 그냥 되는 거지. 어른이 되면 당연히 되는 거야, 그거 말고는 꿈이 없어? 하고 영빈을 품 안 가득 안고 어화둥둥 우리 막내 하셨다. 보수적인 집안 어르신들이 부득불 우겨 형에 누나까지 전부 육군사관학교를 보내고 영빈이 고3 시절을 다 보내도록 하고 싶은 일이 딱히 없다며 갈피를 못 잡을 동안도 아버지는 그저 한마디 없이 웃어 주셨다.

 

그런 아버지가 문득 떠오르는 아침이었다.

 

 



그래도 되는 사이 02

재윤 x 영빈

W. 갈피


 

 

“벌써 일어났나?”

“으응, 너도 일찍 일어났네.”

혼자에 익숙해지면 누군가 제 사적인 공간에 들어 온다는 게 그렇게나 불편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20년 넘게 함께 산 가족도 가족만큼이나 오랜시간을 함께 보낸 소꿉친구 인성도 저만의 공간을 만들고 나서는 선뜻 함께 지내기가 망설여질 정도로 영빈은 제가 개인주의 적인 성향이 강한 편이라고 생각해왔다.

 

넌 헤테로 아니야?

 

김인성이 그렇게 물었고 김영빈은 지금껏 '일반'으로 살아왔던 제 과거를 돌이켰다. 여자친구도 꾸준히 있었고 첫경험도 당연히 여자와 했다. 남자를 보고 떨린 적은 결단코 없었으니 인성의 말에 그렇다고 대답해야 했으나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던 건 지금의 김영빈에게는 아니라고 대답할 근거가 아주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재윤이 문제야.

 

"이거 함 무 볼래?"

 

하얗고 가지런한 이가 반짝반짝 빛났다. 처음 만났을 땐 서울말을 쓰겠다고 안간힘을 쓰더니 어느 정도 친해지고 나자 재윤은 말투부터 편해졌다. 누구보다 도시적인 얼굴로 누구보다 토속적인 사투리를 뱉은 재윤이 아침 인사를 대신해 영빈에게 빵 냄새로 인사했다. 아침부터 달콤한 냄새가 퐁퐁 퍼진다 했더니 영빈만큼이나 부지런한 재윤이 벌써 한바탕 주방을 사용한 흔적이 역력했다. 노르스름하게 잘 구워진 마들렌을 영빈의 입 앞에 대령한 재윤이 아- 하고 말하자 영빈은 뭐에 홀린 듯 입을 벌리고 재윤을 따라 아- 하고 말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쏙 들어온 포근한 마들렌은 표면은 단단했으나 잇새로 부드럽게 씹혔다. 반응을 기대하며 반짝이는 재윤의 눈동자가 뚫어져라 영빈의 입술만 쫓았다. 덕분에 영빈은 아침부터 머리 위로 스팀이 오르는 주전자 간접 경험을 하며 애써 열을 삭히는 중이었다. 맛있어. 진짜? 근데 표정이 쫌 아닌데? 진짜 맛있어, 아직 졸려서 그래.

 

인식하고 나니 더 뚜렷하게 감정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넌 헤테로 아니야?’ 맞아, 나 헤테로야. 불과 2달 전만 해도 영빈은 머뭇거림 없이 0.1초 만에 그렇게 답했을 거였다. 그러나 지금은 답할 수 없다. ‘아니, 나 게인데?’라고 말하기엔 아직 재윤을 향한 감정에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정의를 내리지 못한 게 아니라 하지 않고 있는 거였다.

 

남자는 어른이 되면 모두 아빠가 돼.

 

영빈의 아버지는 말했다. 그래서 김영빈은 어릴 적 장래희망이던 아빠 같은 아빠, 라는 꿈을 접고 바리스타라는 새로운 꿈을 얻었다. 남자는 자라서 여자를 만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당연히 아빠가 될 테니까. 그 믿음에 추호도 흔들림 없는 25년을 살아왔다. 물론 가장 가까이에 게이도 있었다. 그게 김인성인 것도 어쩌면 영빈이 본인보다 먼저 알아챈 것 같았다. 영빈은 제 가치관을 누군가에게 강요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너는 그렇게 살아, 나는 나대로 살면 돼. 김인성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제게 주는 피해가 일절 없었으므로 그건 개인의 선택 문제였다. 그러나 영빈은 저 자신까지 그렇다는 건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흔들리는 성 정체성에 대한 대처로 조금은 안일하게 외면을 선택했다.

 

그런데 지금 이재윤이 오함마를 가져와 편견부터 부시는 중이었다. 그것도 너무 예쁘게 웃으면서.

 

카페의 내부공사가 마무리되고 어제 재윤과 인테리어 시안을 정하느라 새벽까지 투닥거리며 회의를 했더니 오랜만에 늦잠을 잔 영빈은 좀, 비몽사몽 정신이 없었다. 뭐를 무가 어쨌다고? 이미 재윤이 제 입안에 넣어 준 마들렌을 씹으면서도 엉망진창으로 대꾸를 해주는 영빈에 재윤이 허허허 동네 한량처럼 웃었다. 퉁퉁 부은 눈을 손으로 벅벅 비비며 붕붕 뜬 까치집 머리를 하고 나온 영빈이 비틀비틀 주방 식탁 의자에 앉아 녹아 내리듯 엎드리자 낮은 웃음소리를 낸 재윤이 커다란 손으로 영빈의 번개 맞은 머리칼을 꾹꾹 쓰다듬어 정리했다. 무거운 손으로 눌러봤자 금방 다시 붕붕 떠오르는 깃털 같은 머리칼은 색깔도 꼭 연하게 흩어진 안개 같았다. 무게감이 더해진 손에 끌려 고개가 휘청휘청 휘둘리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면 여전히 눈가를 만지작 거리는 영빈의 손을 재윤이 제 손으로 감싸 잡았다.

 

"손으로 비비면 눈 망가진다. 가서 세수를 해라 차라리.“

 

재윤의 손길에 부끄러워진 영빈이 애써 감정을 누르며 아잇 귀찮아아... 한탄 같은 푸념을 늘어 놓고는 재윤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엎드렸다. 재윤이 입에 물려준 마들렌을 우물우물 씹으면서 다시 눈을 감고 식탁 위에 뺨을 댄 영빈이 재윤의 따뜻한 손을 습관처럼 만지작거리다가 진짜 손 따뜻하구나. 하고 말했다. 방금 이불속에서 나온 영빈의 손도 따끈한 편이지만 재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단단한 손끝이 촉촉하고 습했다. 재윤의 손가락을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열심히 조물거리던 영빈이 한참이나 후에야 제가 뭘 조물거리고 있는지 인식한 듯 번쩍 얼굴을 들어 올리며 재윤을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그 와중에도 재윤은 남은 한 손으로 제 턱을 받치고 영빈을 향해 고개를 기울여 이제 다 만졌나? 하고 물었다.

 

”내 손이 그래 따뜻하나?“

 

어버버하며 입을 벌린 영빈의 턱을 손가락으로 톡 쳐올린 재윤이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서 주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뭐야, 말렸어. 말려버렸어. 영빈은 적색경보가 울리는 머리통을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심지어 오늘은 오랜만에 찾아온 휴일이었다.

 

***

 

"형은 인성이 형이랑 무슨 사이야?"

"친구."

 

영빈은 0.1초만에 답했다. 재윤과 함께 보고 있는 영화는 양조위, 장국영 주연의 퀴어 영화 해피투게더였다. 오랜만에 맞이한 휴일 오후에 재윤이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면서 결제한 영화였다. 무슨 영화인지도 모르고 소파에 늘어져 재윤이 손에 쥐여준 편의점 팝콘을 아그작 거리고 있다가 장국영과 양조위가 입을 맞추는 장면이 나오는 바람에 팝콘이 전부 올라 올 뻔 한 걸 되새김질해 삼켰다.

 

그런데 하필 이런 영화를 보고 있는 이 타이밍에 재윤의 그런 질문은 영빈을 헷갈리게 했다. 너는 왜 나한테 그런 질문을 해? 그게 왜 궁금한데?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였지만 영빈은 재윤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재윤이 영빈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너무 적나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 침묵 사이로 마주치는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브라운관 속에 들어갈 듯 시선을 고정했는데 하필 키스신에서 넘어간 양조위와 장국영의 러브신이 진했다. 무삭제판이라고 했던 재윤의 설명이 뒤늦게 떠올랐다. 공포영화인줄 알았지, 나는.

 

인성은 영빈이 재윤을 좋아하는 티가 난다고 했다. 나만? 나 혼자 재윤이를 좋아하는 것 같아? 인성에겐 그걸 묻고 싶었다. 김영빈은 요즘 내적 물음표 살인마였다. 궁금한 건 많은데 물을 수가 없었다. 정확하게는 모험을 할 자신이 없었다. 25년간 헤테로의 길을 아주 잘 갈고 닦아온 덕분이었다. 남자도 남자를 사랑할 수 있다는 건 인성을 보고 애저녁에 깨우쳤다. 그러나 그게 내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영빈은 본인이 아주 보통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흔한 퀴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좋아하고 보니 남자도 아니었다. 재윤을 보면서 어딘가 욱신거렸던 때는 이미 남자인 걸 깨닫고 난 뒤였다. 그래서 영빈은 더 철저하게 이 감정을 외면 중이었다. 인성의 말처럼 영빈이 혼자 재윤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면 혼자 정리하면 될 일 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점차 거리를 두자고 생각했지만 웬일인지 그것도 쉽지 않았다. 재윤이 자꾸 여지를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착각’만큼 달콤한 유혹은 없었다.

 

한참을 영빈의 옆얼굴만 바라보던 재윤이 영빈이 품에 안고 있던 쿠션을 끄트머리를 잡고 쭉 당겼다. 엇- 짧은 탄식과 함께 쿠션을 안고 있던 영빈의 몸이 딸려 가다가 재윤의 가슴팍에 이마를 박을 뻔해서 억지로 몸에 힘을 주고 참았다.

 

"형, 내 잠 온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영빈이 답하기도 전에 밑으로 쑥 꺼진 재윤의 얼굴이 영빈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하도 순식간의 일이라 거절도 못 한 영빈이 왜 나는 오늘 반바지를 입었을까, 하고 속으로 후회했다. 여름에 집에서 긴바지를 입고 다닐 수는 없잖아. 억울한 마음에 뭐라고 말을 보태려다 제 맨 허벅지에 내려앉은 재윤의 머리가 뜨끈해서 그냥 말을 거뒀다. 쿠션을 안고 있던 영빈의 두 팔이 허공에서 딱 멈춘 채 로봇처럼 굳어 있자 눈을 감은 줄 알았던 재윤의 손이 불쑥 올라와 영빈의 한쪽 손에 깍지를 껴 내렸다.

 

"심심하면 내 머리 좀 만져 도. 그럼 잠 잘 오더라."

 

파르르 떨리는 손끝을 재윤이 몰라주길 바라면서 영빈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외국에서 살다 오면 스킨쉽이 많겠지? 거긴 남자끼리도 양 뺨에 쪽쪽 거리면서 입을 맞추는 게 인사인 곳인데 어련할까. 영빈은 재윤에게 잡히고 남은 손으로 살살 재윤의 머리칼을 만졌다. 커튼을 쳐 놓은 베란다 창문 너머로 노을이 넘어갈 무렵엔 두 사람 다 1분도 집중하지 못했던 영화가 끝이 나 있었다.

 

 

 

모처럼 만의 휴일은 온종일 기가 빨리는 느낌이었다. 그날 이후로 휴일이 오면 영빈은 약속을 핑계로 집 밖을 나가 하릴없이 거리를 전전하다 저녁 늦게나 들어오고는 했다. 원래 개인의 시간이 중요한 편이라 쉬는 날이 있어도 집에서 혼자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던 집돌이였는데 재윤마저 워낙 저와 성향이 비슷한 집돌이인 탓에 둘만 있는 시간을 피하려면 억지로 집 밖을 나와야 했다. 그러나 영빈이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재윤은 시도 때도 없이 불쑥 거리를 좁혀 영빈에게 말간 얼굴로 웃어 보였다. 같은 집에서 같이 밥먹고 같이 자고 취미도 비슷한 데다 직장까지 같은데,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구조라 더 곤욕이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더니 재윤이 없는 일상이 어땠는지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을만큼 함께가 익숙해졌다. 맛도 모르고 먹었던 마들렌은 영빈이 잘 먹는다는 이유로 재윤이 아침마다 구워 커피와 함께 먹을 수 있게 식탁 위에 놓아두었고 집을 구해 나간다던 재윤의 계획은 점차 모호해져 어느 순간 영빈의 물건으로 가득하던 집안에 하나, 둘 재윤의 물건들이 원래 거기 있던 것처럼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커피 향으로 가득하던 집안은 빵 냄새가 섞여들었고 기다란 카페의 바 같던 아일랜드 식탁 안쪽엔 쓰지 않던 빌트인 오븐이 늘 예열 중이었다.

 

어느 날 아침 반짝 눈을 떠 보통 날과 같이 하루를 시작하던 영빈은 먼저 현관을 나서 문고리를 쥐고 서서 저를 기다리는 재윤의 뒷모습을 보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김영빈은 이재윤을 좋아해.

 

라고. 돌고 돌아도 제자리걸음이었다. 처음부터 재윤에게 호감이 있었다는 사실을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호감이 도를 지나쳐 짝사랑이 되기까지 그 일련의 과정과 모든 감정을 부정하며 얻어냈던 불면증, 조울증, 무기력증과 홍조를 동반한 갖가지 증상들은 모두 그 문장 하나로 종결지어졌다. ‘김영빈은 이재윤을 좋아한다.’ 그 마법 같은 문장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영빈의 머릿속에 있던 모든 물음표를 없앴다. 그 후엔 그냥 울고 싶어졌다. 끝끝내 멀쩡한 헤테로 남성을 방금 게이로 만든 이재윤이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또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예쁜 얼굴로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늦은 오후, 카페 출근 길에 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

 

“재윤아.”

“응?”

 

“내가 널 좋아하는 것 같아?”

 

“...어?”

 

손해배상도 청구 할 수 없는 억울함은 고스란히 영빈에게 쌓여 쓰나미처럼 순식간에 몰려왔다. 지금은 타이밍이 아니야, 김영빈 입 다물어! 머리가 아무리 외쳐봤다 까맣게 타 들어간 속은 이미 입을 열었다. 지금 뭐라고 했는데? 재윤이 정말 못들었다는 듯이 미간을 잔득 찌푸리고 영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혼자서 끙끙 속을 끓이며 짝사랑을 담아두는 건 영빈의 타입이 아니었다. 불과 며칠전만해도 혼자 접을 수 있는 감정이라고 이른 속단을 내리며 재윤을 향한 시선을 돌리려고 애썼지만 자꾸만 제 시야에 들어온 건 재윤이었다. 도대체 너는 무슨 생각일까, 남들이 보기엔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데 왜 나는...

 

우리가 쌍방인 것 같을까?

 

초여름은 오후가 되자 더위가 한풀 꺾여 선들한 바람이 불어왔다. 생각 없이 반팔을 입고 나와 서늘한 팔뚝을 쓸어내리는데 재윤이 형 그럴 줄 알았다며 영빈의 어깨 위로 영빈이 자주 입고 다니던 카디건을 걸쳐주었다. 뭐야? 이건 언제 챙겼어? 토끼눈을 뜨고 묻는 영빈에 재윤이 씨익 웃으며 그냥 필요할 것 같아서 챙겼지? 했다. 순간순간 이렇게 재윤의 마음이 저와 같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미지근하던 가슴께가 자꾸만 열을 받아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들 이렇게 직설적으로 아무 계획도 없이 내지를 생각은 없었다. 그냥 날이 너무 좋아서, 이재윤이 너무 예뻐서. 이 순간이라면 너도 okay, 라고 말해 줄 것 같아서.

 

내가 지금 뭐라고 했는데? 영빈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막 지르는구나 영빈아. 제발 생각 좀 하고 말하자. 되돌리기엔 이미 목소리가 입을 떠난 뒤였다.

 

“어 음, 그러니까 내 말은...”

“...”

 

“나는, 네가 날 좋아하는 것 같아.”

 

입을 연 김에 고백도 하고 고백한 김에 너도 날 받아주면 좋겠다. 김영빈의 생활신조 중 하나는 ‘멈출 수 없을 땐 직진하라.’였다. 말하고 보니 이 얼마나 근자감 넘치는 말인가 싶어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재윤은 자리에 우뚝 선 채 여전히 영빈을 향해 고개를 조금 숙인 모양새였다.

 

잔뜩 수줍은 영빈에 반면,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재윤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널 좋아해, 도 아니고 넌 날 좋아해? 하는 의문문도 아니었다. 영빈은 재윤이 저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재윤의 입장에선 질문도 참 저같이 깜찍하게 한다 싶었다. 고백도 아니고 고백을 하라는 말도 아니고 그냥 내 생각이 이런데 너는 어떠니? 하고 묻는 그 의중이 너무 투명해서. 그래서 기억에 남는 대답을 해주고 싶었다. 재윤이 대답을 고르는 사이 영빈은 마음이 급해 재윤의 소매자락을 잡고 살살 흔들었다. 위로 형, 누나가 있다더니 딴엔 저보다 형이라고 재윤에겐 별로 보여준 적도 없었던 막내미를 자랑하며 참 귀엽게도 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 나 지금 심장 터지겠는데.”

 

귀엽다. 재윤의 머릿속엔 지금 ‘김영빈 귀여워’ 밖에는 생각 나는 게 없었다. 애초에 재윤이 계획에도 없던 한국 땅을 밟고 있는 이유가 사실은 인성이 보내준 영빈의 사진 한 장 때문이란 걸, 김영빈은 알까 싶었다.

 

“형, 그건 고백이에요? 아니면 나한테 고백을 하라는 말이에요?”

“어?”

 

“형 저는, 여자 좋아해요.”

 

재윤은 대답을 고르고 골랐다. 평소와 다르게 존댓말로 시작한 말은 서론부터 길어지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제 말을 오해할까 싶어 빨리 결론부터 꺼내고 싶었지만 최대한 제 진심을 전부 전하고 싶어 말을 고르고 고르다 보니 말 사이 간격은 점점 느려졌다. 아직 시작도 못 한 대답에 어? 어 그래. 하고 영빈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오자 재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한들 영빈은 이미 잡고 있던 재윤의 소매를 놓아버리고 저만치 뒤돌아 걷는 중이었다. 어어... 멍청하게 벌어진 입으로 갈무리 되지 못한 탄식이 터져 나오자 재윤은 잰걸음을 걸러 부지런히 영빈의 뒤를 쫓았다.

 

동그란 영빈의 뒷통수에 햇빛이 반사되어 밝은 머리칼 끝이 반짝거렸다.

 

울어요? 하고 물으면 영빈이 좁은 보폭으로 종종 빠르게 걷던 걸음을 멈춰서며 재윤을 향해 다시 휙 뒤를 돌았다. 바들바들 떨리던 빨간 얼굴이 순식간에 눈물로 뒤덮여 턱 끝을 부들부들 떨더니 주먹을 꾹 쥐고 두어걸음 재윤에게서 멀어졌다. 물론 소용없었다. 영빈이 멀어진 만큼 재윤이 두어걸음 더 성큼성큼 다가섰으니까, 외려 전보다 더 가까워진탓에 재윤을 올려다보는 영빈의 고개를 조금 들렸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귀엽다고 말하는 건 반칙이야!”

“형.”

“왜 새벽에 멜로 영화를 보자고 해! 영화 보면서 무릎을 왜 베고 자는데! 저번에 맥주 마실 땐 술 취해서 나한테 기대 잤었지!! 너 그거 다 끼 부리는 거야! 네가 나 꼬신 거라고!”

 

한 번 눈물이 터진 영빈이 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울분을 토하듯 억울함을 한 보따리나 풀어놓았다. 속쌍꺼풀이 진한 눈가가 붉게 부풀어 눈물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아니, 나는, 이게 거절 한 게 아니라... 재윤은 두 손을 허둥거리며 영빈의 눈물을 닦아주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했다. 형, 형 울지 말아요. 내가 잘못했어. 응? 아, 어떡해. 울릴 생각은 없었는데. 세상 서럽게 울어버리는 영빈에 재윤이 결국 영빈을 끌어당겨 품에 꼭 안았다. 마르고 단단한 몸이 맞춘 듯이 재윤의 품에 들어차 허리를 폭싹 끌어안았다. 울면서도 놓치기 싫다는 듯 재윤의 셔츠자락을 꼬깃꼬깃 주먹으로 야무지게 말아쥔 영빈의 어깨가 우느라 지쳐 덜덜 떨려왔다. 서툰 손으로 영빈의 등허리를 토닥이는 재윤의 손이 여전히 따뜻해서 더 울음이 터지는 줄도 모르고.

 

“왜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가. 나 말 느린 거 알면서.”

 

나 여자 좋아해. 한 번도 남자 좋아해 본 적 없어. 근데 형은 좋아요. 나 형 꼬신 거 맞아. 수작 부렸어요, 내가.

 

달래려고 한 말에 영빈이 더 울어버린 건 말할 것도 없었다. 형 우리 오늘 출근은 못 하겠네요. 집에 가요, 그냥. 출근하던 길을 유턴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재윤은 영빈이 귀여워서 웃고, 영빈은 재윤이 따뜻해서 울었다. 놓칠세라 재윤의 셔츠 소매자락을 다시 꼭 움켜쥔 영빈의 손을 풀어 제 손으로 덮은 재윤이 깍지를 껴 살랑살랑 발걸음에 맞춰 흔들자 영빈은 퉁퉁 부은 얼굴을 재윤의 팔뚝에 통통 박으며 잔뜩 울상을 하고 재윤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아 귀여워. 흘리듯 뱉은 재윤의 말에 영빈의 귓바퀴가 터질 듯이 빨개진 것도 노을때문이라고 우기면서.

 

나한테 넘어 온 거 맞지? 우리 그럼 연애 하자 영빈아.

 

그 한 마디를 너무 간절하게 기다렸다고, 조금 투덜거리면서.

 

***

 

찬바람이 부는 늦은 오후부터 저녁까지 펑펑 울며 진을 뺀 영빈을 소파에 앉혀두고 미지근한 물 한잔을 머그에 가득채워 가져온 재윤이 손을 뻗는 영빈을 저지하며 어린아이 물 먹이듯 입가에 컵을 가져다대자 영빈이 입술을 삐죽였다. 울릴 땐 언제고 채찍과 당근을 참 적절하게 쓰시네요. 삐죽 내려간 영빈의 입꼬리가 삐친 얼굴을 하는 이모티콘 같아 재윤이 조금 웃었다.

 

재윤이 달래는 손길에 축쳐진 영빈이 소파에 모로 누워 팔로 눈을 가리자 잠깐 기다리라며 재윤이 분주하게 바르작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너 지금 뭐해? 하고 물으면 짐 옮겨, 하고 태연하게 대답한 재윤은 정말로 게스트룸에 있던 제 짐들을 전부 영빈의 방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무슨 짐? 짐을 왜 옮겨? 벌떡 일어나 앉은 영빈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재윤을 눈을 쫓자 씨익 웃으며 다가온 재윤이 그럼 우리 아직도 각방 쓰는 사이야? 하고 능글맞게 눈을 찡긋거렸다.

 

“형 눈, 코, 입이 다 빨갛다.”

“너 성격 엄청 나빠 보여 지금.”

“우는 거 보고 마음이 아프긴 했는데, 지금은 또 예쁘네.”

 

원래 이렇게 조금 제멋대로였나? 낯선 재윤에 고개를 갸우뚱한 영빈의 눈위에 차가운 물에 적셔온 수건을 덧댄 재윤이 이러면 좀 시원해? 하면서 영빈의 얼굴을 잡아 제 무릎위에 눕히고 살랑살랑 손부채질을 더했다. 영빈은 똑 부러지는 듯 허술했고 재윤은 대충인 듯 섬세했다. 눈을 가만히 감은 영빈이 사람 손을 타는 얌전한 고양이 같아서 재윤이 살살 눈가를 수건으로 닦아주며 작은 웃음소리를 흘리자 영빈은 그 소리에 또 입술을 뚱하게 내밀고 투덜 거렸다. 나 일부러 울린 거지? 너 엄청 선수 같아. 프랑스 제비.

 

“처음 만나서 뺨 맞댈 때부터 알아봤어, 내가.”

“아, 그건 진짜 인사다. 파리에서는 다 그렇게 인사했거든?”

 

그걸 비쥬라고 하는 거예요, 바리스타님. 영빈의 뺨을 콕 찌르며 억울하다는 듯 눈썹을 눕힌 재윤이 안그래도 순하게 휘어진 눈가를 밑으로 축 늘어뜨리며 한껏 억울한 얼굴을 해 보였다. 진짜 못 이기겠다. 불쌍한 척 그만해, 그렇다고 쳐 줄게. 그 표정에 못이겨 영빈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재윤은 보란듯이 표정을 바꾸고 다시 빙긋 웃었다. 와 태세전환 무엇, 영빈이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을 열어 어이없다는 듯 파닥거리자 영빈의 손을 잡아 제 양 뺨을 톡톡 부딪힌 재윤이 입으로 쪽쪽 소리를 내며 이게 비쥬라고 하는거 예요. 하면서 한 번더 영빈을 놀려댔다.

 

아, 행님아 근데 그거 아나? 프랑스에는 인사가 하나 더 있거든? 우리는 앞으로 그걸로만 인사하자.

 

“뭔데?”

 

호기심을 참지 못한 영빈이 자이리톨 같은 앞니를 벌어진 입술사이로 자랑하며 멍한 얼굴로 묻자 재윤은 말도 없이 천천히 영빈이 제 시선을 따라 올 수 있도록 아주 느리게 시선을 옮겼다. 마주 보고 있는 눈에서 영빈의 입술로. 느리고 끈적하게 떨어지는 시선의 높이가 제 입술에 와 닿는 걸 선명하게 느낀 영빈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합 다물었다. 뭔데 그 눈은, 영빈은 무릎 위에 저를 눕혀놓고 상냥하게 웃는 재윤의 얼굴에서 시선을 애먼대로 돌리며 눈을 굴렸다.

 

“눈이 삼초 이상 마주쳤는데 상대가 피하지 않으면 프랑스에선 그걸 키스해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거든.”

“...”

 

그 말과 함께 영빈의 눈앞에서 엄지와 검지를 부딪쳐 딱-! 마찰음을 낸 재윤 덕에 영빈이 눈을 깜짝이며 저도 모르게 재윤의 손끝에서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관자놀이 옆에 깜찍하게 딱 붙인 재윤의 떡볶이 같은 손가락 세 개가 차례대로 하나씩 접히는 걸 생각 없이 바라보던 영빈이 그게 3초를 세는 카운트였다는 걸 깨달은 후엔 이미 재윤의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온 다음이었다.

 

“영빈아. 우리 인사는 앞으로 프렌치 키스로 하는 거야.”

 

친절한 설명만큼 부딪히는 입술이 부드러웠다. 뺨 언저리와 목덜미를 한 번에 감싸는 커다란 손에 재윤에게 그대로 끌려 올라온 영빈의 얼굴 위로 재윤의 얼굴이 겹쳤다. 재윤의 도톰한 입술이 영빈의 얇은 입술을 그대로 삼키듯이 덮으면 영빈은 저도 모르게 재윤의 티셔츠 자락을 꽉 움켜쥐고 눈을 감았다. 쪽쪽, 소리만 내던 비쥬와는 비교도 안 되게 진한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근데 재윤아 프렌치 키스가 원래 이렇게 딥하게 하는 건가?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나한테 집중해 영빈아, 착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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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림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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