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되는 사이

그래도 되는 사이 10 (Fin.) (+15)

Return, 일상으로.

세상 떠날 때 가장 미련이 남는게 뭘까? 아직 못해 본 일? 통장에 남은 돈? 나중에 하려고 미뤄뒀던 일이나 가족일 수도 있겠다. 왜 다들 그러잖아, '나중에'라는 말이 너무 한심해지는 순간이 죽음을 앞에 둔 때라고. 그래서 하고 싶은 건 그때그때 다 해놔야 나중에 후회가 없다고. 후회 없는 삶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래도 하고 싶은 건 하면서 참지 말고 살자. 특히 사랑하는 마음 같은 거.

 

사랑해, 내가 죽으면 가장 슬퍼할 너를. 가장 많이 사랑해.



그래도 되는 사이 10

재윤 x 영빈

W. 갈피 



영빈이 마취가 풀려 정신을 차렸을 땐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까지 광산김씨 일가가 전부 모여 세상 서럽게 우는 얼굴로 영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거 그건가? 전지적 관짝 시점? 심지어 군복에 별을 달고 와서 우는 아버지를 보고는 와 꿈인가 싶다가 완전히 의식이 돌아오고 나서부터는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여기 없을 리가 없는데? 왜 없지? 수술 부위를 부여잡고 억지로 허리를 굽혀 앉은 영빈이 바짝 마른 입술로 벙긋벙긋 목소리도 안 나오는 입을 벌리자 부모님과 할아버지를 뒤로 물리고 먼저 다가온 영재가 영빈이 묻기도 전에 동생을 달래는 척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 사람, 내내 네 옆에 있었어. 근데 지금 좀 아파서 다른 병실에 입원했어.”

 

뭐?! 입원?!?! 영재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아프다는 말만 듣고 바짝 말라 재갈을 물린 듯 막혀있던 목으로 버럭 소리가 터졌다. 입원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가족들이 보고 있다는 건 안중에도 없었다. 수술 직후라 주렁주렁 온몸에 모니터 기계를 달고 있던 영빈이 억지로 일어서려고 하는 바람에 행사장 풍선 인형처럼 온갖 선들에 묶여 허우적거리자 발작인 줄 알고 어머니가 눈물을 터트리셨다. 다들 의사 선생님 좀 빨리 오라고 하라며 난리가 난 걸 영재가 김영빈! 하고 이름을 크게 몇 번 부르고 나서야 영빈은 잠잠해졌다. 그러고 나서도 계속 왜? 어디가 아프데? 많이 아프데? 하고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내는 눈에는 걱정밖에 없어서 영재는 못다한 말을 빠르게 더 했다.

 

“급성 폐렴이래. 독감이 너무 심해져서 잠시 안정 취하는 중이야. 괜찮데, 형이 확인하고 왔어. 이제 좀 진정해. 너도 환자야!”

“아, 폐렴. 독감. 아…. 많이 아팠겠네. 우리 재윤이.”

 

아프다는 말은 웬만하면 잘 안 하는 앤데 오죽했으면 입원했을까 싶어 머릿속이 새카매졌다. 그래도 지금은 괜찮다는 말을 듣고 건전지를 뺀 로봇처럼 영재의 품에 축 늘어진 영빈이 갑자기 밀려오는 통증에 헉하고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그리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양껏 칭얼거렸다. 아, 형…. 이거 너무 아프다. 철딱서니 없는 막내의 그 말을 듣고 영재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디 주먹으로 몇 대 맞은 것도 아니고 칼에 맞아 내장을 다 찢어 놨는데 아픈 걸 이제 느끼는 게 어이가 없어서. 작게 한숨을 쉬고 영빈을 다시 침대 위로 눕혀 놓는데 여전히 영재에게 푹 안긴 영빈이 조용히 물었다.

 

"형, 근데 나 재윤이 언제 볼 수 있어?"

 

딱, 한 대만 때리고 싶다. 영재가 참지 못하고 영빈의 이마에 꿀밤을 놓았다.

 

***

 

사극 드라마 보면 그런 장면 나오잖아, 칼에 맞아도 슬로우모션처럼 상처 다 확인하고 입에서 피 토하고, 미간 찡그리고, 상처 부위 더듬더듬 만져보다가 손에 묻어나는 피를 보고 그때서야 헉- 하고 무릎부터 꿇고 아주아주 천천히 쓰러지는 그런 거. 근데 그런 거 다 개 뻥이야. 칼 맞으니까 어디 확인하고 고개 숙이고 할 시간도 없이 그냥 골로 가겠던데? 꼴사납게 길거리에서 엉엉 울면서 곧바로 쓰러졌잖아. 입에서 피는 안 나오는데 옆구리에선 피가 폭포처럼 쏟아지더라. 와 나는 사람 몸이 70%가 물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잖아. 정말 끝도 없이, 피가 나더라. 나 진짜 무서웠는데, 널 많이 좋아하긴 하나 보다 했어. 그 순간에, 네 얼굴 밖에 생각이 안 나더라고. 내가 그랬지? 나 죽으면 제일 슬퍼할 사람 너일 거라고. 나 아파서 쓰러지는데, 네가 우는 얼굴이, 제일 먼저 생각나더라고. 그래서 기어코 눈을 떴어. 너 우는 거 보기 싫어서. 그러니까 나는 일어났는데.

 

그래서 재윤아 너는, 언제 일어날 거야?

 

한겨울의 오후는 햇살이 반짝거렸다. 눈도 안 오는 쾌청한 하늘을 창문 안에서 보고 있으면 지금이 겨울인 걸 뻔히 알고 있지만, 그래도 저 햇살 아래는 꼭 따뜻할 거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물끄러미 창문 밖으로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손에 쥐어진 따뜻함을 꾹 움켜쥐었다. 재윤의 손이었다. 칼 맞고 나뒹굴다 5시간 동안 수술을 한 건 분명 영빈이었는데 눈을 떠보니 호흡기는 재윤이 쓰고 있었다. 벌써 이틀째 잠만 자고 있다고 했다. 독감이 심해서 열이 오르락내리락 간밤에 몇 번이나 열이 올라 깨는 바람에 좀 안정이 된 어제부터는 거의 죽은 듯이 잠을 자는 중이라고. 그런 상태로 영빈의 병실에서 꼬박 하루를 밤을 새웠다고. 영빈은 제 수술 동의서에 적힌 재윤의 이름을 보고 또 펑펑 울었다. 그 와중에 제 보호자 노릇까지 했다는게 기가 막히고 재윤다워서, 그래서 재윤의 입원 동의서에는 영빈이 서명을 했다.

 

 

"진짜 장군의 아들이긴 한가보다? 회복력 괴물급."

"사람 몸이 참 신기해, 어떻게 이렇게 며칠도 안 지나서 멀쩡해졌지?"

 

아직 실밥도 안 푼 옆구리가 아릿한데 수빈과 영재가 신나서 놀려댔다. 장군의 아들이라니, 그거 드라마 제목 아님? 영빈이 가자미눈을 하고 노려보자 수빈이 깔깔 웃었다. 영빈의 아버지는 지난달에 별 하나를 더 다셨다. 계급으로만 따지면 진짜 장군이 되셨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영빈이 장군의 아들이라는 말은 퍽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지금 장군의 딸과 첫째 아들이 장군의 막내 아들을 놀리는 중이라는 게 문제였다. 아 이제 좀 가! 나 피곤해! 왁 소리치자 영재가 영빈의 이마를 주욱 밀며 또 재윤씨한테 가려고 그러지! 했다. 알면서 왜 물어봐?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불만 가득한 얼굴의 영빈이 팩 돌아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아, 얘 어딜 봐서 어른일까, 형누나 눈에는 아직도 10살짜리 꼬맹이로 보이는 걸 알려나 모르겠다며 영재와 수빈의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기 지금 부모님도 와 계신다며 재윤씨도 가족들이랑 있게 너도 여기 좀 있어."

"나도 재윤이 가족이야."

"김영빈."

"알아, 안다고. 그냥 괜찮나 해서 그러지. 눈 떴다는데 가보지도 못하게 하니까."

 

재윤이 오늘 아침에 눈을 떴다고 했다. 하필 영빈이 수술 부위를 소독하던 중이라 곁에 없었고 뒤늦게 소식을 접하고 재윤의 병실로 가려다가 미리 연락해준 서윤 덕분에 부모님이 함께 와 계신다는 소리를 들었다. 걱정될 만하시지, 하나뿐인 아들이 먼 타지에서 독감에 걸려 입원씩이나 했다는데 나였어도 당장 달려왔겠다. 머리는 이해하는데 마음에 조금 울렁거려서 영빈은 차마 병실엔 못 들어가고 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걸음을 돌리고 나니 보고 싶은 마음은 더 커졌다. 재윤이 제일 먼저 보고 싶어서 내내 곁에 있었던 건 나였는데 왜 나는 또 못 보게 해! 어차피 형 누나 앞에선 숨길 것도 없었다. 둘 사이도 이미 다 들킨 마당에 영빈은 재윤의 이름을 참지 않고 불렀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이쯤이면 그만하라며 타박이 돌아올 법도 한데, 영재는 영빈도 모르는 새에 언젠가부터 재윤에게 호의적으로 돌아서 있었다. 들어보니 영빈이 수술하는 동안 내내 제정신이 아닌 재윤의 곁을 지킨 것도 영재라고 했다. 형 고마워. 그 말을 듣자마자 영빈이 울먹거리며 인사를 전했다. 영재는 동생의 고맙다는 말이 너무 민망하고 묵직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지켜보는 것보단 응원하는 쪽이 더. 영빈이 행복할 것 같았다. 영재와 수빈은 동생이 행복하길 바랐다. 진심으로.

 

"나 하고 싶은 말 있었어."

"뭐? 우리한테?"

"응. 누가 그런 말 하더라. 형제간에도 해야 할말은 꼭 해야 한다고."

"누가?"

 

사실 누구냐고 물어보는 건 너무 무의미한 일이었다. 형제들 눈에 떼쟁이 철부지 김영빈을 그나마 어른처럼 만드는 건 보나 마나 재윤일테니까. 물어놓고 대답을 바라진 않아서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는 듯 영재와 수빈이 영빈의 근처로 다닥다닥 붙어 앉았다. 이러니까 어릴 때 생각나네, 형이랑 누나 사관학교 들어가기 전엔 우리 맨날 이렇게 붙어 앉아서 같이 숙제하고 티비보고 밥 먹고 그랬는데. 감상에 젖은 영빈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동의한다는 듯이 수빈과 영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익숙하고, 옆에 있는 게 너무 당연하고. 싸운 뒤에 사과 같은 게 없어도 우린 어차피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무뎌졌었나 봐."

"..."

"...그래도 민망하니까, 딱 한 번만 말할 거야. 잘들어."

 

남들이랑 다른 선택을 한 나 때문에 형누나가 걱정할 거, 생각 못 했어. 나 상처받을 거, 나 아플 거 생각해서 둘 다 그렇게 반대 했던 거라는 거 이제 알아. 걱정시켜서 미안해. 여전히 나 믿어주고 내 형이랑 누나 해줘서 고마워. 재윤이 선택한 게 절대 상처이지 않게 내가 잘할게. 형이랑 누나랑 아부지 엄마한테 받은 사랑에 보답하는 의미로 사랑 가득하게 살게. 그리고 나는 형누나도 여전히…. 사랑해.

 

***

 

누가 보면 인생 2회차인 줄 알겠어. 나란히 환자복을 입고 병원 복도 의자에 앉은 두 사람이 키득거렸다. 퇴원할 때까지 있겠다는 재윤의 부모님을 애써 설득한 건 서윤이였다. 오빠야도 쉬어야지 났지 엄마아빠 있으면 맘이 불편해가 더 못 쉰다. 여 같이 사는 오빠도 옆에 있어준다 안 하나! 이참에 야무지게 영빈을 소개해 인사까지 꼭꼭 하게 만들더니 씨익 웃으며 내년 입학식 때 보자고 영빈에게 안부를 전했다. 오빠 니는 설날에 내리 와라. 애정 듬뿍 담아 키워낸 여동생이 제 애인에겐 세상 상냥하더니 제겐 세상 쿨하게 인사하며 떠나는 바람에 재윤은 한동안 서운함에 삐죽거렸다.

 

영빈의 형제들도 곁에 있겠다는 부모님을 설득해 집으로 모셔가면서 재윤에게 영빈을 잘 부탁한다고 거듭 말했다. 다 자란 동생을, 심지어 연하의 동성 애인에게 맡기면서 쟤가 너무 어려서, 아직 철이 없어서, 덜렁거려서 걱정이라며 디스 아닌 디스를 하는 바람에 영빈이 민망함에 달아오른 얼굴로 빨리 가라며 동동거렸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영재는 재윤을 아주 어색하게 안아주며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뭐가요? 어리둥절해 묻는 재윤에게 작게 웃어 보였을 뿐 다른 대답은 없었지만, 어쨌든 영빈의 곁에 있어도 된다는 허락 같아서 재윤은 만족했다. 이제야 서로 죄책감 없이, 미안함 없이 볼 수 있겠다. 싶어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모두 떠나고 두 사람만 남은 병원은 생각보다 적막했지만 외롭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유독 많이 오가는 복도 한가운데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 재윤은 누가 보든 말든 영빈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물론 영빈은 놓으려는 시도조차 안 했다. 어떻게든 조금 더 붙어 있으려고 서로 어깨에 기대고 머리에 얼굴을 포개고 손을 잡고 발을 겹쳤다. 평화롭네. 오랜만에 공간을 채우는 고요함이 싫지 않아서 재윤은 어깨 위에 기대있는 영빈의 정수리에 쪽 입을 맞췄다. 아,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머리 감길 잘했다. 로맨틱은 손톱만큼도 없는 현실적인 영빈의 발언에 재윤이 키득거렸다.

 

"오늘 퇴원하면 뭐 할 거야?"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또?"

"형 보러 빨리 다시 와야지.“

 

빙글 웃는 재윤의 하얀 뺨에 쏙 보조개가 보이면 영빈이 습관처럼 재윤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살이 좀 빠졌나 봐. 보조개 옅어진 거 같아. 우는 소리를 내는 영빈의 손을 잡아내려 손가락 끝을 아프지 않게 입술로 앙앙 물었다 놓은 재윤이 별로 빠지지도 않았다고 영빈을 달랬다. 퇴원도 같이하고 싶었는데, 영빈은 아직 3일은 더 남은 제 퇴원 날짜를 떠올렸다. 독감이 말짱하게 나은 재윤은 오늘 오후 퇴원 예정이었고 수액을 달고 있던 링거 바늘도 뽑아낸 다음이라 가뿐해 보였다. 반면 여전히 실밥도 풀지 못한 자상 수술 환자 김영빈은 마른 팔에 도드라진 핏줄 위로 커다란 바늘을 쿡 무섭게도 박아 놓고 항생제에 해열제에 수액까지 주렁주렁 링거대에 걸어 놓은 채였다. 나도 같이 가고 싶다아.

 

몸이 아프면 어린애가 된다더니 병원에선 유독 제게 의지하며 매달리는 영빈이 싫지 않아서 재윤이 잡은 손을 살살 흔들며 영빈을 달랬다. 나 먼저 퇴원하면 집에 가서 씻고 형 옷 좀 챙겨올게. 금방 올 테니까 밥 잘 먹고 잘 기다리고 있어. 정작 앙상해 진 게 누군데 누구더러 살이 빠졌다는지 모르겠는 재윤이 눈에 띄게 살이 내린 영빈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엄지로 뺨을 쓰다듬다가 고개를 돌려 복도의 양 끝을 확인하고는 사람 없다! 속삭이면서 입술 위에 쪽 가볍게 뽀뽀했다.

 

***

 

드디어 실밥을 풀고 마지막 소독을 하던 날 영빈은 만세를 불렀다. 주렁주렁 치렁치렁 매달려 있던 링거와 안녕을 고하고 재윤이 챙겨온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의사 선생님의 퇴원 후 주의 사항 같은 건 모조리 다 잊은 채 냅다 입구로 달리는 바람에 아직 뛰지 말라며 재윤에게 허리를 붙잡혀 버렸다. 집, 집, 우리 집 가고 싶어 얼른. 상처 부위가 아프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넓게 허리를 감싸 안은 재윤의 큰 품에 폭 끌어안겨 발을 동동 구르는데 갈수록 어린애가 되는 것 같다면서 못 말린다는 듯 웃은 재윤이 처방전까지 야무지게 받아들고 이제 가자, 하고 영빈의 손을 잡았다.

 

병원 문을 나가기 전에 패딩을 꼼꼼하게 챙겨 입히고 목도리까지 둘둘 둘러주며 영빈을 완전무장 시킨 재윤이 눈사람처럼 둥실해진 제 애인을 보며 큭큭 웃었다. 하필 가지고 온 패딩이 하얀색이라 더 동그랗게 보여서 입을 맞추고 싶은 걸 대신해 목도리 위로 드러난 두 눈두덩이를 살살 엄지로 문질렀다. 아 예쁘다. 예쁘다는 말에 사르륵 휘어지는 영빈의 눈꼬리가 아래로 축쳐졌다. 애정이 듬뿍 담긴 예쁘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좋았다.

 

“어, 재윤아 눈 와.”

“눈?”

“응! 첫눈이다!”

 

병원문을 나서자마자 뿌옇게 구름 낀 하늘에서 꽤 굵은 눈송이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구름 뒤에 해가 가려 유독 낮은 기온에 숨만 쉬어도 입 밖으로 입김이 폴폴 새어나가고 있었다. 잠시 말을 잃고 우와 탄성을 지르며 하늘을 바라보던 두 사람이 고개를 내려 마주 보고 크게 웃었다. 우리가 연애를 하긴 하나보다, 하늘을 보며 첫눈이 온다고 신나 할 나이는 꽤 지나지 않았나? 둘이 함께 맞는 겨울, 함께 맞는 첫눈. 여름에 만나 겨울까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꽉꽉 들어찬 시간이 새삼 신기하고 간지러워서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이제 집에 갑시다.”

“네에.”

 

활짝 펼쳐진 재윤의 손을 꼭 잡고 바짝 달라붙어 팔에 팔짱을 꼈다. 으흐흐 바보같이 웃던 영빈이 이마를 콩- 맞대고 걸음을 걷는 재윤을 따라 제 발을 맞췄다. ‘우리’ 집에 가자.

 

오랜만에 둘이 함께 돌아온 집은 정말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여전히 따뜻하고 아늑해서 영빈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높은 비명과 함께 소파로 와다닥 달려가 엎어졌다. 재윤이 웃으면서 뒤를 따라 들어와 답지 않게 영빈이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그렇게 좋아? 하고 물으면 영빈이 아무렇게나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면서 완전! 하고 답했다. 퇴원은 했지만 어린애 모드가 좀 길 것 같다는 생각에 재윤이 소파에 벌써 너부러진 영빈의 곁에 다가가 목도리를 풀어주고 패딩을 벗겨주었다. 팔! 하면 팔을 주고 이거 이제 벗자! 하면서 재윤의 목을 두 팔로 감싸 대롱대롱 매달려 패딩을 벗겨 줄 때까지 이리저리 손을 타던 영빈이 가벼워진 몸으로 배시시 웃으면서 재윤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어어 옷 정리해야되.”

“얼마만에 집에 온건데 지금 옷이 문제야?”

“형 아직 무리하면 안된데.”

“뭘 할 건데 무리하지 말래?”

“아니...”

 

그, 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영빈의 목소리는 놀리는 투가 역력한 데 그걸 알아채지 못한 재윤의 귓바퀴가 이미 발개져 있었다. 네가 하고 싶은 거 아니고? 영빈이 키득키득 웃다가 재윤의 목덜미에 비비던 얼굴을 틀어 턱 아래쪽에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췄다. 아무리 목도리로 꽁꽁 감싸고 왔어도 기온이 낮았던 탓에 목덜미에 닿아오는 영빈의 입술이 차가워 재윤이 목을 잔뜩 움츠렸다. 그럼 영빈이 소리없이 씨익 웃으며 재윤의 목을 감싸고 있는 팔에 힘을 줘 사이를 좁혔다.

 

얇은 입술이 턱 밑에서 귀 뒤로 목선을 타고 흘러 재윤의 쇄골을 자근자근 씹었다. 재윤은 영빈이 벗어 놓은 패딩과 목도리를 두 손에 가득 들고 안절부절못하다가 작게 한숨을 쉬며 입술을 씹었다. 진짜 이럴 거가? 읊조리는 말에 얼굴을 마주 댄 영빈이 색색을 숨을 쉬면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래서? 안 한다고? 우리 이제 집에 왔는데? 나는 이러려고 집에 빨리 오자고 한 건데? 숨길 것도 없고 숨기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내가 죽다 살아 보니까 말야.”

“누가 죽었는데, 장난으로라도 말 쫌.”

“아아, 알았어. 화내지 말구. 내가 칼에 찔려 보니까.”

“아 형아!”

 

큭큭큭 어느새 재윤의 무릎 위로 올라가 손에 들린 패딩이며 목도리를 바닥으로 던진 영빈이 인상을 잔뜩 쓴 재윤의 미간에 입술을 살살 비비며 짓궂게 웃었다. 아, 이재윤 놀리는 거 너무 재밌어. 다리를 벌려 재윤의 허리를 감싸고 목에 답싹 매달려 몸을 살살 흔든 영빈이 아무튼 내가 아파보니까, 나는 제일 후회되는게 그거더라고.

 

“뭔데?”

“이렇게 죽을거면 섹스나 더 많이 할 걸.”

 

그 앙큼하고 어이없는 말을 듣고 피식 웃음이 터진 재윤이 으이구, 타박하는 척 제 위에 앉은 영빈의 허리를 단단히 잡고 일어섰다. 덩치 차이가 크다는 건 이렇게나 유용한 일이었다. 매일 운동을 꾸준히 했던 것도 다 이렇게 근육을 쓰려고 그랬나 보다 하고 재윤은 하등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영빈이 저보다 좀 더 작고, 마르고, 가벼워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뿐하게 들어 올려 침대에 곱게 눕히며 어느새 자기 혼자 티셔츠를 훌훌 벗어 던진 영빈이 바지까지 주섬주섬 끄어 내리기에 재윤이 정말 웃음이 터져 끅끅거렸다.

 

“많이 급하신가봐요?”

“네, 저 벌써 이주나 섹스를 못했거든요.”

 

능청스럽게 받아치며 오른발로 왼발에 걸친 바지까지 걷어버린 영빈이 옆구리에 크게 붙은 거즈를 손바닥으로 크게 감싸 아프지 않게 눌러오는 재윤에게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아, 아아 만질 거면, 말을 하지. 횡설수설 얼굴이 굳어지는 영빈을 보고 재윤이 예고도 없이 키스하며 영빈을 다시 눕혔다. 그 찰나에 스쳐 지나간 얼굴이 두려움이라고 생각하자 그 자리에 없었던 제가 너무 무력하고 혼자 길거리에 쓰러졌을 영빈이 너무 안쓰러워 속에서 무언가 울컥한 탓이었다. 재윤의 무게에 눌려 품 안 가득 재윤의 덩치를 끌어안은 영빈도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아서 달래듯이 느리게 등을 쓸었다.

 

“아팠나?”

“응, 너무 아프더라.”

“무서웠나.”

 

응, 나 거기서 잘못되면, 너 혼자 남아 울까 봐 너무 무섭더라.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영빈이 눈을 질끈 감았다. 눈꼬리를 따라 찔끔 맺힌 눈물에 재윤이 입을 맞추자 입술 틈으로 짭쪼름한 물기가 배어들었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키스밖에 몰라서. 섹스밖에 몰라서. 떨리는 눈이 마주한 순간 재윤이 옷을 벗어 던지고 자석처럼 영빈의 입술을 다시 물었다.

 

하루는 길었다. 그래서 몇번이나 서로를 가졌다. 꺼내 놓은 콘돔은 딱 하나가 남을 때까지 전부 썼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팔다리가 늘어져 헉헉대는 숨소리에도 서로를 부르던 둘은 끈적한 몸을 하고 엉겨 붙어 서로를 품 안에 가득 안았다. 사랑이 충만하다는 건 이런 거라고 생각했다. 세상엔 마음 없는 섹스도 있다지만 마음을 나눈 순간 서로만 볼 수 있고 서로만 느낄 수 있는 어떤 것들이 계속 갈구하던 욕구들을 전부 충족시켜주는 느낌이었다. 괜히 섹스를 사랑을 나눈다고 표현하는 건 아닌가 봐. 영빈이 말하면 재윤이 고개를 주억이며 동의했다.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영빈을 가장자리에 앉혀 발을 담가 준 재윤이 방 치우고 와서 씻겨 줄 테니까 얌전히 족욕이나 하라며 영빈의 젖은 머리칼을 귀 뒤로 살살 넘겨주었다. 어차피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영빈이 알았다고 대충 대답하자 재윤이 침실로 걸어가 시트를 바꾸고 바닥을 치우고 벗어 놓은 옷들도 척척 정리한 뒤에 욕실로 돌아왔다. 상처를 조심해서 아이를 씻기는 것처럼 제 무릎에 거꾸로 눕혀 머리를 감기고 수건에 물을 묻혀 몸을 닦아주고 하는 김에 수건으로 턱을 받쳐 세수까지 야무지게 시켜준 재윤이 저까지 샤워를 끝내고 변기 뚜껑 위에 앉아 있던 영빈을 거뜬히 안아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젖은 머리칼을 살살 드라이기로 말리는 손길에 꾸벅 영빈이 졸는 걸 보고 자도 된다. 하고 재윤이 더 낮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함께 누워 영빈의 아릿한 옆구리 상처를 연신 손바닥으로 살살 문질러 주던 재윤이 어느새 곤하게 잠이 든 영빈의 하얀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행복하네. 모로 누워 영빈이 뒤척이는 모습까지 새벽 내내 보다가 아침이 오는걸 보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잘자, 내일 또 봐.

 

***

 

매장 유리 문 앞에 적힌 안내문은 간결했다. ‘사정이 있어 당분간 쉽니다.’ 언제까지라는 날짜가 없어 누가 보면 카페 망한 줄 알겠다며 영빈이 쯧쯧 혀를 찼다. 오랜만에 문을 열고 안쪽에 붙인 안내문을 뜯어냈다. 어두운 카페에 불을 밝히고 익숙하게 탈의실로 들어가 유니폼을 갈아입은 영빈이 앞치마를 만지작거리다가 재윤에게 건넸다. 리본 묶어줘. 빙글 뒤로 돌아 팔을 벌린 영빈을 보고 피식 웃은 재윤이 영빈이 벌린 팔 아래로 손을 뻗어 앞치마를 둘렀다. 그냥 묶는 거 말고 너 묶는 것처럼 해 줘! 앞으로 돌려서! 귀엽게 추가 요구를 다는 영빈에 네네, 흐르듯 대답하며 착실히 요구를 이행한 재윤이 제가 제빵용으로 입은 조리복에 맨 앞치마 리본과 같이 영빈의 리본을 매듭지어 주고 다 됐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인성이 형은 아직 연락 안받아?”

“병원에 한 번 왔었는데 뭐 미안하다, 한 마디 하고는 그냥 가더니 전화도 안받고 톡도 그냥 읽씹하고.”

“가봐야 하는거 아니야?”

“오늘 카페 다시 오픈한다고 말해 놨으니까 오겠지, 점장이면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공으로 돈 벌 거 아니잖아.”

 

와, 매정하네. 홀 청소를 시작하면서 블라인드를 걷고 환기부터 하는 영빈의 뒤에 대고 염려스러운 목소리를 내는 재윤에게 영빈이 빙글 돌아 말했다. 너 나랑 김인성이 몇 년이나 친구였는지 알아? 그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재윤이 멈칫하면서 곰곰이 고민했다. 아 뭐 어릴 때부터 친구라고 하지 않았나? 한 십년? 어림잡아 대답하는 재윤에게 영빈이 씩 웃으며 5살 때 처음 봤어. 우리 유치원 동기. 하는 바람에 그럼 20년도 더 됐다고? 하며 재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겁 먹었겠지. 말하는 거 들어보니까 그 이상한 놈이 좀 낌새 안 좋은 걸 김인성은 알았나 봐. 근데 우리 걱정할까봐 괜히 말을 안했데, 설마 이럴까 싶어서.”

“아아...”

“본인이 잘못한 거 아닌데 본인 잘못이라고 잘 착각해 걔는. 근데 나는 그런 어리광 달래줄 재목도 아니고 그럴 인내심도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옆에서 늘 똑같이 있어주는 거 뿐이야. 그럼 알아서 정신차리고 돌아오겠지.”

 

그래도, 그러면 사람에 대한 상처는 그대로 남는 거 아닌가? 재윤이 좀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면 영빈이 여전히 혼자 바쁘게 홀 청소를 하다가 재윤의 손에 밀대를 쥐여주고 얼른 청소나 하라며 엉덩이를 툭툭 쳤다. 자라다 만 어린애를 키워주는 건 친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 그건 너랑 나 같은 사이나 해 줄 수 있는 거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매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성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돌아갔다. 잔뜩 주눅 든 얼굴이 딱 봐도 죄책감 가득이라 영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거 봐. 왔지? 근데 미안해하지? 하고 눈으로 점쟁이처럼 말했다. 그 자신만만한 귀여운 거드름에 웃음이 터진 재윤이 입을 가리고 큭큭 거리면 인성이 들어오다 말고 입구에 우뚝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쭈뼛거렸다.

 

“왔으면 청소해, 벌써 이주나 매장 닫았는데, 너 우리 월급 줄 돈 있냐?”

“점장 나 혼자 하냐? 너도 공동이잖아.”

“매출 관리 너한테 다 맡겼잖아. 그래서 카페 공사 나한테 다 맡긴거 아니야? 그럼 돈은 네가 줘야지.”

“야 쉰만큼 월급에서 깐다.”

“그게 쉰거야? 입원기록 떼서 주면 병가 처리 해주냐?”

“전직원 꼴랑 세명인 카페에 병가가 어디있냐? 없어, 넌 월급 50% 삭감이야.”

 

그냥, 옆에서 늘 똑같이 있어주는 거. 영빈은 아주 간단하게 말했지만 그건 아주 대단한 일 같았다. 재윤은 평소 같은 두 사람의 투닥거림을 보면서 새삼 영빈의 대단함을 깨달았다. 아 난 진짜 멋진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하는 마음이 불쑥. 그리곤 둘 사이의 그 끈끈함에 잠시 잠깐 잠들어 있던 질투심도 같이 불쑥! 후다닥 뛰어가 대거리를 하느라 거리를 좁힌 두 사람 사이로 팔을 뻗어 진정시켰다. 이제그만, 우리 친구들 오늘은 이만 장사 해야 하니까 그만 싸울까요? 상냥한 얼굴로 팔을 휘적거리며 두 사람 사이 거리를 벌리고 영빈을 제 뒤로 끌어당긴 재윤에 인성이 한풀 꺾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나다가 물었다.

 

“근데 너, 빵 만들 때 불편하다고 손에 악세서리는 안한다고 그러지 않았어?”

“응?”

“팔찌 말야. 못 보던 거네?”

“...팔찌?”

 

인성의 물음에 재윤이 고개를 갸우뚱 하며 이제야 알아차린 제 팔목에 못 보던 팔찌를 어엉? 이게 뭐야? 하는 얼굴로 살폈다. 영문을 모르는 재윤의 표정에 인성이 뒤로 숨은 영빈을 슬쩍 보고는 알만 하다는 듯이 나 옷갈아 입는다, 하며 빠르게 탈의실로 사라졌다.

 

“이게, 뭐고?”

“뭐긴. 팔찌네. 커플 팔찌.”

“커플, 뭐?”

“내꺼랑 똑같이 생겼는데?”

 

넋이 나간 재윤의 눈앞으로 똑같은 팔찌가 끼워진 말랐지만 단단한 팔목을 들이민 영빈이 짤랑짤랑 손을 흔들었다. 또 눈이 커다래져 고개를 들어 올리는 재윤의 양 뺨을 두 손으로 챱 감싼 영빈이 양 볼이 눌려 통통하게 튀어나온 재윤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며 씨익 웃었다.

 

“우리 이제 이래도 되는거 아니야?”

“어?”

“이정도쯤은 해도 되잖아. 네가 내 사람이라는 표시, 나는 네 사람이라는 표시. 나눠도 되는 사이.”

 

아아, 어.

 

“맞지. 우리 이제.”

 

그래도 되는 사이지.

 

 

배시시 발갛게 달아오른 뺨으로 수줍은 듯이 웃는 재윤을 보며 다시 한 번 쪽 뽀뽀를 더한 영빈이 오늘 아침 인사, 비쥬비쥬, 하고 말을 더했다. 다시 문을 활짝 연 카페 앞에 팻말을 ‘Close’에서 ‘Open’으로 바꾼 영빈이 막 옷을 갈아입고 나온 인성을 보며 장사 시작한다, 하고 소리쳤다.

 

스무살 언저리에서 멈춘 네 마음도 여기서 다시 자라게 해줄 사람을 꼭 찾았으면 좋겠다 김인성. 우린 지금 엄청 행복하거든. 우리가 그래도 되는 사이라.

 

‘Cafe CRAZIOSO’ Open 합니다.








_

지금까지 그래도 되는 사이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되는 사이는 외전으로 찾아옵니다 :)

1. 너에게 간다

2. 별보러 가자


갈피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갈 림 길
갈 림 길
구독자 835

0개의 댓글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새로운 알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