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되는 사이

그래도 되는 사이 07

가장 하고 싶은 말

폭죽, 고깔모자, 풍선, 꽃가루 아기자기하고 예쁜것들을 모두 제치고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한 가지를 꼽으라고 하면 다수가 케이크를 고를 것이다. 부드러운 생크림, 진한 초코무스, 달콤한 고구마. 케이크의 달콤함은 꼭 마법 같아서, 아무 것도 아닌 날도 케이크에 초 하나만 꽂으면 근사한 날을 만들 수 있으니까. 그리고 영빈의 눈에 재윤은 충분히 마법 같은 케이크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되는 사이 07

재윤 x 영빈

W. 갈피


 

"어떻게 제빵을 시작했어?"

 

케이크 시트에 시럽을 바르고 생크림을 아이싱하는 재윤의 막힘없는 손놀림을 넋 놓고 바라보던 영빈이 베이킹룸의 한 켠에 앉아 두 손에 턱을 괴고 한창 집중한 재윤에게 물었다. 깔끔하게 마무리를 더한 생크림 위에 짤주머니 팁을 확인하던 재윤이 어린애처럼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제 연인을 보고 그 모습이 귀여워서 함박웃음을 짓다가 골똘히 생각했다. 왜? 어쩌다가 시작했냐고? 그런 동기를 생각해 본 건 오랜만이었다.

 

"나이 차이가 좀 나는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걔가 케이크를 엄청나게 좋아해서. 나 중학교 때 한창 케이크 만드는 샵 유행했었는데, 그 왜 다 만들어진 퍽퍽한 시트에 생크림 대충 올라가 있고 데코만 하면 되는. 그걸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줬는데 애가 엄청 좋아하는 거야. 오빠가 만든 케이크 너무 맛있다고."

 

재윤이 다시 생각해도 그건 정말 맛이 없었다. 데코도 엉망진창에 코코아 가루가 어지럽게 흩어진 형편없는 케이크를 놓고 가족들이 둘러앉아 작은 초 10개를 꽂고 노래를 불렀다. 부모님도, 심지어 직접 만든 재윤도 두세입 먹다가 포크를 내려놓을 정도로 별로였던 케이크는 고작 열 살짜리 어린 동생이 입가에 잔뜩 크림을 묻히며 두 조각이나 먹는 바람에 꽤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동생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르던 6살 꼬마는 갓 태어난 제 동생이 눈도 못 뜨고 빨갛게 부르터 있는 걸 아빠 품에 안겨 유리 벽 너머로 확인하고 나서 너무 못생겼다고 엉엉 울었다. 그 애가 뽀얗게 살갗을 말리고 동그랗고 검은 눈을 깜빡이며 축축한 손으로 재윤의 손가락을 꼭 쥐었을 땐 너무 작다고 엉엉 울었다. 어릴 적부터 무던하고 잘 울지도 않던 순한 아이였던 재윤은 동생이 태어나고는 거의 매일같이 울었다. 대게 제 동생이 작고, 여리고, 예뻐서 터트린 눈물이었다. 동생을 병원에서 데리고 나오는 날 아빠는 작은 딸기 케이크에 촛불을 붙여 엄마와 재윤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동생의 첫돌도 집에서 식구들끼리 2단 생크림 케이크를 쌓아놓고 노래를 불렀다. 그전까지 촛불은 전부 재윤의 차지였지만 7살부터는 동생에게 그 촛불을 모두 양보했다. 멋진 오빠가 될 거야! 6살 가을부터 재윤의 꿈은 그것뿐이었다.

 

재윤은 5살 터울의 어린 여동생이 엉엉 울다가 아빠가 꺼내온 케이크 상자만 봐도 눈물을 뚝 그치는 걸 보고 우와하며 감탄하곤 했었다. 그리고 제가 만든 멋도 맛도 없는 엉망진창인 케이크를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말해주는 동생 덕분에 진로까지 일사천리로 정했다.

 

"그래서 나는, 형님이랑 누님이 내가 마음에 안 들었대도 솔직히. 이해 가더라. 나한테 그렇게 막 대하셔도 좀, 상처는 덜 받았어. 형이 상처 받을까 봐 그게 걱정이었지."

 

짤주머니 끝에서 재윤이 힘을 주는 대로 퐁퐁 나온 크림이 가장자리부터 부드럽게 케이크를 감싸 모양을 만들었다. 크림이 나오는 짤주머니 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빈이 생각지도 못하게 제 형제들을 언급하는 재윤에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닌 척했지만, 영빈은 그날부터 재윤에게 퍽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 형의 격렬한 반대와 누나의 미지근한 지지는 점점 영빈이 재윤에게 가지는 감정들을 소극적으로 만들었다. 영빈은 도록도록 눈알을 굴리면서 재윤의 눈치를 살폈다. 재윤은 무표정이었지만 이따금 고개를 들어 영빈과 눈이 마주치면 사르르 웃었다. 사랑스러워. 영빈은 그때마다 헤벌쭉하게 웃었다.

 

"미안할 필요 없어. 같은 상황이었다면 우리 집도 뭐 그렇게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이진 않았을 테니까."

 

자기도 모르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들켜 괜히 어깨를 움찔한 영빈이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케이크 위에 딸기를 데코 하는 재윤의 얼굴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숙여 아래에서 위로 재윤의 얼굴을 확인했다. 우리는 가져선 안 되는 감정을 이어가고 있는 걸까. 염려가 가득한 영빈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재윤이 고개를 숙여 그대로 영빈의 입술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나는 형이 나 올려다볼 때가 제일 귀엽더라. 다행이야 내가 형보다 키가 커서."

 

"...울지 마. 버리지 마. 나 두고 가지 마."

 

"형이나."

 

마주 보는 재윤의 두 눈이 순하게 휘었다. 영빈은 재윤과 함께 있는 매 순간이 신기했다. 연애를 안 해본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나 애틋하고 몸이 달았던 적은 없었다. 집에서도 카페에서도 24시간 딱 붙어 지내는데 봐도 봐도 질리질 않았다. 벌써 재윤을 만난 지 꼬박 반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여전히 마냥 좋았다. 이런 감정이 과연 식을 순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었다.

 

"이래서 결혼하나 봐.“

 

"응?"

"예전에 누나한테, 매형이랑 왜 결혼을 결심했어? 그랬더니 그냥 보고 있으면 아 얘랑 결혼해야겠다. 얘가 내 짝이구나. 하고 알았데."

"그냥?"

"응. 우리 누나 연애 진짜 오래 했거든? 5년? 근데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데. 바로 어제까지도 남자친구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남편으로 보였데."

 

영빈은 눈을 크게 깜빡이면서 재윤을 올려다보다가 재윤이 데코를 하고 남은 딸기를 손가락으로 콕콕 가리켰다. 이거 먹어두 돼? 무언으로 묻는 말에 재윤은 사르르 웃으며 짤주머니에 남은 생크림을 딸기 그릇 옆에 꾹 짜 딸기 하나에 크림을 찍어 내밀었다. 와아- 센스있는 재윤의 행동에 감탄을 뱉은 영빈의 입이 삐약 벌어지면 재윤의 손이 작은 입에 딸기를 쏙 넣어주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자각하지 못한 느낌이라 재윤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지금 결혼하자고 말한 거 아닌가? 듣는 애인은 심장이 철렁했는데 폭탄 발언을 던진 당사자는 느긋하게 크림 더 짜줘!! 하고 그릇 위를 톡톡 두드렸다. 딸기를 먹느라 입술이 반들반들 붉은 물이 들어 커다란 앞니가 더 도드라졌다. 진짜 토끼도 아니고.

 

크림을 좀 더 짜주자 신이 나서 콕콕 찍어 먹는데 몇 개나 넣었다고 빵빵해진 볼이 귀여웠다. 입안이 좁아서 금방 꽉 차는 두 볼이 꼭 햄스터 같기도 했다. 영빈은 먹이는 재미가 있는 사람이었다. 입이 짧고 편식이 심한 편인데 욕심은 많아서 식당에 가서도 배달음식을 시킬 때도 여러 가지를 한 번에 시켜놓고 한입씩만 깨작거리다가 입맛에 맞으면 반쯤, 그마저도 제 입맛에 영 아니다 싶으면 한번 손대질 않았다. 그래서 재윤은 영빈과 함께 살면서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원래도 못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외국에 나가 산 지 오래라 한식 같은 건 영 꽝이었는데 어쩌다 이것저것 해먹이면서 영빈에게 맛있다! 하는 소리 한 번을 들으면 그게 그렇게 뿌듯했다.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조금씩 영빈의 양에 맞게 집에서 해 먹는 편이 버리는 것도 적었다. 형인 척은 혼자 다 하면서 혼자 편하게 살아 그런지 이런 데선 꼭 동생처럼 투정이 심했다. 형이랑 누나가 날 이렇게 키웠어! 하고 뻔뻔하게 말하는 조그맣고 뺀질한 막내의 얼굴이 퍽 귀여워서 재윤은 영빈을 앞으로도 이렇게 키울(?) 생각이었다.

 

어리광을 부리는 영빈을 보면 5살 터울의 여동생을 능숙하게 돌봤던 이재윤의 오빠 자아가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다. 참 보살펴주고 싶은 사람이라며 재윤이 웃었다. 그래서 지금쯤은 말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마침 영빈도 같은 생각을 한 김에.

 

"영빈아."

"응?"

 

"결혼할래?"

 

"...어...?"

"형이 나한테 먼저 프로포즈 한 거 알지?"

 

내가 먼저? 재윤이 건넨 말이 무엇진지도 깨닫기 전에 제가 먼저 프로포즈를 했다는 말에 미간을 좁혔던 영빈이 조금 전에 대화를 떠 올렸다. ‘이래서 결혼 하나봐.’라고 했던 말.

 

딸기를 오물오물 씹던 입이 정지화면처럼 멈췄다. 입술 가에 크림이 묻은 건 아는지 모르는지 꿀꺽- 다 씹지도 않은 딸기를 그냥 삼킨 영빈이 켁켁 거리다가 입을 틀어막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일단 이 자리를 피하자는 생각에 베이킹룸을 돌아 나가려는데 재윤이 영빈의 팔을 붙잡고 뒤에서 와락 껴안아 품에 가뒀다. 으아아, 재윤아 제발 나 놔주면 안 돼? 나 지금 너무 부끄러운데. 영빈이 몸을 배배 꼬며 칭얼거렸지만, 재윤은 들은 척도 안 했다.

 

형은 맨날 자기가 무슨 말 했는지도 모르고 폭탄 발언하더라. 재윤은 영빈의 목덜미에 고개를 얹고 귓바퀴 뒤쪽에 입술을 문질렀다. 뜨끈뜨끈하네. 불타는 고구마네 김영빈이. 재윤이 놀리듯 귓가에 속삭이자 간지러운 느낌에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영빈이 오소소 돋은 소름이 가라앉을 때까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고개를 팩 돌려 재윤을 노려봤다.

 

"너는 무슨 프로포즈를 이렇게 멋없게 해?"

"딸기 먹다 입술에 크림 묻히고 프로포즈 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왜 멋없게 못 해?"

 

영빈의 입술 가에 쪽 뽀뽀하며 크림을 핥은 재윤이 혀끝에 묻은 크림을 영빈에게 메롱 보여주고 큭큭 웃었다. 놀리는 투가 명백해서 영빈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진짜 이럴 거냐고 발을 동동 굴렀지만 재윤은 딱히 동요하지 않고 영빈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다시 물었다.

 

"결혼해준다고 하면 놔줄게."

 

재윤은 순해 보였지만 보이는 것만큼 고분고분한 타입은 아니었다. 은근히 고집도 세고 짓궂은 면이 있었다. 잠자리에서도 매번 힘들어하는 영빈을 배려 없이 몰아붙이고 관계가 다 끝난 다음에야 다정하게 눈물을 닦아주곤 했다. 하고자 하는 건 밀어붙여야 하는 사람이고 불같이 타오를 줄도 아는 사람이지만 영빈에 관해서 만큼은 다정과 배려로 그 모든 본심을 억누르고 있는 거라고 했다. 그게 가끔 이렇게 터져 나오면 영빈은 100이면 100 자기가 지는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꼭 이럴 때만 고집부리지."

 

자꾸만 얼굴을 아래로 내려 영빈의 얼굴에 입을 맞추려는 재윤 때문에 영빈은 고개를 이리저리 피하다가 허리가 반이나 넘어가 있었다. 울긋불긋 달아오른 얼굴로 이내 힝힝거리며 재윤의 목에 영빈이 답싹 매달리면 씨익 웃은 재윤이 결혼해 줄 거야? 하고 물었다. 이렇게 막무가내에 멋없는 프로포즈가 어디 있냐며 영빈이 툴툴거렸다. 거절은 애초부터 생각도 안 했지만, 그냥 부끄러워서, 좋아서, 사랑스러워서. 한참이나 대답을 미루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멋없는 프로포즈에 마지못해 하는 대답 같았지만 서로는 알고 있었으니 그만이었다.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오랜 고민 끝에 던진 프로포즈였고, 터지는 울음을 겨우 참아낸 애정이 어린 대답이었다는 걸 재윤도 영빈도 알았다.

 

어차피 결혼이라고 해봤자 지금, 이 상황에서 뭘 더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둘은 이미 함께 살고 있고 서로의 가족에겐 언제까지고 독신으로 남은 채 서로의 존재를 비밀로 하기로 했다. 함께 사는 사람이라고 소개는 하겠지만 그 이상의 관계는 본인들 입으로 말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고, 영빈의 형제들을 만나고 나서 그렇게 약속했다.

 

긴 시간을 함께 보냈어도 가족조차 타인이라는 사실을 너무 생생하게 느낀 탓이었다. 영빈의 누나처럼 그저 이해만 해줘도 고맙고, 사실 형처럼 끝끝내 이해는 못 해주지만 그저 보고만 있는 것도 감사했다. 언젠가는 들키게 되더라도 그게 좀 더 둘 사이가 단단해진 다음이라면 상처를 받아도 치유가 좀 더 빠르지 않겠냐며 철없이 웃었다. 시간이 오래 흘러도 우리가 원하는 답이 이별은 아니라면 둘이 함께 해결책도 없는 질문에 고민하기보단 둘이 함께 가족들을 외면하자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우리 연애가, 우리의 마음이, 우리 관계가 타인으로 인해 흔들리기를 원치 않았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동거인 신청이면 충분하겠냐면서 눈물을 찔끔 흘린 영빈을 품에 꼭 안은 재윤이 그냥 예스라고 대답해. 하고 덧붙이면 영빈은 한참 만에 코 먹은 소리로 엉엉 어린애처럼 울면서 대답했다. 좋아!! 그 우렁찬 대답 소리에 이제 막 출근했던 인성이 베이킹룸을 열어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발 카페에 나와선 일만 할래? 연애는 집에 가서 해, 이 바퀴벌레들아."

 

너 나중에 애인 생기면 카페 출입 금지할 거라고 영빈이 돌아 나가는 인성의 뒤통수에 울먹이며 욕을 한 사발 들이부었다. 사내연애 절대 금지라고 김인성이 장난스레 대꾸하는 걸 재윤이 조용히 웃으며 바라보다 발끝으로 문을 밀어 닫고 영빈과 키스했다.

 

***

 

가면 언제 온다고 했지? 나갈 준비를 마친 재윤을 배웅하러 현관 앞에 선 영빈이 입을 삐죽 내밀고 축 처진 눈꼬리를 한껏 늘어뜨리며 물었다. 와 형 이카면 내 진짜 가기 싫은데. 재윤이 마찬가지로 축 처진 순한 눈꼬리를 애써 올려 웃으며 영빈의 허리를 감싸 당겨 품에 안고 뺨에 가볍게 뽀뽀를 남겼다. 통통하고 말랑한 재윤의 입술이 뺨에 닿아 쪽쪽 소리를 내자 영빈이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러니까 진짜 신혼부부 느낌 난다 그자? 가라앉은 기분을 띄워주려 노력하는 재윤에 영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한숨을 쉬고는 나름 가볍게 웃었다.

 

"오늘 가면 주말에 올라온다. 그때까지 제발 밥 좀 잘 먹고 살 1킬로라도 빠지면 진짜 가만 안 둔다, 알겠나?"

 

그렇게 아끼는 여동생의 생일이라는데 기쁜 마음으로 보내줘야지 싶다가도 재윤이 이 집에 들어오고 나서는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어서 정말 생이별 느낌이라 영빈은 며칠 전부터 안절부절못했다. 너 없으면 나 밥도 잘 못 먹고 잠도 잘못 잘 텐데, 속으로 평소처럼 징징거리고 싶은 걸 이제 곧 떠나야 하는 사람이라 꾹 눌러 삼켰다. 그래도 한 살 연상인데 연하한테 그런 말은 속된 말로 좀 뭐가 팔렸다. 정말 재윤이 절 먹이고 재우고 키우고 있다고 해도 이번엔 어른스러운 티 좀 내보자며 영빈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슥슥 문질렀다. 그게 더 아쉬운 티가 나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눈치라 재윤은 그냥 기분 좋게 웃었다.

 

"나 없는 동안 그 이상한 손님 또 오면 어떡하라고?"

"애인은 없는데 배우자는 있구요, 3살짜리 애도 있어요!"

 

엄한 척은 다 하는 정색한 얼굴로 재윤이 묻자 영빈은 벌써 스무 번도 더 외운 멘트를 줄줄 읊었다. 재윤이 연습시킨 멘트지만 늘 그렇듯 영빈이 하는 말에 거짓말은 별로 없었다. 실제로 옆에 애를 끼고 있긴 했다. 스무 살은 집에 두고 다니는 질투 많은 연하 애인. 그리고 이젠 배우자가 된 사람.

 

영빈을 마음에 뒀다고 팍팍 티를 내던 그 남자는 참 지치지도 않고 카페를 찾았다. 차마 돌려보낼 순 없어서 주문은 받았지만, 영빈은 이제 드립 커피를 바가 아니라 주방 안에서 내렸다. 물론 그 남자 한정이었다. 남자가 오는 시간대는 딱 정해져 있는 탓에 주문도 물론 인성이 대신 받았다. 직접 고백이라도 하면 거하게 거절해 줄 텐데 흔한 상황이 아닌지라 남자는 딱히 티를 내면서도 고백 비스무리한 것도 영빈에겐 건네지 못했다. 재윤은 속이 탔고 영빈은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재윤이 없는 틈에 남자가 혹시라도 들이대거든 확실하게 거절하기로 약속했다.

 

당부에 당부를 더 하는 재윤에게 기차 시간 늦겠다며 영빈이 등을 떠밀었다. 벌써 현관에서만 30분이 넘었다. 마지막으로 제 입술에 입을 맞추고 꼭 출장 가는 남편처럼 커다란 캐리어를 들고 부산으로 떠나는 재윤의 등 뒤에서 문을 열고 살랑살랑 손 인사를 더 했다. 그러다가 금세 엘레베이터 앞까지 쫄랑쫄랑 쫓아가 하루 한 번은 꼭 연락해! 하는 말까지 미련 뚝뚝 남기며 보내고 나서는 왠지 기운이 쭉 빠졌다.

 

재윤이 부단히 연습시킨 멘트에도 불구하고 디저트 파트가 비어버린 카페는 강제 휴무를 선언 했다. 사실 카페를 열고 나서 정기 휴일을 정하지 못해 한 번도 쉰 적이 없어서 이참에 메뉴 재정비도 하고 리뉴얼도 해서 정기 휴일도 잡고 초기에 준비 못 한 것들을 구비 하자며 인성이 아예 일주일 휴무를 띄웠다. 이렇게 갑자기 그런 공지를 내려도 돼? 정작 재윤을 보낼 준비가 안 된 영빈이 물으면 인성은 어, 돼. 내가 점주잖아. 하고 태연하게 대꾸했다. 공동이잖아! 하고 버럭대는 영빈에게 인성은 운영은 나보고 알아서 하라던 김영빈 어디 갔냐며 콧방귀를 뀌었다. 이재윤 없는데 일도 못 하게 하면 나는 그 일주일을 어떻게 보내라고 참 잔인도 하다며 울상인 영빈에게 단호박보다 단호하고 냉정하게 그건 내 알 바 아니, 라고 인성이 얄밉게 어깨를 으쓱였다. 저거 진짜 연애만 하면 훼방 제대로 놓을 거라고 영빈은 잔뜩 별렀다.

 

꼬박꼬박 연락하겠다던 재윤은 정말 시간마다 셀카와 함께 제 위치를 보고했다. 지금은 어디 지났고 좀 자다 인났다. 형 보고 싶은데 나도 형 사진 좀 보내도. 형이 싸준 커피 벌써 다 마셨다. 아 벌써 보고 싶다. 이제 다 와 간다. 여동생이 마중 나와 있겠다고 했는데 역에 와 있단다. 도착하고 부모님 뵈면 연락 좀 뜸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내 꼬박꼬박 할려고 노력할게. 밥은 챙겨 묵었나? 내 없다고 굶으면 진짜 가만 안 둔데이? 냉장고에 형이 좋아하는 반찬 다 담아 놨으니까 꼭 단디 챙겨 무라. 알았나?

 

여기서 더 마르면 섹스할 때 뼈 부딪혀가 아프다.

 

마지막 톡의 내용이 어마어마해서 영빈이 또 벌게진 얼굴로 이재윤 못 말린다며 빵 터져 깔깔 웃었다. 몇 번 주고받은 셀카가 벌써 열 장을 넘었다. 나중에 혼날까 봐 밥 먹고 있다고 인증 샷도 남겼는데 한 공기를 다 먹진 못해서 사진은 좀 조작을 더 했다. 재윤이 없으니까 입맛이 없었다. 부모님을 만나면 연락이 뜸할 거라더니 부산역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마지막으로는 그 날 잠이 들 때까지는 연락이 없어 좀 서운했다. 재윤의 잘 자라는 연락을 기다리다가 새벽 2시가 조금 넘어 잠이 든 영빈은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확인한 핸드폰에 여전히 연락이 없는 걸 보고 어라? 싶었다.

 

-먼저 전화해.

”괜히 가족들이랑 있는데 내가 방해 할 수도 있잖아.“

-그럼 카톡이라도 남겨

”카톡은 벌써 남겼지. 근데 확인도 안해.“

-... 이제 고작 하룬데 뭐 좀 있음 연락 오겠지.

”...그렇겠지?“

 

이럴 땐 또 전화할 사람이 김인성뿐이었다. 그래도 이런 고충을 토로할 데가 있긴 하다는 게 좀 위로였다. 재윤이 집에 다녀온다는 말을 듣고 시무룩한 영빈을 아닌 척 꽤 신경 썼던 인성이라 하루도 안 돼서 ‘이재윤이 연락이 없어.’라는 영빈의 다 죽어가는 전화는 차마 씹지 못했다. 근데 너도 알겠지만 내가 너한테 연애상담이고 뭐고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잖아. 인성이 이렇다 할 해결책을 주지 못해 풀이 죽은 영빈에게 조금 망설이다가 말하자 영빈은 맞아, 나도 알아, 너 연애 고잔 거. 진짜 고자 아닌지는 내가 확인할 방법이 없다만 부디 너도 이른 시일 내에 연애를 시작하길 바랄게. 하며 또 텐션이 바닥을 기는 와중에도 인성을 놀려댔다.

 

서로의 치부를 들추며 인성과 대거리를 주고받다가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낄낄 웃으며 끝난 전화는 조용한 집안을 더 확 느껴지게 했다. 애써 긍정적으로 재윤이 없는 하루를 만끽해볼까 했지만, 이재윤 없을 때 난 뭐 하고 놀았지? 하는 생각 끝이 계속 모르겠다, 기억 안 나. 로 끝나는 바람에 또 기운이 쭉 빠졌다. 녹아내린 치즈처럼 소파와 하나가 된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커피나 내려 볼까 싶어 아일랜드 식탁으로 향했다가 재윤이 남겨 놓고 간 마들렌에 다시 시무룩해져 그저 식탁 위로 다시 늘어졌다. 조가비 모양으로 겉면이 반질반질하게 코팅된 마들렌은 재윤이 영빈에게 아침마다 만들어 주던 것이라 그냥 아, 오늘 아침 안 먹었네. 하고는 다시 재윤을 떠올렸다.

 

이재윤이 완전 김영빈을 바보로 만들었어. 진짜 사육을 했네. 연인 사이에는 거리감이 있어야 하고 자기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뺵빽 거리던 그 바보 어디 갔지? 영빈은 이러는 제가 정말 적응이 안 돼 미칠 지경이었다. 내가 원래 이렇게 구질구질하고 질척이는 타입이었나? 싶어서 종일 집안에서 재윤의 흔적을 찾아 굴러다니다가 결국 그 날도 새벽 두시 쯤, 잠이 들었다.

 

 

-RRR

 

방해금지모드는 사치였다. 새벽에라도 재윤이 전화하면 당장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었다. 밀당 그게 뭔데? 지금 영빈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게 뭐든 이재윤이 준 신호라면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게 새벽 3시가 다 넘어서 올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드디어 3일 만에 ‘윤’이라는 한 글자가 제 핸드폰 모니터에 떴다는 사실이 그저 행복해서 자다 말고 반쯤 감은 눈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재윤이야?“

 

엉망진창으로 다 가라앉은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가면 영빈은 본인 목소리에 본인이 놀라 큼큼 목을 잡고 목소리를 풀었다.

 

‘내가 형 깨웠지, 미안타.’

”아니, 아니야. 괜찮아. 가족들이랑은 잘 지내고 있어?“

‘동생이 핸드폰만 뻔질나게 본다고 핸드폰 뺏어가가 숨기는 바람에, 동생 잠들 때까지 기다린다고 시간도 못 보고 내 막 전화했다. 미안.’

”아아...“

‘형 화났나?’

”아니이... 화난 게 아니라아...“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말꼬리가 늘어났다. 연락이 안 돼서 걱정했다. 참다못해 김인성한테 하소연도 했다. 전화하고 싶었는데 가족들이랑 시간 방해할까 봐 못했다. 나는 네가 없는 하루가 너무 엉망진창이었는데 너는 어땠냐, 좀 더 빨리 올 순 없냐... 등등등 재윤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텅 비워졌던 머릿속이 뒤죽박죽 뱉을 수 없는 말들로 가득했다. 그래서 꾹꾹 눌러 삼킨 말들을 딱 한마디로 대신했다.

 

”보고 싶어.“

‘어?’

”보고싶다. 이재윤. 너무.“

 

침대 위에 풀썩 쓰러져 재윤의 베개를 꼭 끌어안은 영빈이 세상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 보고 싶다, 재윤아. 그냥 세상 애틋하게 네가 보고 싶다, 재윤아.

 

”사랑해.“

 

그것보다 하고 싶은 말은 없어서 영빈은 그냥 새벽이 다 가도록 그 말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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