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되는 사이

그래도 되는 사이 06

우린 오늘 밤도,

기억력이 좋다는 건 여러모로 유용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드문드문 오던 손님을 기억해 두었다가 자주 먹던 메뉴를 미리 말해서 나는 당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인식으로 단골을 늘리거나 하는 일 따위가 그랬다.

 

그러나 인성과 영빈은 그다지,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손님이 밀릴 때는 주로 포스기에 의존해 사람의 얼굴보다는 메뉴를 외웠고 어차피 스쳐 지나갈 사람들의 얼굴은 기억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맡은바 성실한 것과는 별개로 딱히 사람 사이 관계에 관심이 없다는 표현이 더 맞아 보였다.

 

인성은 가벼운 인간관계라면 질색하는 사람이었고 영빈은 가벼워질 관계라면 곁을 주지 않는 타입이었다. 카운터에 번갈아 앉아 있는 공동 창업주들의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재윤은 가끔 저러다 메뉴 사고라도 치면 컴플레인 받는 거 아닐까 걱정했지만, 용케도 사람과는 달리 메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외워서 시킨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메뉴가 잘못 나가는 불상사는 없었다. 그래, 시간이 지나 요령이 생기면 나아지겠지. 장사는 요령이라고 했다. 직접 서빙이나 카운터를 볼 일이 없는 재윤은 그나마 입소문을 믿었다.



그래도 되는 사이 06

재윤 x 영빈

W. 갈피


 

아예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었다. 카페 '그라치오소'는 두 개의 여고를 중간에 끼고 갈림길에 있는 아주 좋은 명소였고 버스로 한 정거장 사이에는 여대도 있었다. 손님의 9할은 여성이었고 그중 대게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이라는 소리였다. 그녀들은 다소 삭막한 카페의 간판에 발길을 돌리다가도 때를 맞춰 카페 앞에 나와 어닝을 펼치는 카페의 젊은 점장님이나 여름 신메뉴 포스터를 아기자기하게 꾸며 유리 벽에 붙여 놓는 이 카페의 바리스타를 보면 저절로 걸음을 멈추고 여기 가볼까? 하며 일행에게 답이 정해진 질문을 던졌다. 거기다 카페 안에 들어가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디저트를 쇼케이스 밖으로 한참이나 구경하다가 빈자리를 정리하는 제빵사를 만난다면 다음날도 다음다음 날도 출근 도장 찍게 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잘 생겼어요."

"네?"

"여자친구 있으세요?"

 

더러 당돌하게 물어오는 손님들을 마주하면 초반에야 좀 당황했지만 이젠 생긋 웃고 말았다. 여자친구'는' 없어요. 영빈은 꽤 뻔뻔하게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 얼굴 외우는 요령은 모르겠고 단골을 늘리는 요령은 확실히 늘었다. 방법이 좋은지는 그다지 모르겠으나 확실히 근래 얼굴이 익숙한 손님들이 늘었다. 결과는 확실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맞으시죠?"

"아, 네."

 

여자친구가 없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재윤이 여자는 아니었으니까. 회피를 위한 대답들에 다수가 행복해하면서 돌아갔으니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더러는 그냥 여자친구가 없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고 돌아가는 편이었으니 영빈에게도 별로 나쁠 건 없는 거짓말이었다.

 

 

"저, 애인 있으세요?"

 

최근엔 이런 손님이 없다, 했는데 이번엔 아주 가끔만 카운터를 보는 재윤마저 알 정도로 자주 오는 손님이었다. 직장이 이 근처인 듯 오픈 이후 정말 매일 같이 이른 점심 즈음에 팔을 두어 번 걷어붙인 하얀 셔츠에 사원증을 걸고 찾아오시는 손님이었다.

 

섭씨 34도, 가을에 접어들었으나 늘 그렇듯 이상 기온은 기승이었다. 최근 들어 가장 더운 날 중 하나라 디저트보단 음료 손님이 많았다. 덕분에 영빈과 인성이 홀과 주방에서 풀로 뛰는 중이라 재윤이 제빵 복을 입고 카운터로 뛰어든 시점이었다. 오전 11시 45분. 이런 날, 이런 때에 이 손님은 늘 영빈이 직접 내려주는 핸드드립 커피만 마신다는 걸 재윤마저 알고 있었다.

 

"저요?"

 

아주 드물게 카운터에 서 있는 사람이라 재윤은 대뜸 제게 잔뜩 수줍은 얼굴로 애인의 유무를 묻는 이 손님이 퍽 당황스러웠다. 무엇보다 그가 남자였기 때문에 더 그랬다. 거기다 돌아오는 대답은 더 당황스러웠다.

 

"아뇨, 그…. 여기, 바리스타님이요.“

 

숨소리마저 죽인 남자가 카운터 너머 재윤에게 고개를 숙여 다시 애인의 유무를 물었다. 바리스타 '김영빈'의 애인 유무를. 재윤은 순간 구겨지는 미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입꼬리가 가파르게 파르르 떨리는데 남자는 눈을 내리깔고 수줍음에 몸을 베베 꼬는 중이라 재윤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어, 오늘도 오셨네요? 오늘도 더블에이(AA)시죠?"

 

뭐라고 입을 떼려는 순간 홀을 정리한 영빈이 카운터로 돌아와 익숙한 얼굴의 손님에게 꽤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그의 얼굴과 그가 자주 먹던 메뉴까지 전부 기억하고 미리 포스기의 메뉴를 꾹 누르면서.

 

"재윤아 너 이제 들어가. 여기 내가 있을게."

 

결국, 한마디도 못 한 재윤이 입을 다물고 뒤로 밀려났는데 영수증을 건네는 영빈과 손을 겹친 남자가 어이쿠 죄송해요. 하고 능글맞게 웃었다. 재윤의 눈에는 속이 뻔히 보이는 수작질이었지만 매장이 워낙 바쁜 탓에 영빈은 신경도 안 쓰고 가볍게 웃으며 카운터로 돌아오는 인성과 바톤 터치를 하고 핸드드립을 내릴 준비를 하러 바로 들어섰다.

 

"너 여기서 뭐 해?"

"...저 남자 맨날 저기 앉아 있나?"

"아, 어어, 직장인이면 점심시간 빠듯할 텐데 커피 엄청나게 좋아하나 보더라. 맨날 핸드드립 시켜서 바에 찰싹 붙어 있어."

 

"형은 저게 커피 보는 거로 보이나?"

"어?"

 

손님은 끝없이 밀려들었다. 디저트도 손님이 전혀 없지는 않아서 벌써 쇼케이스에도 군데군데 빈 곳이 보였다. 카운터 벽에 바짝 붙어 우두커니 서 있는 재윤에 인성이 다음 손님을 받으며 시선은 정면에 두고 재윤의 물음에 대충 눈을 힐긋대며 말했다. 재윤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게 들리자 인성은 손님에게 카드를 돌려주며 다음 손님이 없는 걸 확인하고 그제야 재윤이 눈으로 불태울 듯이 쳐다보는 손님을 다시 확인했다.

 

그라인더에 갈아낸 원두를 필터에 넣고 포트에 뜨거운 물을 받은 영빈이 원두를 적시고 거품이 올라오는 걸 기다리는 중이었다. 바에 기댄 남자와 사담을 주고받으며 간간이 웃어 주긴 했지만, 인성과 재윤은 확연히 알 수 있는 영업용 미소였고 예의상 손님을 응대하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반면 커피를 기다리는 손님은 퍽, 행복해 보였다. 누가 봐도.

 

"저 새끼가 김영빈 애인 있냐고 물어보던데."

"...뭐?"

"오픈하고 하루도 안 빼먹고 와가 형들이랑 내도 다 기억한다 아이가, 점마 얼굴. 근데 김영빈이 저 새끼가 시키는 메뉴까지 전부 기억하더라. 얼마나 찝쩍거렸으면."

 

저 새끼, 점마. 인성은 재윤을 반년 넘게 봤어도 이렇게 거센 억양의 사투리와 단어 구사는 처음이었다. 지역색이 두드러지는 억양에 혼이 날아간 인성이 뭐, 무슨 말이야 싶어서 놀란 눈으로 재윤을 돌아보는데 그런 표정마저 처음이었다. 험악, 이란 단어가 문득 떠올랐다. 재윤의 말을 듣고 다시 돌아본 남자는 누가 봐도 명백하게 영빈에게 구애의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헐, 인성이 입을 떡 벌리고 외마디 탄식을 뱉었다.

 

"이젠 남자도 꼬이네."

 

언젠가 김인성 인생에 더럽게 꼬인 남자를 보면서 김영빈이 던졌던 말이었다. 그 일로 인성과 영빈은 인간관계라면 신물을 올렸기에 정말 번뜩 그때의 생각이 떠오르면서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울렸다. 그때 그 말을 고대로 영빈에게 다시 돌려준 인성이 재윤의 어깨를 돌려 시선을 막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일단 이대로 저 장면을 계속 보게 하는 건 재윤의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을것 같았다.

 

"일단 오늘 영업 끝나고 해결하는 게 어때? 우리 오늘 영업 시작한 지 이제 두 시간 됐어, 재윤아."

 

언제나 허허실실 웃는 얼굴에 누구보다 다정하고 순한 녀석이란 걸 알고 있어서 더 무서웠다. 그냥 덩치 큰 백구 뭐 그런 건 줄 알았는데 도베르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투견, 사냥개 뭐 그런 사나운 개들. 재윤은 심호흡을 두어 번 했다. 저 상황에서 영빈의 응대가 틀린 건 단 하나도 없었다. 다만 저 남자가 너무 대 놓고 영빈에게 호감을 보였고 평소에 손님 개인에 관련된 무엇도 관심 없던 영빈이 저 남자의 얼굴만 보고도 메뉴를 줄줄 읊었다는 게 열 받을 뿐이었다.

 

핸드드립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커피였다. 커피는 내리는 시간이 풍미를 결정하고 전체적인 맛의 방향성을 잡아준다고 영빈이 그랬다. 남자는 그냥 만드는 데 오래 걸리는 커피를 골랐을 것이다. 가게를 처음 열었던 그때부터 영빈에게 알게 모르게 추파를 던졌을 거라고 생각하니 더 이가 갈렸다.

 

"영빈이한테 말하지 마. 오늘 집에 가서 내가 말할 거야."

 

재윤은 뭔가를 꾹꾹 눌러 삼키는 얼굴로 낮게 말했다. 말투는 다시 표준어로 돌아와 있었지만, 표정은 아까보다 험악했다. 와, 누구 묻으러 갈 거 같은데. 인성은 손끝을 파르르 떨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사랑싸움은 공사 구분해서 집에서 끝내고 와 줘. 제발.

 

***

 

쇼케이스 안의 디저트들은 오늘의 메뉴를 포함해서 총 6개 종류 정도였고, 두 달에 한 번씩 인기 메뉴를 제외하고 교체를 하는 편이었다. 하루 2번 소진 메뉴를 파악해 다시 채워 넣고 솔드아웃 된 메뉴들을 정리해 재고를 정리하다 보면 하루는 금방 뚝딱이었다.

 

다소 거친 느낌의 카페 간판은 밤이 되면 주황색으로 톡 떨어지는 핀 조명 아래서 조금 더 무드 있게 변했다. 저녁 장사에 들어서면 커피 손님은 하나둘 줄어들고 라떼나 디카페인 메뉴들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영빈은 좀 여유 있어 지는 편이었다. 몇 개 안 남은 재고를 파악하며 쇼케이스를 정리하던 재윤을 물끄러미 보던 영빈이 설거지를 막 마치고 카운터로 돌아가는 인성의 팔을 살짝 잡아끌었다.

 

"뭐야."

 

"뭐가?"

"재윤이 오늘 오후에 나랑 말 한마디도 안 했어."

"....그래?"

"눈도 안 마주쳐, 분위기 엄청 싸해. 넌 알잖아. 뭐야."

 

영빈은 촉이 날카로울 때가 있었다. 있어야 할 눈치는 없고 이런 눈치만 있나 싶어 인성이 혀를 차며 영빈의 손을 털어냈다. 재윤이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입을 다물어야 하나 싶다가도 마냥 영빈을 아무것도 모르게 내버려 두려니 걱정되기도 했다. 누가 뭐래도 20년 가까이 본 불알친구라는 건 결국엔 서로의 편인 거였다.

 

"누가, 너한테 재윤이 애인 있냐고 물으면. 너 어떨 거 같아?"

"뭐?"

"우리 손님 중에 너한테 그런 질문을 하면 말야."

 

"... 있다고 하겠지, 시발."

 

"... 그런 상황이야 지금."

 

영빈이 토끼 눈을 떴다. 안 그래도 커다란 대문니가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빼꼼 보이면 영락없는 토끼라 재윤이 아주 좋아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쉽게도 김인성은 이재윤이 아니라서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너 엄청 멍청해 보인다. 평소보다 배는 커진 영빈의 눈을 찌를 듯이 손가락으로 푹 찌르는 시늉을 한 인성이 재윤이 데리고 얼른 들어가, 마무리 내가 할게. 하고 어른스러운 척을 해대자 영빈은 고민도 없이 어, 그래. 고맙다. 하고 이제 막 허리를 편 재윤의 팔을 단단히 붙잡고 탈의실로 들어섰다.

 

어어, 영문도 모르고 갑작스레 영빈의 손에 이끌려 탈의실 문이 닫히자마자 쿵 소리와 함께 문짝에 등을 부딪친 재윤이 제 얼굴을 사이에 가두고 옆으로 턱 소리 나게 놓이는 영빈 두 손을 번갈아 두리번거렸다.

 

"뭐 하는 데."

"너야말로 뭐야."

"뭐가."

 

대화는 시작될 기미가 안 보였다. 둘 다 은근 고집이 센 탓이었다. 둘 다 눈꼬리는 순하게 쳐진 편이었지만 아무 말도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분위기가 꽤 매서웠다. 영빈은 인성이 말해준 재윤이 화난 이유가 제게 화를 낼 이유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누가 내가 좋데?“

 

"뭐?"

"너 말고 다른 사람이 내가 좋데? 근데 그게 내 잘못이야?"

"인성이 형이 말했나?"

"말 돌리지 말고."

 

재윤은 영빈보다 한 뼘은 키가 컸다. 그게 좀 불만이었다. 이렇게 화를 낼 땐 나도 좀 멋져 보이고 싶은데 재윤을 가두느라 얼굴 양옆으로 댄 손 때문에 만세 하는 것처럼 쭉 뻗은 손이 좀 야속했다. 누가 날 좋다고 하든 내가 그 사람을 좋다고 한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화를 내? 그게 내가 잘못이야? 그게 네가 날 종일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 한마디 안 건넨 이유야? 영빈은 천 마디 말을 담아 재윤을 있는 힘껏 쏘아보았다.

 

"그럼 내가 기분이 좋아야 되나? 여자도 아니고 남자가 형 좋다 하는데 거기다 대고 허허실실 내가 그칼 수 있나?"

"...남자?!"

"김영빈 니는 또 좋다고 웃어 주고 그 노마는 니 커피 내리는데 딱 붙어가 침 질질 흘려 쌌든데 내 막 좋아할까? 어?"

 

잠깐 잠깐만, 그렇게 사투리로 빨리 말하면 나 너무 정신없어. 영빈이 남자라는 말에 혼이 쏙 빠져 잔뜩 힘을 주고 있던 눈이 한풀 꺾이자 재윤은 이때다 싶어 랩을 하듯 다다다 그동안 서운했던 걸 전부 뱉었다.

 

김영빈 니, 왜 애인 있냐고 물으면 없다 카는데? 와? 내가 남자라서 어디 가 말하기도 그렇고 그래서 그러나? 그카면 내도 함 나가가 애인없다 뺑끼치고 딴 놈이랑 시시덕 거려도 되나?! 어이?! 내가 맨날천날 웃고 있다고 순 맹꽁이로 보이드나, 내는 뭐 니 그런 말 할 때마다 속이 좋은 줄 아나!

 

"내가 언제 애인이 없다고..."

"여자친구 없다카믄 벌써 얼굴 씨뻘게져 나가는 딸래미들이 한트럭이다, 그거 뭐 여자친구만 없다 칸다고 그 아들이 아 그럼 남자 친구 있나 보다 그 카는 줄 아나?! 니 그것도 나 역 멕이는 거다."

 

원래 사고도 틈틈이 치고 화도 틈틈이 내야 부글부글 끓는 물도 넘치질 않는 거라고 했다. 어느새 영빈의 어깨를 툭 쳐 반대편 벽까지 밀고 나선 재윤덕에 이번엔 완전 반대의 자세가 된 영빈이 앞은 재윤으로 뒤는 락커로 막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재윤의 눈치를 살폈다.

 

원래가 성격이 그랬다. 영빈은 숨겨두고 돌려 말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때그때 말하고 그때그때 고쳐야 나중에 뒤탈이 없다고 생각해서 자주 재윤에게 직구로 말했다. 이런 건 싫고 저런 건 좋아. 서로 적당한 프라이버시가 있는 건 좋고, 너무 구속하는 건 별로야. 사생활이 있는 사람들끼리 그렇게 한평생 살다가 갑자기 타인을 삶에 들인 거잖아. 연인이라고 해도 각자의 삶은 존중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영빈은 당시에 생각나는 말들을 곧바로 입 밖으로 꺼내고 잊는 타입이었지만 재윤은 아니었다. 영빈의 말마따나 20년을 넘게 다르게 살아온 두 사람이었으니 재윤이 영빈과 같을 수는 없었다. 재윤은 먼저 배려하는 타입이었다. 상대의 관점에서 상대가 되어 생각해보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자기 생각과 뜻이 다르면 말을 돌려돌려 언저리 즈음 제 생각을 표출했다. 혹여 상대가 상처받지 않을까 하면서.

 

둘 중 무엇도 틀리지 않았다. 그저 생각과 사고의 방식이 달랐던 것뿐이었다. 영빈은 원하는 바를 모두 말했고 재윤은 최대한 그걸 수용하며 내 의사는 조금 뒤로 미뤘다.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고, 참다가 인내심이 바닥이 나서 터져버리는 활화산처럼 우르르 영빈에게 감정을 토했다.

 

"야, 이재윤. 엿을 먹이다니 내가 거짓말을 한 것 도 아니고."

"내가 그 남자 때문에만 화가 났겠나. 형 그래 여자친구 없다고 말하면 그 여자들이 뭐라고 생각할지 모르고 그래 대답했나? 다 알면서 그래 대답한 거잖아."

 

나 상처받을 건 하나도 생각 안 하고.

 

영빈은 단 한마디도 못 했다. 입을 여는 순간 변명이고 회피가 될 것 같았다. 재윤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런 질문을 뱉은 사람들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영빈의 대답에 무슨 상상을 하며 돌아갔을 지. 모두 알면서도 그렇게 대답한 거였다. 그 순간 재윤의 생각을 하나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재윤이는 그래도 날 다 이해해 주겠지. 내가 이래도 상처 같은 건 안 받겠지. 전부 영업용인 걸 뻔히 알겠지. 지금까지 내가 하는 건, 전부 받아 줬으니까.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고 설득시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하물며 살 부대끼고 함께 산 형제간에도 그랬다. 다른 세월 십수 년 살아온 남남이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맞잡은 손은 일방적인 이해로만 유지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이번에야말로 재윤이 너무 상처받을 것 같아 입술을 계속 벙긋거렸다. 목구멍이 막힌 듯 나오라는 소리는 안나오고 입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재윤아... 나는..."

"내가 나 그렇게 착한 놈은 아니라고 했던 거 기억 하나?"

"..."

"욕심도 많고, 질투도 많은데 그것보다 애정이 더 많아가 그냥 참는 기다, 내도."

 

그래야 형이 날 더 좋아해 줄 거라고 생각해서.

 

숨이 막혔다. 헛숨을 들이킨 순간 와르르 무너진 재윤이 영빈을 품에 가득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답답 한 걸 싫어하는 영빈의 셔츠는 늘 단추가 2개씩 풀려 있었다. 덕분에 드러난 맨살 목덜미로 재윤의 눈가가 닿아왔다. 뜨끈하고 습했다. 영빈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두 팔을 들어 재윤의 등을 감싸 안았다.

 

"재윤아... 너 울어?"

 

말을 뱉는 영빈의 목소리도 달달 떨렸다. 아직 울지는 않았지만, 곧 울 것 같았다. 손을 얹어 놓은 재윤의 등허리가 작게 떨렸다. 어떡해, 어떡하지. 내가 널 울려 버렸어. 미안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응? 기어코 영빈이 울음을 터트렸다. 재윤아 내가 미안해, 형 너 많이 좋아해. 생각 안 한 거 아니야. 그냥 너는 다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너무 못 돼서 그랬어. 응? 울지 마. 내가 미안해애...

 

재윤이 쉬이 눈물을 그치지 않자 영빈이 발을 동동 구르며 훌쩍거렸다. 막 만나기 시작한 커플은 아무것도 아닌, 그냥 사소한 것으로도 하루에도 열두 번은 더 싸운다던데 영빈은 재윤과 딱히 다툴 일이 없었던 반년을 꼬박 돌이켰다. 그 긴긴 시간을 다 참고 있었던 거면 어쩌지. 재윤이가 지친 거면 어쩌지. 심장이 덜컹했다. 달달 떨리는 손을 들어 우느라 열이 오른 재윤의 양 뺨을 잡아 올렸다.

 

"나 좀 봐. 응? 나 봐봐 재윤아."

 

눈물이 얼룩져 엉망으로 번진 얼굴에 아래로 결을 따라 쏟아진 속눈썹이 젖어 있었다. 그것마저 예뻤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이렇게 예뻐하는데. 한 번도 그런 말은 직접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다른 건 툭툭 잘만 뱉으면서. 그런 말은 꼭 재윤의 앞에만 가면 목 뒤로 꿀꺽꿀꺽 넘어갔다. 부끄럽고 수줍고 떨려서. 나는 여전히 널 보면 꼭 처음처럼 떨려서.

 

"좋아해. 내가 많이 좋아해. 재윤아 나는, 세상 살면서... 사람을 이렇게 좋아해 본 적이 없어. 그러니까 나한테 지치지 마. 나 너무 무서워. 너 없는 시간으로 돌아가는 게 너무 무서워.“

 

나 버리지 마아...

 

애써 참고 참았던 눈물이 댐터지듯 터져 줄줄 흘렀다. 엉엉 소리를 내며 우는 영빈에 덩달아 놀란 재윤이 누가 누구를 버린다고 이카는데 진짜, 웅얼웅얼 잔뜩 억울한 목소리를 내며 영빈을 끌어안았다. 우느라고 뜨끈해진 몸이 꼭 붙어 한참이나 부둥거렸다. 울지마라, 너도 울지 마. 서로를 달래다가 눈이 마주치면 또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서 그 꼴을 보고 너무 꼴사나워 이번에는 웃음이 터졌다. 아 어이없다. 눈만 봐도 좋은데 연애는 뭐가 이렇게 어려운 걸까.

 

”사랑해.“

 

좋아해 보다는 확실히 무거운 말이었다. 그러나 영빈은 충분히 재윤에게 이 말을 꺼내도 좋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순간 재윤에게 해 줄 더 적절한 말을 차지 못했다. 사랑해. 하고 작게 속삭이는 영빈의 눈이 우는 바람에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진짜 토끼같네. 재윤이 작게 웃었다.

 

”나도 사랑해.“

 

재윤은 말을 마치자마자 영빈의 입술을 물었다. 영빈은 당연한 듯이 눈을 감고 입을 벌리고 고개를 틀었다. 체온이 녹아 뜨거운 살덩이가 입속에서 계속 엉켰다. 엉망으로 타액이 턱을 적시도록 쪽쪽 물고 빨다가 숨이 차 코끝으로 뱉은 숨이 뺨을 간질이면 간신히 입술을 떼어내 이마를 맞대었다.

 

뭣 때문에 싸웠더라. 울고불고 소리를 지르며 싸웠는데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영빈이 그게 하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뱉었다. 재윤은 영문을 모르고 그저 영빈을 따라 웃었다.

 

”사랑은 원래 유치한거라더니 그 말이 딱 맞네.“

”왜?“

”동네 꼬마들도 우리처럼은 안 싸울 것 같아.“

 

소리지르고 화내고 엉엉 울다가 결국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실실 웃으며 또 키스하고 손을 잡고 이대로 집에 가면 우린 오늘 밤도 섹스를 하겠지. 우린 앞으로도 별것도 아닌 걸로 끝없이 싸우고 또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마주치면 키스하고, 웃고 그렇게 살 거야. 어린 애들 소꿉장난보다 못한 이유로 그렇게 갑자기 불쑥 싸우고 화해하고, 그게 너무 행복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싸우는 게 행복하다고?“

”길들이는 거잖아. 나는 너한테 길드는 중인가 봐.“

”무섭네, 길든다는 건.“

”무섭고 설레지. 널 볼 때처럼.“

”맞네. 사랑은 길들이는 거네.“

 

집에 가자 재윤아. 벌써 가도 돼? 인성이가 빨리 카페에서 사라지래. 사랑싸움은 집에서 하랬어. 싸움은 여기서 다했고 화해도 했으니까 데이트하자. 데이트 말고. 데이트 말고 뭐? 집에 가자. 집에서 할 수 있는 거 하자. 일찍 퇴근 했으니까, 밤을 좀 길게 써 보자.

 

Ok, 콜.

 

우린 오늘 밤도, 섹스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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