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린당] 흑백도시 상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린당

※폭력, 범죄 관련 에피소드가 전개되므로 해당 소재에 취약하신 분들께서는 주의 부탁드립니다.

 

 

아버지는 도박쟁이였다. 엄마만 보면 돈을 달라고 패악질을 부리는데 그럴 때는 꼭 만취 상태였다. 술에 취한 성인 남자는 초인적으로 힘이 셌다. 어린 상혁은 괜히 대들다 맞기 싫어서 잔뜩 웅크려 자는 척을 하며 엄마가 맞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자랐다. 엄마의 존재로 인해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열 몇 해는 사실 엄마의 희생으로 인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던 살얼음판 같았다. 상혁이 중학교에 입학해 교복을 입게 되던 날부터는 상혁도 함께 맞았다. 그때부터는 간혹, 엄마가 먼저 상혁의 희생을 바랐다. 폭력은 약자를 마음부터 병들게 했다. 모자는 감히 서로를 감쌀 생각도 못 하고 그저 내가 덜 맞기를 바라며 아버지가 손에 무엇이든 들기 시작하면 각자 방구석에서 가장 먼 모서리에 따로 머리를 박고 몸을 웅크렸다. 오늘은 내가 아니길, 간절하게 빌면서.

 

상혁이 18살 되던 해 봄, 엄마는 집을 나갔다. 상혁은 엄마가 꽤 오래 버텼다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슬프지는 않았다. 살림이 팍팍하고 가난이라는 폭력에 오랫동안 약자였던 그녀는 아들인 상혁에게도 그리 따뜻한 어머니는 아니었다. 아버지의 손보다는 덜 매웠지만, 그녀는 아버지가 없으면 그녀가 맞았던 만큼 상혁을 때렸다. 상혁은 아버지가 때릴 때도 어머니가 때릴 때도 울지 않았다. 나를 닮아 독한 새끼라고 꼴도 보기 싫다며 발길질을 해대던 어머니의 가출은 차라리 홀가분했다. 상혁 역시 집을 나갈 타이밍을 재면서 학교에 자퇴서를 내던 날, 아버지는 하우스 나갔다가 2개월 만에 집에 돌아와 어머니가 사라졌단 소리에 눈이 뒤집혀 온 집안을 뒤져댔다. 어머니가 집을 나가든 말든 아버지에겐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돈, 어머니가 모아오던 돈이 없었다. 집안에 돈 나올 곳을 전부 뒤져도 땡전 한 푼이 안 나오자 아버지는 상혁을 복날 개 패듯이 팼다. 눈깔이 다 튀어나와 찢어진 입을 하고 팔려가듯 아버지 손에 끌려온 곳은 도저히 아버지가 평소 알고 지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번쩍번쩍하고 눈이 부신 고층 건물이었다. 서울 달동네엔 가난한 사람들이 판자집을 짓고 서로를 죽여가며 벌레처럼 살아가는 반면 서울 한복판엔 이런 고층 건물에서 그런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부자들이 살았다. 신기하게도 그들을 같은 서울에 살고 있었다. 별 크지도 않은 이 땅덩어리는 기형적으로 수직적인 모습이었다.

 

 

피떡이 된 채로 건물 로비에 개처럼 끌려왔는데 직원처럼 보이는 사람 중 누구도 부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이 익숙하다는 듯이. 마침내 휘청거리며 끌려가 던져진 곳은 그냥 딱 봐도 대부업체 사무실이었다. 그럼 그렇지. 돈 놓고 돈 굴리는 데라 삐까뻔쩍 광이 났던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이런 델 그냥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서 있을 힘도 없는데 상혁을 있는 데로 휘둘러 패대기치는 바람에 반들거리는 대리석 위로 얼굴이 처박혀 코피가 터졌다. 어제 도망칠걸. 그 생각이 불현듯 후회로 남았다. 아마 죽을 때까지 가장 후회하는 순간이리라.

 

아버지가 도박했대도 빚 뭐 그딴 게 얼마나 있는지는 몰랐는데 빌려 쓴 돈이 무려 1억이라고 했다. 그런 돈은 생전 눈으로 보지도 못했는데 아버지는 만져 보자마자 도박장에서 그 돈을 잃었다고 했다. 원금은 1억이지만 차용증에 적힌 수수료와 그동안 밀린 이자만 합쳐도 2억이 훌쩍 넘었다. 담보는 아들, 그러니까 상혁이었다. 신체포기각서에 상혁은 쓴 적 없는 제 이름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서명은 보호자의 권한으로 아버지가 대신했다고 했다. 눈앞에 들이 밀어진 종잇 쪼가리 하나를 대충 눈으로 훑은 상혁은 자포자기한 얼굴로 바닥에 널브러져 혀를 깨물까 생각했다.

 

"이거 넘기면 이제 나는 빚 없는 거지."

 

'이거'가 된 상혁은 내가 죽으면 이 빚이 다시 아버지 소유가 되나 싶어 처음으로 죽을 결심을 했다. 어차피 곧 죽을 거 같긴 했다만 저 인간 인생이 꼭 좆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울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고 시퍼렇게 진물이 터진 눈깔로 천장만 바라보며 쓰러져 누운 상혁의 눈앞에 참 고운 손 하나가 들어왔다. 손길은 안 고왔다. 대뜸 뺨을 갈기는데 짝 소리와 함께 돌아가는 고개에도 상혁은 악 소리하나 내지 않았다.

 

"얘 살아 있는 거 맞아?"

 

반응이 없는 상혁에 고운 손의 주인이 물었다. 눈깔이 터져 슬쩍 흐려진 시야를 돌려 바라본 얼굴이 손보다 고왔다. 남잔데 예쁘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뺨을 때렸던 손이 우악스럽게 머리칼을 움켜쥐고 얼굴을 들어 올렸다. 생각보다 악력이 세서 그땐 컥-하면서 숨을 뱉자 살았네. 하고 남자가 말했다. 끝까지 단정하게 맨 교복 넥타이가 숨을 졸랐다. 오늘이 마지막으로 입는 거였는데 핏자국이 낭자했다. 참 미련 없이 기쁘게 버릴 수 있겠다 싶었다.

 

"가 봐. 돈 더 필요하면 또 오고."

 

예쁘게 웃은 남자가 상혁의 아버지를 향해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사지 멀쩡하게 그냥 보내는 걸 미련이 남는 눈으로 끝까지 쫓았다. 엄마도 없는데 가진 거라고는 아들밖에 없는 노름꾼이 뒤늦게라도 정신 차리고 저를 데리고 가줄까 봐, 그럼, 여기서 나가는 순간 저 인간 심장에 칼을 꽂아 넣고 나는 도망쳐야지. 뭐 그런 꿈에나 가능할 상상을 아주 잠깐 했다. 물론 상상이었다. 현실은 언제나 시궁창이고. 상혁은 머뭇거림도 없이 제 아들을 인신매매하고 돌아서는 아버지의 뒷모습에 씨발 새끼, 라고 작게 욕했다. 들으라는 아버지는 못 듣고 얼굴이 고운 남자만 듣고 깔깔 웃었다.

 

"죽은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멀쩡하네? 성깔은 멀쩡하다 못해 아주 완벽히 살아있고."

 

곤죽이 된 얼굴의 어디가 멀쩡해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남자는 상혁이 멀쩡하다고 말했다. 멀쩡한가 보지 생각하며 몸에 힘을 뺐다. 중력에 의해 머리칼을 움켜쥔 남자의 품에 풀썩 안기는데 심지어 향기도 좋았다. 브랜드는 몰라도 고급 향수겠지 생각했다.

 

"애기야, 콩팥 하나 2천인데 너 간까지 다 잘라 팔아도 1억은 안 될 거야."

 

남자는 참 친절하게 상혁을 끌어안고 견적을 내줬다. 신장 한 짝에 2천, 간 3천, 눈깔 하나 500. 심장까지는 뽑아낼 수 있는 야매 전문가가 없어 병원으로 가는 루트 뚫는데 돈이 더 드니까 그것까진 못한다고 했다. 도합 7천 500. 꼴랑. 상혁은 그 금액을 듣고 비죽 웃었다.

 

"그럼 남는 돈은 저 새끼 것도 갖다 팔아요."

 

멍이 시퍼렇게 든 광대를 끌어올려 웃으면서 문을 박차고 참 당당하게 사라진 아버지의 뒤꽁무니를 가리키며 말하자 남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술, 담배에 쩐 중년 사내의 몸에서 빼낼 수 있는 장기는 많지 않을 것이고 상혁의 것까지 다 합쳐 봐야 2억이 넘을 리 없었다. 상혁은 자조 섞인 웃음을 뱉으며 입안에 고인 핏물을 대리석 바닥에 퉤 뱉었다. 뺨을 맞으면서 잇몸이 찢어진 것 같았다. 남자는 그 꼴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보다가 움켜쥔 상혁의 머리칼을 놓고 살살 쓸어 정리하더니 귀 뒤로 예쁘게 넘겨주었다.

 

"눈 한 짝이 터져서 몰랐는데, 너 예쁘구나."

 

예쁘다는 말에 소름이 돋았다. 시발 팔려가는 건가? 그게 더 돈을 많이 버나? 안 죽고 몸 파는 게? 그렇게 생각하자 진짜 죽고 싶어졌다. 입술을 물고 있다가 혀를 깨물려고 입을 벌리는 순간 어떻게 알고 남자가 자기 검지를 상혁의 입안에 쑤셔 박았다. 우드득, 생살이 씹히는 소리가 무서웠다. 앞니 끝에 닿은 딱딱한 게 저 남자의 손가락 뼈라면 정말 끔찍할 것 같았다. 남자는 비명 한 번 안 질렀다. 치아 끝이 닿은 물컹한 손가락 살 틈새로 진하고 비린 쇠맛이 느껴졌다. 울컥울컥 피가 넘쳐 흐르는데 곁에 있던 덩치들이 형님! 하고 소리치며 달려와 상혁의 머리칼을 다시 움켜쥐고 구석으로 내동댕이쳤다.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우당탕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는데 꽤 큰 충격에 고막이 터질 듯 이명이 울렸다.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고 손등으로 흥건한 입가를 닦는데 제 손에 잔뜩 묻은 처음 보는 타인의 피에 손끝이 덜덜 떨렸다. 맞은 적은 많아도 누굴 다치게 한 건 처음이었다. 상혁은 그렇게 맞고 자라면서도 제 부모 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 볼 생각도 못 하고 도망칠 궁리만 하던 맹탕이었다. 아버지를 죽이라는 말에 그들이 그러고마 했어도 실은 까무러칠 거였다. 루저, 외톨이, 쎈 척하는 겁쟁이. 언젠가 들었던 유행가의 가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거 전부 다 할 수 있어도 못된 양아치까지는 못 되는 상혁은 애써 제정신인 척을 해 보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입안에 남는 피 맛이 너무 선연했다. 교복 셔츠의 소매를 끌어다가 입가를 벅벅 문지르는데 하얀 소매 끝이 벌겋게 물드는 게 끔찍해 눈을 깜짝이며 남자를 살폈다.

 

"쟤. 때리지 말고 잘 씻기고 제대로 입혀서 내 방에 데려다 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대충 곁에 선 사람들이 내민 수건 더미로 꽉 감싸 쥔 남자가 자기 발로 뚜벅뚜벅 걸어 사무실을 나가며 차에 시동 걸어, 병원 가야겠다. 하고 아주 평온하게 말했다. 분명 뼈가 이에 닿을 때까지 있는 힘껏 물었는데, 혀를 자를 생각으로 씹은 턱뼈가 뻐근했다. 상혁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아 그저 덜덜 떨리는 손발 늘어뜨린 채 눈알만 굴렸다. 저 사람 죽으면 나 죽겠지? 고작 손가락 하나 물린 걸로는 사람이 죽지 않을 텐데 이렇게 피가 많이 나는 걸 본 적이 없는 상혁은 덜컥 제가 사람을 죽인 것처럼 무서워졌다. 조금 전까진 혀 깨물고 죽을 생각을 했는데 또 조금 전부턴 제발 살고 싶어졌다.

 

동공 지진이 일어나는 와중에 남자가 앉아 있던 잘 정돈된 책상 하나와 크리스털로 조각된 비싸 보이는 명패가 보였다.

 

'대표이사 김인성'

그게 남자의 이름인 것 같았다.

 

***

 

사무실에 남아있던 남자는 상혁에게 손가락을 물린 남자, 그러니까 인성의 말을 참 착실하게 수행했다. 상혁을 때리지도 않고 잘 씻기고 난 뒤엔 그의 기준에서 '제대로' 입혀 인성의 집, 인성의 방 안에 밀어 넣었다.

 

고층 빌딩의 중간층을 빌려 쓰는 고급 사무실은 들어올 때도 제 아버지가 이런 곳을 알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는데 대부업 사무실이란 말에 그럼 그렇지 하고 비죽거렸었다. 그런데 인성의 집은 그 한 층 전체를 모두 쓰는 로열층이란 걸 깨닫자 여기가 일반 대부업체는 아니구나 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인신매매, 장기매매, 대부업. 그리고 알 수 없는 기타 등등이 있겠지만 차마 그 기타 등등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다. 상혁이 목욕 재개를 마친 인성의 집 욕실은 좀 전까지 상혁이 개 맞듯 맞았던 상혁의 집 전체를 합친 것보다 넓었다. 이런 세상도 있구나 싶어서 온몸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다 씻고 나왔을 때 욕실 앞에 놓인 건 샤워가운뿐이었다. 벗어둔 교복도 사라진 터라 별수 없이 가운을 걸치고 거실을 나왔는데 문 앞에 떡 버티고 선 아까 그 남자가 아직 맨몸에 샤워가운 하나 입은 물에 젖은 생쥐 꼴인 상혁을 그대로 끌고 인성의 방에 집어넣었다. 그러니까 달랑 이 샤워가운 하나가 남자의 짧은 견해로는 '제대로'. 입힌 거였던 모양이었다. 어이가 없어 눈앞에서 쾅 닫힌 아이보리색 문짝을 그대로 바라보고 섰는데 밖에 선 남자가 형님 몸에 피를 뺐으니까 네 몸에서도 그 만큼 빼야 할 거라고 말했다. 잘하라고, 잘 '접대'하라고 했다. 예쁜 짓을 해야 빚이라도 줄지 않겠냐고. 까무러치게 소름 끼치는 한마디였다.

 

인성이 남겼던 예쁘다는 말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 다리가 벌벌 떨렸다. 접대를 하는 데 내 몸에서 피를 뺀다는 건 그 남자, 김인성이 뭐 그런 취향이라는 소릴까? 아니면 사람 썰면서 희열을 느끼는 뭐 싸이코패스 살인마, 그런 족속인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젖은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풀었다 쪼그려 앉아 온몸을 동그랗게 말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머릿속에는 온갖 나쁜 상상이 점철돼 눈물이 터졌다. 그러게 왜 남이 죽겠다고 혀를 무는데 손가락을 물려 물리길, 살면서 제일 많은 피를 본 게 하필 또 인성의 피여서 놀랐던 마음이 이제는 몸까지 굴려질 위기에 처하자 더 벌렁거렸다. 어제 도망칠걸. 그 생각만 몇백 번을 하는데 문밖으로 인기척이 들렸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차라리 공사판을 뛰면서 평생 버는 돈을 남자한테 갖다 바치는 게 더 났겠다 싶었다. 근데 그건 돈이 안 될 거다. 7,500도 못 벌고 죽을 가능성이 크겠다 싶었다. 문이 벌컥 열릴 때까지 방안의 가장 구석에서 공처럼 말린 상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면 인성이 코앞에 있을 것 같아 덜덜덜 온몸이 떨렸다.

 

"하, 옷을…."

"..."

 

인성의 목소리는 한 번에 알아들었다. 어이없는 듯한 숨소리와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손도 얼굴도 목소리도 고운 남자였지만 저 손으로 사람을 죽이기도 할까, 생각하니까 또 오금이 저렸다. 손가락이 잘리도록 물려도 비명 하나 지르지 않았던 태연한 얼굴이 떠올라서 얼굴을 더 깊숙이 숙였다.

 

인성은 뚜벅뚜벅 걸어와 잔뜩 젖은 채 가운 하나만 걸치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고삐리 십팔세를 신기한 눈으로 관찰했다. 물끄러미 보다가 입고 있던 자켓을 벗어 상혁의 무릎 위에 톡 걸쳐두고는 추우면 그거라도 먼저 입어. 라고 말했다. 무릎부터 발치까지 온기가 퍼지자 얼굴이 유들하게 무너진 상혁이 겨우겨우 고개를 들었다.

 

"나는 고삐리랑 섹스하는 요상한 취미는 없어서 너랑 안 잘 건데 내가 말을 좀 헷갈리게 한 모양이야. 정말 잘 입혀서 갖다 놓으란 말이었는데."

"저, 저랑 안 자요?"

"그거 엄청 위험하게 들린다. 너 그렇게 말하면 큰일 나, 애기야. 왜? 나랑 자고 싶어?"

"...아니요."

 

꾸물꾸물 인성이 던져둔 자켓으로 몸을 감싼 상혁이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침대에 걸터앉은 인성을 올려다봤다.

 

"뭐해서 돈 갚을래? 죽는 거 빼곤 다 말해. 생각해 볼게. 몸 파는 것도 빼, 어차피 넌 안 할 거 같지만 그건 나도 보기 싫다."

"..."

 

지금 이게 뭐 하는 걸까 싶어서 상혁은 입을 다물었다. 상혁이 돈을 버는 동안에도 이자는 어차피 산더미처럼 불어 날 거였다. 죽어 나무토막이 돼 장기를 파는 것도 몸을 팔아 집창촌에 들어가는 것도 안된다면 그 돈을 감당할 재간이 없었다. 아니 사실 그 두 개를 전부 해도 2억은 언감생심이었다. 마음이야 일용직 막노동이라도 해서 갚겠다고 하고 싶지만 죽기 직전까지 불어나는 이자에 허덕이다 빚만 남기고 죽을 거였다. 인성은 돈이 필요해 보이진 않았다.

 

"뭐가 필요하세요?“

 

"똑똑하네?“

 

"...돈은 이미 많아 보여서요."

"너 공부 잘하더라. 그 노름꾼 쓰레기가 널 담보로 걸길래 어차피 여기 끌려오겠다 싶어서 미리 알아봤거든."

"...그런데요?"

 

"우린 사람이 필요해. 똑똑한 사람. 보시다시피 여긴 대가리 수는 많지만 퀄리티가 안 좋거든."

"...저보고 여길 들어오라는 말씀이세요?"

"널 살려줄 테니 뼛속부터 내 사람이 되는 거야."

 

딱 5년 줄게. 죽이지 않을 만큼 쓸모 있는 사람이 돼 봐.

 

***

 

“왜 이런 데서 일하는 사람들은 차가 다 검은색 세단일까?”

 

석우는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190cm가 넘는 훤칠한 키와 순하고 부드러운 마스크가 누가 봐도 군계일학, 주변 사람들을 전부 닭으로 만들고 학처럼 서 있는 미모를 가졌기에 잠깐 스쳐 간 사람도 두 번은 돌아보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얼굴만 보고 사람들은 그가 진중하고 묵묵한 타입이라 자주 착각들 했다. 그냥 봐도 멜로드라마 주인공처럼 생겼으니 성격도 마음대로 끼워 맞추는 거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김석우 본체는 말하길 워낙 좋아했다. 투머치 토커, 종알종알 쉴 새 없이 떠드는데 대답을 해주는 이는 없었다. 본인도 물어보면서 딱히 대답을 바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석우는 그냥 말하길 좋아한다 뿐이지 그걸 누가 듣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자켓의 주름을 한 번 툭 털고 단추를 잠근 상혁이 엘리베이터나 잡으라며 턱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석우는 조금 잰걸음으로 뛰어가 버튼을 누르고 열중쉬어 자세로 느긋하게 걸어오는 상혁에게 또 질문를 던졌다.

 

"보스한테 가?"

"보고 드릴 게 많아."

"나도 같이 들어가면 안 돼?"

"오늘 보고 내용은 독대야. 강비서도 밖으로 나갈 거야."

"... 밖에 있을게."

 

속이 뻔히 보이는 대답이라 상혁이 좀 웃었다. 형 웃는 거 오랜만에 보네. 석우가 씨익 웃자 상혁은 입꼬리를 내렸다. 괜히 말했네. 석우가 툴툴거렸다. 너 오늘 일 없어? 11층에 다다르고 문이 열리자 함께 11층에 내리는 석우를 향해 상혁이 물었다. 오늘 아니야? 체이스[CHASE]로 제이가 온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그건 그냥 루머였어? 회장실 앞에서 석우를 향해 돌아선 상혁이 묻자 석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루머는 아니야. 제이가 한국에 오긴 했어. 아직은 폭풍전야 뭐 그런 건가 봐. 기미가 없어.”

 

부드럽게 웃고 있는 얼굴은 여유로웠다. 자신 있나 보네? 상혁은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회장실 문에 노크했다. 똑똑똑- 간결하고 빠른 손놀림에 안쪽에서 종종걸음 소리가 들렸다. 강비서는 여전히 보폭이 좁나 봐. 석우가 수줍은 듯이 입을 가리고 부끄러워했다. 상혁은 좀 오묘한 표정으로 그런 석우를 구경했다. 곧 문이 열리고 상혁과 눈높이가 딱 맞는 앳된 사람이 방문자를 살피다 상혁의 얼굴을 확인하곤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보고가 있어서 왔어요. 강비서 나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로비에서 이 변호사님 오셨다고 연락받았어요, 들어가시면 됩니다.”

 

정의의 여신 디케는 눈을 가려 공평함을 추구하고 검을 들어 정의를 위해 싸우며 천칭을 들어 죄의 무게를 달아 법 앞에 모든 이의 죄를 평등하게 처벌하고자 한다고 했다. ‘변호사 이상혁.’ 가슴팍에 빛나는 무궁화 배지를 달고 그는 도박과 술과 폭력의 편에 서고자 했다. 목숨을 빚진 누군가에게 더 쓸모 있어 지고자.

 

혼자 있는 줄 알았던 자리엔 익숙한 얼굴이 하나 더 있었다. ‘대표이사 김인성’. 상혁을 이 말도 안 되는 범죄 집단의 고문 변호사로 만든 잘난 얼굴이었다.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상석에 앉은 회장님이 손을 들어 인사를 받고는 인성이 앉아 있는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상혁은 자켓의 단추를 풀고 자리에 앉아 들고 온 서류 가방에서 서류 뭉치를 잔뜩 꺼냈다.

 

“오랜만이네, 이변?”

“지난 건에 변론이 좀 오래 걸려서 상고가 들어왔었습니다.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 원하시는 대로 우위 선점했고, 보상은 신촌점 일대 클럽 지분을 넘겨 받기로 했습니다.”

“고생했네.”

 

상혁은 시종일관 상석에 앉은 보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말을 이었다. 잘 정리된 가장 얇은 파일철을 보스쪽으로 내밀었다. 언제나 콤팩트하게 그가 알아야 할 팩트만 집약한 보고서였다. 보스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꽤 상큼하게 웃었다. 상큼이라는 표현이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그런 모습이었다. 얄쌍하게 빠진 하관 옆으로 귓불에 매달린 치렁치렁한 귀걸이가 흔들렸다.

 

“머리색을 바꾸셨네요?”

“응, 재윤이가 골라줬어. 예쁘지?”

“잘 어울리십니다.”

 

귀걸이 같은 화려한 악세사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화사하게 눈부신 붉은 머리칼에 상혁의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 떨어졌다. 반들반들 광이 나는 차분하고 새빨간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베베 꼬던 보스가 축쳐진 눈꼬리를 휘며 사르르 웃었다. 언제봐도 화려하면서 반대로 고요한 사람이었다. 상혁은 소파 뒷면으로 놓여 진 크리스털 명패를 눈으로 훑었다. 아무 글자도 없는 비어있는 크리스털 명패는 그저 존재만으로 의뭉스럽고 신비로웠다. 그런 사람이었다. 이 거대한 범죄 조직을 빙자한 회사의 회장직을 맡은, 김영빈은.

 

영빈이 서류를 집중해 검토하는 동안 상혁은 그제야 맞은편에 앉아 싱글싱글 웃으며 커피잔을 손에 들고 저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인성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여전히 고운 얼굴과 고운 손을 가지고 있었고 그때보다 조금 여유로워 보였으며 상혁에게 무척이나 상냥한 눈빛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변. 아버지를 찾는다고 했지?”

“...네.”

 

한참 서류의 두 번째 장을 넘겨 읽던 영빈이 아차차 소리를 내며 무릎을 내리쳤다. 상혁은 끈질기게 저와 눈을 마주치던 인성의 눈이 영빈의 말에 조금 더 아치형으로 휘어지는 모양을 보며 입술을 질끈 물었다 놓았다.

 

“찾았데, 인성이가.”

“회사에선 이사라고 불러주실래요?”

“이건 내가 읽어보고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를테니까, 둘 다 나가 봐.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이사라고 불러달라는 인성의 목소리를 깔끔하게 무시한 영빈은 서류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손을 휘휘 저었다. 인성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상혁에게 나가자고 눈짓을 했고 상혁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인성을 따라나섰다. 두 사람이 회장실의 문을 열고 나가자 언제 와 있었는지 모를 듬직한 인영이 문 앞에 열중쉬어 자세로 서 있다가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하고는 회장실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갔다.

 

“재윤이도 여전하네, 저 목석 같은 것도.”

“김 이사님 한테만 저러는 거 모르시는 거 아니죠?”

“정말 나한테만 그래? 왜?”

 

“약점 가지고 놀리는 거 좋아하시니까요.”

 

인성의 가벼운 말투에 틱틱거리는 단답으로 일관하던 상혁이 비서실 문에 노트를 똑똑 두 번 하고 문을 열지 않은 채 안쪽까지 들리도록 말을 전했다. 강비서님 저희 갈게요. 이재윤 실장님 들어가셔서 당분간 안들어가셔도 될 것 같아요. 그렇게 말을 전하자 안쪽에서 네, 하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앞서 걸으며 엘리베이터를 잡는 상혁의 뒤를 졸졸 따라 가던 인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안 쪽까지 안들어가고 밖에서 그렇게 말해?”

“안에 석우가 같이 있어요.”

“아아, 그 둘도 여전하고.”

 

“제일 여전한 건 김이사님 같은데요?”

 

“나야 늘 똑같지.”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면 상혁이 먼저 탑승해 1층 로비 버튼을 눌렀다. 인성은 상혁을 따라 몸을 싣고 문이 닫히기를 얌전히 기다렸다가 마침내 문이 닫히면 제 앞에 우뚝 선 상혁의 팔을 잡아 제 쪽으로 마주 보게 몸을 돌렸다. 인성의 얄궂은 얼굴이 얄밉다가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상혁이 얼굴을 무너뜨리자 인성은 상혁의 그 표정이 마음에 든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이제 키스해도 되?”

“고삐리랑 섹스하는 취향 없다면서요.”

“이 변호사 이제 고삐리 아니잖아.”

“나이차는 똑같아요.”

“나이차는 상관없어. 이젠 내가 따먹어도 감빵가는 나이가 아닌게 중요하지.”

“이래서 이사님이 진짜 싫어요.”

 

“그래도 우리 집에 갈 거면서.”

 

“그 사람 정말 찾았어요?”

“섹스가 먼저야, 그 전엔 안 알려줘.”

 

어쩌다가 당신같은 사람이랑 내가... 상혁은 통통한 입술을 꼭 물고 잔뜩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가 여전히 뺀질하게 웃고 있는 인성을 머리카락을 와락 잡고 코앞까지 끌어당겼다. 일단 키스나 해요. 로비까지 30초예요. 퉁명스러운 그 뚱한 목소리가 마음에 든 인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상혁의 입술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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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인성 데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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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림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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