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되는 사이

그래도 되는 사이 05

눈물을 위로하는 방법

쇼케이스 안쪽으로 몽글몽글한 크림을 듬뿍 얹은 케이크가 줄을 맞춰 채워졌다. 케이크를 정리하던 재윤이 쇼케이스 건너편에서 제 손이 가는 대로 반짝반짝 눈을 빛내던 꼬마 아이를 보며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아이는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다가 설탕으로 만든 토끼가 올려진 당근 케이크를 보고 꼭 잡고 있던 아빠의 손을 아래로 당겼다. 아빠, 이거! 토끼! 아이의 아빠는 음료 메뉴를 고민하다가 딸을 번쩍 안아 들고 이거 좋아? 하고 물으며 말랑한 분홍빛 뺨에 쪽쪽 뽀뽀를 더했다. 까르르 아이가 웃는 소리와 함께 양갈래로 묶은 머리칼이 팔랑팔랑 흔들렸다.

 

“이걸로 드릴까요?”

“네 당근 케이크 하나랑, 딸기도 한 조각 주세요. 와이프가 좋아해서요.”

“주문 받았습니다.”

 

재윤이 손님의 말을 듣고 카운터로 가 직접 메뉴를 눌러 계산을 도왔다. 디저트를 만드는 재윤이 베이킹룸 밖으로 나오는 일은 흔치 않았지만, 오늘은 영빈의 자리가 공석이었다. 덕분에 커피는 인성이 맡는 바람에 카운터에 자리가 비어 인성과 재윤이 왔다갔다 고군분투 중이었다. 아직 알바를 쓰기엔 카페가 오픈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동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파악이 덜 된 탓이 당분간은 3인 체제로 가자고 했는데 이렇게나 불쑥 영빈의 자리가 비게 될 줄을 몰랐던 터라 재윤도 인성도 퍽 당황스러웠다.

 

“영빈이 본가 갔다고?”

“할아버님이 부르셨데.”

“가족들 전부?”

“그건 아닌 것 같고.”

 

자세히는 듣지 못했다. 재윤이 아침에 일어났을 땐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친 영빈이 더 자라며 눈꺼풀에 쪽쪽 입을 맞추는 중이었다. 어디 가는데?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부비면 간지럽다고 킥킥 웃은 영빈이 고개를 숙여 재윤의 정수리 위로 입술을 꾹 눌렀다. 할아버지가 부르셨어. 설명은 그것뿐이었다. 불안한 눈으로 제 연인을 올려다보면 영빈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갑자기 새벽에 전화가 왔데. 본가에 들러서 할아버지 좀 보고 가라고.”

“누님이랑 형님한테는 연락 없었고?”

“누님은 모르는 일이라고 하시고. 형님은 내가 연락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고.”

 

수빈은 분명하게 말했다. 오빠와 내 입장은 다르다고. 수빈은 이해하려 노력한다고 말했고, 영빈과는 곧잘 연락을 주고받는 듯 했다. 자주 우울한 얼굴이던 영빈은 차츰 안정된 얼굴로 웃음을 보였다. 그러다가 문득문득 영재를 떠올리면서 울었다. 무섭다고.

 

형이랑 누나는 늘 내 편이었는데, 형한테 연락이 아예 안 돼. 나 원래 겁 같은 거 많이 없는데 형이 이러는 건 정말 무섭다. 나 진짜 응석받이로 자랐나 봐. 미움받는 게 이렇게 무서운 일인 줄 몰랐어. 재윤의 품에서 엉엉 울다가 지치면 영빈은 여지없이 안겨들어 키스를, 섹스를 졸랐다. 재윤은 늘 영빈이 하자는 대로 해주는 편이었다. 속이 시끄럽다고 전부를 내 보여줄 수는 없었다. 영빈이 너무 불안해보여서 본인이라도 평안한 얼굴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형이라도 있어가 다행이다.”

 

재윤은 애써 웃으며 얼굴이 잔뜩 구름 진 인성의 어깨를 툭 쳤다. 인성은 제가 더 아픈 얼굴로 재윤에게 괜찮아. 라고 말했다. 괜찮다, 고? 뭐가? 하나도 괜찮지 않아서 재윤은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다. 차라리 손님이 많은 날이라 참을만했다. 오전부터 둘뿐인 카페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아 정신은 없었지만 잡생각을 떨치기엔 딱 좋은 환경이었다. 딸랑- 출입문에 달린 풍경소리와 함께 어서오세요. 하고 크게 인사를 던지고 확인한 얼굴에, 결국엔 그 억지 웃음도 그쳐버렸지만.

 

아, 안녕하세요. 형님. 나름 살갑게 뱉은 재윤의 인사에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영재가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냐고 물었다. 재윤은 인성에게 눈짓하며 앞치마를 묶었던 리본을 풀어냈다.

 



그래도 되는 사이 05

재윤 x 영빈

W. 갈피


 

“아이를 좋아하나봐요.”

“...네, 뭐.”

“아까 봤거든요. 실은 들어올까 말까 주변에서 계속 서성거리느라.”

 

“뭐, 하실 말씀이라도.”


재윤은 무릎 위에 주먹 쥔 손을 올려 놓은 채 진정하려고 애썼다.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건 무서운 일이지. 맞아. 허리를 펴고 똑바른 자세로 마주 앉은 이와 눈을 맞추려 노력했다. 때마침 커피 두 잔을 테이블 위에 올린 인성이 분위기를 풀어주려 오랜만이네요, 형. 하고 영재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 너도 오랜만이다. 여유롭게 웃는 영재의 얼굴이 영빈과 똑 닮아서 재윤은 저도 모르게 입 안쪽의 여린 살을 꾹 물고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김영빈은 할아버지가 부르셨다던데, 형은 안 가봐도 되는 자린 가봐요?”

“영빈이한테 볼일이 있으신 모양이야, 나는 따로 안 부르시더라고.”

 

대답은 인성을 향했지만 시선을 줄곧 재윤이었다. 재윤에게 들으라는 듯이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꺼내던 영재는 인성이 아, 네. 가실 때 인사하고 가요. 하고 멀어지는 걸 지켜보다 주변 소음이 조금 잦아 들 때 쯤 입을 열었다.

 

“나는 아이가 둘 있어요. 내가 결혼을 좀 빨리해서 영빈이 고등학생 때 애들이 태어났는데 그때부터 영빈이 말버릇이 그거였어요. 우리 애들같은 애들 낳고 싶다고.”

“...네. 저도 아이 좋아합니다.”

“아이를 좋아하는데 왜 그런 연애를 해요?”

 

여전히 김이 올라오는 커피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재윤은 ‘그런 연애’라는 표현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 비죽 올라간 입꼬리가 영 내려올 생각을 못 했다. 표정 관리가 전혀 되지 않는 얼굴로 재윤이 영재를 마주 보는 눈은 조금 전과는 사뭇 달랐다. 영재가 찾아온 사람이 영빈이 아니라 저라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말했잖아요, 나 그렇게 착한 사람 아니라고. 고개를 돌려 통유리로 된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마가 지나간 늦여름은 참, 화창도 했다. 삐딱선을 타기에 정말 좋은 날씨 같았다.

 

“제가 하는 연애가 어떤 연애인가요?”

“...정상적이지 않은 연애죠.”

“아이를 가지기 위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나요?”

“그게 순리니까요.”

 

“모든 연애의 종착이 결혼이진 않아요. 결혼의 끝이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니듯이. 형님 보시기에 영빈이형이랑 제가 비정상적이고 이상해 보일지 몰라도. 우리는 그냥 서로의 옆에 있는 게 혼자 있는 것보다 행복해서 연애를 시작했고, 보통의 연인들처럼 언제 헤어질지 아니면 계속 만날지 모르는 채로 그저 가능한 한 오래 함께이기를 바라면서 연애를 해요. 아주, 보통의 사람들처럼.“

 

결말이 영원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서로한테 나쁜 추억으로는 남지 말자고 아낌없이 마음을 주고 있는 거고요. 다들 그렇게 연애하고 사랑하지 않나요? 그걸 남한테 이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형님이 그걸 이해하지 못하신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둘 다 어린 나이 아니잖아요. 현실적으로 생각해요. 그런 이상적인 사랑 타령이 두 사람한테 도움 되지 않아요. 내 동생 그만 만났으면 좋겠다는 소리예요.“

 

입장 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확실히 수빈과는 다른 전개였다. 이미 재윤에게 적대적이었고 이해하려는 마음조차 없어 보였다. 입을 꾹 다물었던 재윤은 열이 오르는 듯 머리칼을 거칠게 탈탈 털었다. 평행선 위에 서서 조금이라도 가까워져 보겠다고 손을 뻗어 봤자 교차 될 일은 없어 보였다.

 

”영빈이. 오늘 선보러 갔어요.“

”...!“

”내가 주선했어요. 할아버지 오랜 친구분의 손녀시고. 좋은 사람이에요. 중간에 도망쳐 나올 수 없게 할아버지께 함께 가달라고 부탁도 했고요.“

”형님...!“

”날 설득 시키면요, 그 다음은 우리 아버지고, 그 다음은 할아버지죠. 설득이 필요한 연애가 정상적입니까?“

 

재윤은 말을 잃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였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백 마디의 말보다 침묵을 택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할말은 해야지. 이대로의 침묵은 긍정이 되어버릴까봐 뒤늦게 입을 열었다.

 

”설득할 생각 없어요.“

”그럼 영빈이가 가족이랑 멀어지는 걸 보겠다고?“

 

영재에게서 불쑥 반말이 튀어나왔다. 수빈은 재윤을 만나고 나서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냥, 좋은 사람 같았어. 영빈이가 기대도 될 것 같았고 상처받지 않을 것 같았어.’ 수빈이 만난 그 재윤은 다른 사람인가 싶게 비틀린 입꼬리를 삐뚤게 올린 재윤의 눈초리가 날카로웠다. 뻔뻔한 사람, 혹은 당당한 사람. 그 경계에서 재윤이 달리 보였다.

 

”말씀하실 생각이신가요?“

”네?“

”저랑 영빈이형 사이를 형님 입으로 가족분들에게.“

”그건...“

”선을 넘으신 건, 제가 아니라 형님이세요. 그런 식으로 영빈이를 다치게 하는 것도 형님이시고요. 저희 사이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저는 더 드릴 말씀이 없을 것 같네요.“

 

허? 눈코입이 전부 확장 된 영재의 얼굴이 정말이지 영빈을 똑 닮아 있어 재윤은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죄송하지만 영업시간이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정중하게 인사한 재윤이 카운터로 돌아가 앞치마를 찾아 매고 벗어두었던 베레모를 찾아 머리 위에 썼다. 당황한 영재가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재윤을 바라보면 머리칼을 정리하며 주방으로 가 손을 씻은 재윤이 정말 미련 없이 베이킹룸으로 들어섰다. 더이상은 말을 나눌 의지가 없다는 말이었다.

 

***

 

괜찮은척 했지만 하루종일 생각이 많았던 하루가 유독 느리게 흘렀다. 디저트는 솔드아웃으로 돌리고 음료만 팔겠다며 재윤을 먼저 퇴근시킨 인성 덕분에 오랜만에 일찍 퇴근길에 올라 노을이 지는 거리를 걸을 수 있었다. 6시가 넘어가도록 영빈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여자, 여자를 만나고 있단 말이지? 아랫입술을 꾹 물어 삼키고 시선을 허공에 둔 재윤이 고개를 두어번 털었다. 생각이 많아질 땐 무작정 걷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가방 안에 넣어 둔 에어팟을 찾는데 덥썩 누군가 뒤에서 안겨들어 재윤의 손을 잡고 매달렸다.

 

"뭐고?“

 

"뭐긴, 이재윤 애인이지."

 

"벌써 왔나? 늦을 줄 알았는데?"

"너 보고 싶어서 땡땡이 좀 쳤지."

 

배시시 웃는 영빈의 얼굴이 새초롬해서 마주 보고 웃음이 터진 재윤이 헐겁게 제 손을 잡은 영빈의 손에 깍지를 끼고 힘주어 당겼다. 느리게 흐르던 흑백 하늘에 그제야 붉은 노을이 탁 터지듯이 번져 들었다. 못 믿은 건 아니지만 불안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냥 너무 좋아서, 질투라고 해두자, 했다. 영빈의 얼굴을 확인하고 웃느라 활짝 벌어진 재윤의 입술 끝을 남은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영빈이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오늘 우리 형 왔다갔다면서?"

 

"인성이 형이 말했나."

"응. 내가 심어둔 스파이. 이재윤 감시하려고.“

"...형은, 괘안나?"

"그 말은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재윤아 괜찮아?

형은 괘안나?

 

우리는, 괜찮아. 대답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손을 마주 잡고 느리게 걷는 시간이 그냥 여유로웠다. 둘만 있으면 이렇게 좋은데, 둘 말고 뭘 더 생각해야 한다는 게 복잡하고 억울했다. 재윤이 영빈의 손을 잡은 손에 좀 더 힘을 주고 앞뒤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영빈은 아침에 나갈 때와는 옷이 달라져 있었다. 캐주얼 룩이었던 것 같은데 세미 정장을 입고 있는 게 퍽 낯설고 어색했다. 재윤은 길거리 한복판에서 영빈이 관자놀이께에 입술을 콩콩 박았다.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려 저를 올려다보는 작은 얼굴이 못내 사랑스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남들이 보면 어쩌려고, 한소리를 하려던 영빈은 눈꼬리가 축쳐진 재윤의 표정을 보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그냥 그 품에 폭 안겨 허리를 감았다.

 

"고생했네 우리 영빈이.“

 

"뭐야아...왜 그런 표정 하는데."

 

"목 답답한 거 싫어하면서 넥타이는 우째 맸지?"

"안 그래도 너무 답답해. 집에 가면 이거부터 풀어 줘."

 

내 손으로 풀면 재미없잖아. 모처럼 입은 정장인데. 혀를 빼물며 간지럽게 웃은 영빈에 크게 웃음을 터트린 재윤이 우리 좀 빨리 걸을까? 하고 잰걸음을 걷자 분위기를 풀려고 농담을 던지던 영빈도 웃음이 터져 한참이나 허리를 숙여 웃었다.

 

"나 오늘 뭐 하고 왔는지 형이 말했어?"

"뭐... 대충."

"옷 왜 이러냐고 안 물어보길래. 혹시 말했나 했지."

"그래서? 만난 여자는 예쁘드나?"

"엉 예쁘더라."

 

집에 올 때까지 꽉 잡고 있던 손은 현관문이 닫히고서야 풀어졌다. 신고 있던 구두를 아무렇게나 벗어 현관에 던지고 들어선 영빈이 제가 벗어 놓은 구두를 정리해 신발장에 넣어두고 자기 신발까지 가지런히 놓아두는 재윤을 향해 돌아서 두 팔을 벌렸다. 안아줘.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리자 재윤이 보조개가 드러나도록 활짝 웃으며 얼른 달려와 영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근데 그 여잔 보조개도 없고, 나보다 키도 작고, 손도 작고, 날 안아서 들어 올리지도 못하고."

"그랬나?"

"응, 그래서 별로였어."

 

이재윤은 그거 다 해 줄 수 있는데, 그치?

 

울상을 지은 영빈이 저를 번쩍 들어 올린 재윤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익숙하게 목에 두 팔을 감았다. 품에 꼭 맞게 들어오는 얇은 몸을 두 팔 안에 가득 안은 재윤이 그대로 소파에 앉아 영빈의 뺨에 쪽쪽 소리를 내 입을 맞추자 영빈이 히잉-하고 어리광을 부렸다.

 

"힘들었나?"

"그렇다고 하고 싶은데 네 얼굴이 더 힘들어 보여서 나는 안 힘들었다고 할게. 우리 형이 나쁜 소리 많이 했어?"

"그냥... 이해를 못 하시겠다더라."

"모두한테 이해받을 수는 없겠지."

 

그래도 좀 슬프다, 그치? 그렇게 말하는 영빈이 꼭 울 것 같아서 재윤은 그대로 입을 맞췄다. 고개를 틀고 느리게 입술을 물고 틈새를 혀로 갈라 들어가면 뜨겁고 축축해서 금방 몸이 홧홧해졌다. 그래서 왜 눈물이 날 것 같을 때 영빈이 키스를 조르는지 실감했다. 쪽쪽 사탕을 굴리듯 혀를 이러저리 섞다가 고막에 부딪히는 소리가 너무 외설스러워 가볍게 입술을 떼어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 영빈의 속눈썹이 팔랑팔랑 재윤의 뺨에 닿았다.

 

"넥타이 답답해."

"지금 풀까?"

 

"너 섰어, 재윤아."

 

"지금 풀자."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이 그대로 올라와 영빈의 셔츠 깃 아래 넥타이에 걸렸다. 막힘없이 죽 풀어 당기는 재윤의 손과 반대로 고개를 늘린 영빈이 재윤의 손가락에 걸려 바닥으로 떨어지는 넥타이를 확인하며 단추는 제 손으로 직접 풀었다.

 

밤은 길고, 입술은 쉴새 없이 다시 붙었다 떨어졌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그런 건 좀 더 나중에 듣기로 했다. 영빈은 제가 울 것 같은 날도, 재윤이 울 것 같은 날도 키스를, 그리고 섹스를 졸랐다. 그게 두 사람이 눈물을 위로하는 방법이었다.

 

***

 

"그런 식으로 재윤이 찾아가지 마."

 

"만난 지 5개월은 됐어?"

"형 그러는 거 엄청 무례해, 원래 그런 사람 아니잖아."

"너도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어."

 

마주 앉아 또 평행선 같은 대화를 던지고 있었다. 저 몰래 선 자리를 주선하고 재윤을 찾아가 무슨 말이던 건넸을 형이 여지껏 알고 있던 제 형 같지가 않아서 영빈은 답답하고 당황스러웠다. 영재는 줄곧 재윤이 영빈에게 나쁜 짓이라도 한 듯이 굴었다. 언제든 다시 영빈은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한 태도가 숨이 막혀서 맛도 없는 남의 카페 아메리카노를 입안에 원샷으로 쏟아 넣고 찬 기운에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정신 차리자 김영빈. 주문도 좀 걸면서.

 

"나는 집안 어르신들 허락이 없었어도 군인은 안 됐을 거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직업도 연애도, 허락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는 거야. 그냥 내 인생이고, 내 시간이고, 내 감정이라고."

"김영빈!"

"형 나 어린애 아니야. 연애까지 허락받을 이유 없어. 형은 형수님 만나면서 그런 거 허락받았어?"

 

동요 없던 영재가 눈을 꾹 감았다. 후우- 길게 뱉는 숨이 무거워서 영빈은 침을 꼴깍 삼켰다. 테이블 위에 올린 손가락이 토도독 토도독 몇 번이나 표면을 두드리다 눈을 바로 뜬 영재가 입을 열었다.

 

"가족들이 전부 반대해도, 넌 그 사람이야? 너 아버지, 할아버지 설득할 자신 있어?"

"말을 하고 안 하고도 내 선택이야. 형이 그럴 수 있게 해준다면."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멀쩡히, 잘, 여자 만나던 애가. 왜 갑자기..."

 

"재윤이가 그렇게 만든 것 같아?"

 

"뭐?"

 

그래서 재윤이한테 찾아가서 그랬어? 나 만나지 말라고? 우리 비정상이라고? 근데 형, 재윤이도 나도 처음이야. 서로가 서로한테 처음이야. 나도 형처럼 남자한테 그런 감정 느끼는 거 비정상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많이 망설였고 외면도 했어. 근데...

 

"재윤이가 좋아. 내가 좋아하는 거야."

 

외면할 수 없게 좋아. 재윤이가 날 그렇게 만든 게 아니야. 우리는 서로를 그렇게 만들었어. 그냥 남들이랑 똑같이 연애 하는 거야. 형이 불편하다면 평생 그런 모습 형한테 안 보여줄 수도 있어. 그렇지만 헤어지는 건 다른 문제야.

 

"후회, 안 할게. 상처도 안 받을게. 형이 나 상처받고 아파할까 봐 이러는 거 알아. 근데 형, 나 재윤이랑 당장 뭐 하겠다는 거 아니야. 그냥 지켜봐 주기만 하라고. 잘 만나는 지 헤어지는 지 그냥 지켜보기만 하라고. 형 허락은, 필요 없으니까. 응원할 수 없다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우리한테."

 

'우리'. 그 단어가 영빈에게 주는 타인과의 소속감에서 영재는 영빈이 정말 어리지 않다는 사실을 아주 문득 깨달았다. 손에 꽉 쥐고 있던 모래알이 손을 펴보면 흔적만 알알이 남아 있는 것처럼 다 자란 막내를 가르치듯이 타박하던 건 아닐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표정이 누그러진 영재를 알아보고 영빈이 말을 더했다.

 

"내가 너무 응석받이로 오냐오냐 자라서 허락 같은 거 없이도 나는 그냥 나 하고 싶은데로 하고 사는 애잖아. 형도 책임 있어. 형이랑 누나도 내가 해달라는 건 다 하게 해줬잖아. 그래서 나는, 포기하는 방법은 몰라."

 

영재는 헛웃음을 뱉었다. 야, 너 지금 우리가 널 그렇게 키웠다고 말하는 거야? 정말로 어이가 없어서 묻는 말이었다. 조금 전까지 다 컸다고 생각했더니 또 어리광인 영빈이 어이없지만 정말 제 동생 같아서 안심이 되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양가감정이었다.

 

"이건 사과할 일도 아니고, 그래서 미안하다고도 안 할 거야. 재윤이한테는 형이 미안하다고 했다고 전해줄게."

 

딱 제 할 말만 하고 일어선 영빈이 우웩 여기 커피 진짜 맛없다. 다음엔 우리 카페로 와 재윤이 베이킹룸에 넣어놓고 내가 내린 커피 줄 테니까. 하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영빈을 더 보고 말고는 이제 영재가 선택할 일이라는 말이었다. 이해해달라고 더 매달리지 않겠다는 소리를 참 김영빈답게 쿨하게도 한다, 싶어 영재는 진심으로 제가 동생을 저렇게 막 키웠나 싶었다. 근데 저게 또 김영빈 같기도 해서 무겁던 머리가 좀 가벼워졌다.

 

너털웃음이 터지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한참이나 크게 웃다가 핸드폰을 들어 이미 카페를 벗어나 저만치 가고 있는 영빈에게 카톡을 남겼다.

 

'그분한테 그날은 미안했다고 전해줘. 아직 너흴 이해는 못 하겠다. 그래도, 많이 미안.'

 

전송을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선 영재가 영빈이 나간 그 길을 그대로 나섰다. 날씨가 좋아서 잔뜩 인상을 쓰고 하늘을 바라보다 영빈이 걸어간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저희가 죄송할 짓을 했나요?'

 

재윤이 남겼던 말이, 영빈이 했던 말과 겹쳐졌다. 영빈의 말대로 커피가 꽤 맛이 없었는지 입안이 텁텁해서 오래전에 끊었던 담배가 말렸지만, 그냥 묵묵히 걸었다. '막내가 우는 건 너무 오랜만에 보지 않아? 오빠, 사과 안 해도 되겠어? 평생 후회할걸? 지금 영빈이 울린 거?‘ 영빈을 만나러 온다는 말에 수빈이 건넸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사과는 일단 했고. 그다음은, 그냥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건가. 마지못해 웃는 입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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