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되는 사이

그래도 되는 사이 08

해바라기의 꽃말.

집에 오는 길에 당신 생각이 나서 꽃 한 송이를 사 봤어. 흔해 빠진 삼류 멜로 드라마에서도 아주 오랫동안 먹어주는 대사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였다. 내게 전달 된 꽃 한 송이, 그 작은 선물에 기쁜게 아니라. 문득 집에 가는 어느 날, 어느 순간 당신의 일상 속에 내가 있었다는 진심 가득한 고백. 그것 때문에 이 상투적인 멘트는 아주 오랫동안 사랑받았으리라.

 



그래도 되는 사이 08

재윤 x 영빈

W. 갈피 



아침 10시 반, 새벽 늦은 전화를 끊고 모처럼 꿀잠을 잤다. 이재윤 목소리 완전 인간 수면제네. 3일 만에야 제대로 숙면을 한 영빈이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 가득 여느 때처럼 잘 잤냐, 나도 보고 싶다, 동생 생일이 어제였으니 그냥 지금 올라갈까, 방방 뛰는 재윤의 카톡에 오랜만에 집에 간 건데 제대로 푹 쉬다 오라며 쿨한 척 답장을 보내 놓고는 침대에 푹 쓰러져 어제 내내 끌어안고 있던 재윤의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고작 목소리 하나 들었다고, 이렇게 좋을까 싶다가 고작 재윤이 남기고 간 베개하나를 붙들고 내내 체향을 기억하려고 애쓰는 제 모습이 너무 우습고 안쓰러워서 피식 웃었다.

 

비척비척 일어나 늦은 아침을 시작하려는데 쿵쿵쿵-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에 까치집이 부스스한 머리를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쪼르르 인터폰을 확인했다. 그리고 조금 놀랐다.

 

"이게 다 뭐야?"

 

화면을 가득 채운 건 만발한 해바라기꽃이었다. 그냥 꽃만 한가득. 우뚝 멈춰서서 내내 그걸 바라보다가 다시 쿵쿵쿵, 울리는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에 후다닥 뛰어나가 대문을 열었다. 이런 걸 도대체 아침부터 누가 보냈어? 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집에, 그리고 김영빈에게 꽃을 보낼 사람이 이재윤 말고 누가 있겠어.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갑작스러운 꽃 배달은, 무슨 날도 아니고.

 

"나 보고 싶었나?"

 

말문이 턱 막혔다. 너무 좋은데 당황해서. 말문은 막혔는데 입은 턱이 빠져라 벌어졌다. 분명 가족들이랑 아침 먹는다고 1시간 전에 연락이 왔었다. 오랜만에 아들이 온다며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린 어머니표 식탁도 인증샷으로 보내왔었다. 아침부터 너희 어머니 대단하시다며 손뼉 치는 이모티콘 네댓 개를 보내고 감탄했던 것 같은데 그럼 얘는 순간이동을 했단 소린가 싶어 영빈이 말도 없이 재윤을 위아래로 훑었다.

 

"와? 겨우 3일만인데 이제 애인 얼굴도 몬 알아보나?"

"너, 여기 왜 있어? 어떻게 여기 있어? 아니, 왜 왔어?"

"그럼 우야노, 보고 싶은데."

 

일주일 치나 싸 가지고 갔던 커다란 캐리어를 풀기는 했을까, 떠나던 날 입었던 옷도 그대로 입고 돌아온 재윤은 품 안에 들고 있던 해바라기 꽃다발을 여전히 얼이 빠진 영빈의 품에 척 안겼다. 그리곤 현관을 뛰쳐나온 영빈을 몸으로 밀고 들어가 캐리어까지 전부 거실에 눕혀 놓고는 매고 있던 가방까지 전부 풀어 한켠에 쌓았다. 방긋방긋 웃고 있는 하얀 얼굴에 영빈이 어이가 없어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물었다. 정말 내가 너 보고 싶다고 해서 온 거야?

 

"뭐라는데? 내가 보고싶어가 왔다니까."

 

형이 나 보고 싶은 거보다 내가 형이 더 보고 싶어서 못 참고 여 와있는 거 아이가. 그런 의미로 왜 아직도 안 안아주는지 내 쫌 이해를 몬하겠는데, 이제 쫌 안아주면 안 되나?

 

언제까지 놀라고 있을래? 짓궂은 얼굴의 재윤이 두 팔을 양껏 뻗어 영빈의 앞에 활짝 벌렸다. 얼떨떨한 얼굴로 습관처럼 그 품에 폭 안겼다가 점점 정신이 돌아온 영빈이 베개에 남은 재윤의 체취가 아니라 진짜 이재윤 냄새가 코끝에 스치자 눈가가 뜨거워지는 바람에 얼른 재윤의 목덜미에 얼굴을 폭 묻었다. 야, 너는, 오면 온다고... 아니, 가족들 보러 간 건데... 이렇게 갑자기... 너 진짜. 품 안에서 망그러진 해바라기 꽃다발을 재윤이 받아 들어 거실 탁자 위에 올리고 웅얼웅얼 뭐라고 끝맺지도 못하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는 영빈의 정수리 위로 입술을 눌렀다. 맞춘 듯이 품 안 가득 딱 맞게 들어차는 얇은 몸을 숨이 막히도록 꽉 끌어안고 뒤뚱뒤뚱 펭귄처럼 뒤로 걸어가 폭싹 소파에 앉으면 재윤의 무릎 위에 그대로 올라가 앉은 영빈이 두 팔로 재윤의 얼굴을 꼭 끌어안았다.

 

"감동했나? 감동하라고 이래 온건데."

"바보야, 이러면 너희 가족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내가 알아서 잘 말하고 왔다, 걱정 마라."

 

어지간히 감동인 모양인지 찔끔 나온 눈물을 말리느라 얼굴이 새빨개진 영빈이 실실 웃고 있는 철없는 연하 애인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쪽쪽쪽 끝없이 이어지는 뽀뽀 세례에 영빈의 허리를 감싼 재윤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함박웃음을 짓다가 뺨 언저리로 내려오는 영빈의 얼굴을 잡아 돌려서 그대로 입을 맞췄다. 고작 3일, 겨우 3일. 이제 막 침대에서 나온 터라 체온이 높은 영빈의 혀가 뜨거웠다. 깜빡깜빡 키스하며 뒤채는 와중에도 실눈을 뜨고 바라본 재윤의 감은 눈이 너무 예뻐서 영빈이 사르르 웃었다. 고작, 겨우. 그것마저 떨어지기 싫어서 결혼 얘기를 먼저 꺼낸 건 저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

 

내가 알아서 잘 말하고 왔다, 는 게 도대체 어떤 내용이었을까? 영빈은 꼭 며칠 전과 같이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고 꼿꼿하게 굳어있었다. 이번엔 좋아서는 아니고 너무 놀라서. 얼굴만 봐도 누구인지 그냥 딱 알 것 같은 인물의 등장은 실로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웠는데 심지어 그 손에 재윤이 며칠 전 들고 왔던 캐리어와 사이즈만 다른 가방이 들려있어 더 당황스러웠다.

 

"아, 저..."

"안녕하세요. 이재윤 동생 이서윤입니다."

 

윤이었다. 영빈의 핸드폰에 저장된 그 윤이랑 놀랍도록 얼굴이 비슷한 낯선 등장인물은 본인의 이름도 윤이라고 했다. 심지어 저 어설픈 서울 말투도 비슷했다. '이서윤', 영빈은 마냥 아이를 기다리게 할 수 없어 일단 길을 텄다. 현관을 활짝 열고 몸을 비켜 안쪽으로 길을 내주자 아이는 예쁘게도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냥 보자마자 알 수 있을 정도로 물어볼 필요도 없이 생긴게 이재윤의 여동생이라서 영빈은 왜 왔냐 묻지도 못했다. 오빠 만나러 왔겠지. 와 사람이 저렇게 닮을 수도 있나? 하얀 얼굴에 찹쌀떡 같은 뺨도 그랬는데 눈꼬리가 축 처진 것도 통통한 입술도 완전히 빼다 박은 느낌이었다. 여자라고 좀 더 선이 여린 느낌은 생소하지만 분명 고운 얼굴이었다. 근데 캐리어는 왜? 표정 관리가 전혀 되지 않은 뒤죽박죽 표정으로 서윤의 캐리어만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거실에 멀뚱히 선 서윤이 저기, 하고 영빈을 불렀다.

 

"네?"

"오빠가 저희 오빠랑 같이 사시는 분이죠? 혹시 저희 오빠는..."

"아, 재윤이 재료 보러 거래처 갔어요. 아직 오려면 좀 있어야 하는데."

 

계획에 없던 휴가가 생긴 김에 리뉴얼 된 카페 메뉴에 새 메뉴를 좀 많이 넣다 보니 기존 거래처에선 팔지 않는 재료들이 몇 필요했다. 새로운 거래처를 알아보면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재료에 확신이 선다고 재윤은 오전부터 외출 중이었다. 재윤이 없는 것도 모르고 찾아온 걸 보면 연락하고 온 건 아닌 것 같았다. 일단은 손님이니까 거실 소파를 가리키며 앉아 있으라고 말하고 냉장고를 뒤져 주스 종류를 읊었다. 오렌지랑 포도랑 토마토. 뭐 마실래요? 자연스럽게 물으면서 재윤에게 톡 하나를 남겼다. '여동생이 너랑 똑같이 생겼네.'라고.

 

"오빠 커피 만들죠?"

"저요?"

"말은 놓으셔도 돼요. 우리 오빠보다 나이 많다면서요. 저는 올해 고3이고 입시 때문에 잠깐 서울에 왔어요. 실기 보러."

"아아…. 입시."

 

"저 커피 내려주시면 안 돼요?"

 

서윤은 두 손을 무릎 위에 나란히 올리고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안 돼요? 에 억양이 유독 셌다. 재윤이보다 사투리가 심하구나. 긴장하고 있나? 제가 긴장해서 서윤이 긴장한 건 미처 몰랐던 영빈이 그제야 여기가 제집인 걸 아차 하고 깨달았다. 그냥 재윤의 동생이라니까 긴장해서 온몸이 돌처럼 굳어있다가 서윤이 커피를 내려주면 안 되냐고 물으며 손가락을 꼼질 거리는 걸 보고 조금 긴장이 풀렸다. 영빈은 그제야 씨익 웃었다. 커피 좋아해요? 재윤이는 잘 못 먹는데?

 

"야작을 많이 해서 달고 살았는데 믹스커피는 너무 달아가 별로 제 스타일이 아니예요. 오빠가 쩌번에 집에 왔을 때 같이 사는 바리스타 오빠 얘길 엄청했어요. 자긴 커피 못 마시는데, 그 오빠야가 내려준 건 다 마신다고."

 

오빠야, 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너무 귀여워서 일단 웃었다. 그리곤 재윤의 생각에 웃음이 터졌다. 정말, 팔불출이 따로 없었다. 집에 가서도 제 얘기만 했을 재윤이 눈에 선해서 영빈이 고개를 숙여 웃었다. 드립으로 내려줄게. 와서 볼래? 포트에 물을 끓이고 필터를 꺼내면서 커피를 고르던 영빈이 서윤을 아일랜드 바로 불러다 앉혔다. 온통 신기해 보이는지 반짝이는 순한 눈이 재윤과 정말 많이 닮아 있었다. 예체능이야? 그림 그려요. 1차 수시 합격해가 실기만 보면 되는데 서울에도 원서 몇 개 넣었어요. 그래가 온 김에 오빠도 쫌 보고 갈려고 여로 왔어요.

 

"얼마 전에 오빠 전입신고 했다고 주소 알려 줬거든요."

"아아, 맞아. 전입신고…."

 

그라인더에 원두를 스푼으로 떠 넣던 영빈이 뜨끔했다. 얼마 전에 재윤과 동거인 신청을 마쳤다. 영빈 명의의 아파트에 재윤의 이름을 옮기고 동거인으로 수속하기까지 채 하루가 안 걸렸다. 등본을 떼면 김영빈 이름 아래 이재윤이 동거인으로 딸려 들었다. 그걸 보면서 한참 신기하다고 재윤과 떠들었다. 두 사람에겐 나름의 혼인신고였다. 아무도 모르는, 그냥 둘만 아는. 영빈은 일부러 서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커피에 집중했다. 수동 그라인더는 커피콩이 갈리는 소리부터 아날로그틱해서 시끄러웠다. 이런 소리라도 있어 다행이네, 영빈이 입술을 입안으로 말아 넣었다. 이재윤 빨리와! 속으로는 또 긴장감이 스물스물 올라오는 중이었다. 서윤은 아일랜드 식탁에 팔꿈치를 대고 두 손으로 얼굴을 받쳤다.

 

"그러고 있으면 턱 나빠진다던데?"

"우와, 우리 오빠랑 똑같은 소리. 그거 우리 오빠야가 한 말이죠?"

"맞아, 내 버릇도 그거거든."

 

영빈은 턱을 괼 때마다 그카면 턱 나빠진데이, 하고 잔소리를 하던 재윤을 떠올리며 서윤에게 말을 건네다 같은 잔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에 눈을 마주치고 까르르 웃었다. 확실히 사랑받고 자란 아이는 생기가 넘쳤다. 재윤을 보면서도 좋은 가정에서 사랑 듬뿍 받고 자란 티가 난다고 생각했는데 서윤도 그랬다. 남매가 참 여러모로 김영빈 취향이었다.

 

"오빠 이름이, 빈이예요?"

"응? 아아, 응. 영빈. 김영빈."

"...흐음..."

 

반응이 좀 시원찮아서 고개를 갸웃했다. 재윤이 제 이름을 부를 때 빈아 빈아, 그렇게 자주 말해서 그걸 들었나 싶었는데 서윤의 표정이 좀 묘했다. 왜? 내 이름 이상해? 하고 묻자 그건 아니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예뻐요, 이름. 아일랜드 탁자는 높이가 좀 높아서 의자에 앉은 서윤의 다리가 달랑거렸다. 아일랜드 바 가장 가리에 놓인 꽃병을 보며 서윤이 해바리기네요. 하고 말을 돌렸다. 어, 응. 예쁘길래. 꽂아놨지. 대답하는 영빈의 말이 뚝뚝 끊겼다. 재윤이 부산에서 돌아오면서 선물했던 해바라기였다.

 

“꽃말이 뭔지 알아요?”

“꽃말? 아니. 해바라기 꽃말... 음, 뭐 일편단심 그런건가?”

 

“...보고싶어요.”

 

“어?”

“보고싶어요. 가 꽃 말이예요.”

 

아아, 꽃말을 미처 몰랐던 영빈이 빨개지는 귀를 가리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큼큼, 할 말도 없으면서 괜히 목을 가다듬고 눈동자를 굴리면 조금 말이 없던 서윤은 통통한 입술을 뾰족하게 모으고 눈치를 살폈다. 마침 영빈이 다 갈아낸 원두 가루를 필터 위에 담아 넣었다.

 

"우리 오빠한테 여자친구 생긴 줄 알았어요."

"...어?!"

"내 생일이라고 내려와가 내내 핸드폰만 붙잡고 헤실거리는 거예요. 나는 보지도 않고. 딱 봐도 애인이데, 핸드폰에 온통 빈빈빈. 이모티콘 같은 거 잘 쓰지도 않는 사람이 완전 하트 범벅이던데."

 

영빈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포트를 들고 정지화면처럼 멈췄다. 눈을 살짝 내리깔고 조근조근 말을 꺼내는 서윤의 목소리가 잔뜩 서운함을 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진 채 아아…. 하는 체념에 가까운 소리를 내다가 서윤이 심지어 이름이 외자인 줄 알았더니 영빈이래, 그거 오빠 맞죠? 하고 묻는 소리에 입을 딱 다물었다. 어어, 어어…. 그게, 내가…. 아니지…. 않을까? 우물우물 다 죽어가는 소리로 말을 돌린 영빈이 필터 위로 뜨거운 물을 한 번 붓고 원두가 젖길 기다리면서 자그만 머리를 팽팽 돌렸다. 도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대답을 찾지 못했다. 대답이 없는 사이 젖은 필터 위로 한 번 더 물을 부은 영빈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커피 거품을 한번 봤다가 서윤을 한 번 봤다가 계속 눈치를 살폈다. 아, 적막이 숨이 막혔다.

 

"커피 냄새 좋다."

"아아 어, 이거 집에 갈 때 선물로 줄까?"

"그냥 저 여기 있는 동안 오빠가 계속 내려주면 안 돼요?"

"...여기, 있는 동안?"

"네, 저 실기 시험 동안 여 있을려고 온건데."

 

여기…? 우리 집에? 이번엔 다른 의미로 할 말이 없었다. 아…. 고장 난 로봇처럼 아, 만 반복하다가 커피의 필터가 말라 갈 때쯤 미리 따듯하게 덥혀둔 커피잔에 커피를 따른 영빈이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며 서윤의 앞에 커피잔을 밀었다.

 

"저도 알아요. 저 좀 예의 없죠, 지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데,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보고만 있다 가면 안 돼요?"

 

원래는 여기 있을 생각 없었어요. 숙소도 다 잡아 놨어요. 근데, 뭔가…. 이건 내가 생각한 그림이 아니라서. 우리 오빠는, 지금 어떤 사람이랑 있는지…. 그냥 보고 싶어요.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축 처진 서윤이 테이블 위에 뺨을 대고 영빈의 시선을 외면했다. 조그만 머리통에 오빠 걱정이 가득한지 잘근잘근 씹히는 입술을 보다가 영빈이 결심한 듯 대답했다. 여기, 있다가 가. 서윤아. 여기 있어도 돼. 어차피 이미 들킨 눈치가 빤한데 여기서 아이를 내쫓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당장에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문을 박차고 나가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인 상황이었다.

 

무려 제 오빠의 애인이 남자라는데.

 

재윤을 닮아 고요한 눈이 깜빡깜빡 영빈을 올려다보았다. 고민하는 게 역력한 눈동자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중얼거리는 소리를 용케 알아들은 영빈이 커피 식겠다며 얼른 마셔보라고 커피잔의 손잡이를 톡톡 두드렸다. 서윤은 꽤 오래 말이 없었다. 머릿속에 무수히 쏟아지는 질문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느리고 배려심 넘치고 다정하고 상냥하구나. 꼭 재윤이처럼. 영빈은 그저 서윤이 다시 말을 꺼내길 가만히 기다렸다.

 

"커피잔이 예뻐요."

"영국에서 친구가 사다 준 거야. 이런 거 좋아해?"

"네, 커피 맛은 잘 모르는데 이건 향도 좋고 잔도 예뻐서 좋아요.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무슨 말로 첫마디를 건네야 할지 한참 고민하던 아이가 영빈이 건네준 소담한 자기 잔을 톡 건드렸다. 하늘색이 은은하게 퍼진 커피잔은 가장자리엔 금색 테가 둘려 있고 중앙엔 진한 파란색 꽃들이 꽃가루처럼 퍼져 있었다. 인성이 사다 준 찻잔이었다. 직접 건넨 말은 없어도 아이는 그냥 이해해보려 노력 중인듯했다. 영빈은 그게 고맙고 기특해서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살금 풀려가자 서윤도 따라 웃는 게 보였다. 재윤은 5살 터울의 여동생을 맞벌이하는 부모님 대신 항상 데리고 다녔다고 했다. 오빠가 유학 갈 땐 부모님보다 여동생이 더 많이 울었다고, 지갑 한쪽엔 어릴 적에 찍은 여동생 사진을 꼭꼭 넣어 놓는다고 영빈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재윤의 지갑에서 본 작은 꼬마 아가씨는 어느새 이렇게 자라 오빠 걱정에 시름인듯했다. 어쩌면 부모 자식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을 남매에게 영빈은 조금 미안해졌다.

 

재윤이 돌아 온 건 30분쯤이 더 지나서였다. 손님방을 내어주고 짐을 풀게 도와준 영빈이 밥은 뭐 먹고 싶어? 하고 묻자 서윤은 햄버거요! 하고 말해서 영빈이 햄버거도 세트로 주문해 놓은 뒤였다. 헐레벌떡 들어와 영빈이 보낸 카톡을 내밀며 이 뭔 소린데? 하고 묻는 재윤의 앞에 서윤이 쭈뼛쭈뼛 모습을 드러내자 재윤은 영빈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해 보였다. 으아, 무서운 얼굴. 일단은 영빈이 상황을 중재하기 위해 서윤의 앞을 막고 서서 험악한 얼굴을 하는 재윤의 팔을 잡았다.

 

"니 여 왜 와 있는데?"

"...오빠 니 볼라고 왔지!"

"연락도 없이 불쑥, 니 지금 이거 엄청 무례하다 생각 안 하나? 여가 내 혼자 사는 데가?"

 

몰아치는 사투리에 영빈은 정신이 없었다. 아니 재윤아, 내 말 좀 들어 봐. 내가 있어도 된다고 했어. 시험 보러 왔다가 너 얼굴 보러 왔데, 숙소도 따로 있는데 내가 오빠 집이 여기니까 그냥 여기 있으라고 했어. 너 좀 진정해.

 

"그럼 야가 내 동생이라 카는데 뭐 형이 내 쫓겠나, 먼저 설명을 하고 허락을 받았어야지. 내 니 그렇게 가르칬나?"

"이재윤!"

"..."

"그만해 너, 이런 상황 예민한 거 아는데 그거 네 동생 잘못 아니잖아. 평소였어도 이랬을 거야?"

 

불같이 화를 내는 재윤은 참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상한 남자 손님이 영빈에게 추근거릴 때도 이것보단 덜했다. 제 형과 누나가 왔다 간 뒤로 이런 상황에 민감하게 구는 재윤을 알았다. 가족들이 우리 사이를 알게 되면 상처받는 건 어느 한쪽이 아니라 쌍방일 테니까. 한 번은 어떻게 잘 넘겼지만 두 번은 모르는 일이었다. 영빈이 다그치자 재윤은 그제야 서윤을 얼굴을 살폈다. 제 말에 잔뜩 상처받아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영빈의 뒤에 딱 달라붙어 억지로 눈물을 참는 고집스럽고 여린 얼굴. 저랑 똑 닮은 동생.

 

"내 그냥 오빠 잘 있나 보러 왔다. 오랜만에 집에 와가 맨날천날 핸드폰 잡고 히죽거리더니 내 생일 끝나니까 3일 만에 서울 올라가길래! 니 뭐 서울에 꿀단지라도 숨겨놨나 그랬다! 그래가 그냥, 오빠야 니 잘 있나, 애인 생겼으면 어떤 사람인가, 평소엔 안 물어도 내캉 비밀 같은 건 한 개도 없었는데. 왜 이번에는 아무것도 안 말해주지 싶어가, 내 억수로 서운 해가..."

 

따박따박 말을 뱉는 사이 참고있던 서러움이 눈물이 돼 쏟아졌다. 서윤은 저를 감싸주는 영빈의 팔을 잡고 엉엉 울었다. 자리에 주저앉아 아이처럼 우는데 재윤이 돌처럼 굳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영빈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 서윤의 곁에 함께 주저앉아 느리게 등을 토닥였다. 서윤아 울면 머리 아파. 그만 울어. 응? 다 내 잘못이다 싶어서 영빈은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재윤이 오기 전에 미리 전화라도 할걸.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서윤아, 나한테 형이랑 누나가 있는데. 얼마 전에도 이렇게 갑자기 찾아왔다가 우리가 너무 놀랐었어. 그래서 내가 많이 울었거든. 재윤이가 그걸 봐서 그래. 너한테 화난 게 아니고, 그냥 너무 놀라서 그런 거야. 너랑 내가 다 다칠까 봐."

 

영빈이 거실 탁자에서 티슈를 뽑아 서윤의 손에 쥐여주고 찬찬히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이었다. 영빈의 말에 재윤이 놀라 어깨를 잡아 쥐자 영빈은 검지로 제 입술 위를 톡톡 두드렸다. 너 조용히 해. 얘 다 알아. 벙긋거리는 영빈의 입 모양을 읽은 재윤이 두 눈을 크게 떴다가 상황파악을 한 듯 서윤의 앞에 앉아 눈높이를 맞추었다. 아,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데. 엉망진창인 머릿속을 정리할 수가 없어 턱턱 막히는 숨에 심호흡을 하는 동안 서윤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초인종이 울렸다.

 

주문하신 햄버거 왔습니다-

 

아, 살았다. 영빈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햄버거 먹고 다시 싸우자, 나 배고파."

 

탁 풀린 긴장에 영빈이 뒤로 벌러덩 누워 항복 선언을 하자 재윤도 서윤도 영빈에게 시선이 꽂혔다. 꼬르륵- 종일 굶고 있던 서윤의 배에서 우렁찬 소리가 들리면 작게 한숨을 쉰 재윤이 코트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내가 계산할게.

 

그럼 영빈이 박수를 짝짝치며 거실 테이블 위를 깨끗하게 치웠다. 사람이 감정변화가 격할 땐 자거나, 먹거나. 그 둘 중 하나만 해도 일단 상황이 좋은 방향으로 돌아간다는 걸 영빈은 알았다. 먹자, 일단 먹고 해. 그다음엔 울든 지지고 볶든 안말릴 게. 사실은 말릴 거지만 어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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