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되는 사이

그래도 되는 사이 04

그렇고 그런 사이

계획이라는 단어가 주는 안정감과 여유로움을 영빈은 사랑했다. 어떤 상황이 닥칠 것을 미리 알고 대처하는 능력은 순발력보다는 준비성이 필요한 일이었고 그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영빈은 준비성이 매우 철저하여 모든 일에 계획과 대책이 있는 사람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본인이 그런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영빈은 휴일이라고 아침부터 저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 물고 빠는 이재윤과 짝짜쿵이 맞아 이제 막 티셔츠를 벗어 던지던 참이었다.


삑삑삑삑, 간결한 터치음과

삐삐삐삐, 요란한 경고음 사이


사고회로가 정지된 듯 재윤의 입술을 물고 있던 영빈이 딱딱하게 굳어버리자 먼저 정신을 차린 재윤이 아랫입술을 영빈에게 물린 채 입을 열었다. 누구 왔나? 라고. 누가 들어도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와 비밀번호가 틀렸다고 현관문이 우는 소리가 틀림없었다. 누가 와? 우리 집에? 왜? 코앞에서 재윤과 눈을 맞추고 멍을 때리던 영빈은 문밖에 있던 사람들이 어? 비밀번호 바꿨나? 왜 안 맞지? 라고 말하는 소리와 야, 너 잘못 누른 거 아니야? 라고 묻는 소리를 듣고 아무리 에어컨 빵빵한 실내라지만 한여름을 달리는 8월 말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현상을 경험했다.


“형님이랑 누님이다.”

“어?”

“우리 누나랑 형!”


어엉?




그래도 되는 사이 04

재윤 x 영빈

W. 갈피


 


헐, 미친.


식은땀이 흐른다는 건 이런 건가? 엉금엉금 재윤의 무릎에서 기어 내려와 소파 밑에 던져둔 반바지부터 찾아 입고 타액이 번들거리는 재윤의 입술을 제 손바닥으로 벅벅 문지른 영빈이 이리저리 헤집어가며 끌어안고 치대느라 엉망이 된 재윤의 머리를 손으로 대충 빗어 정리해 주었다. 형 머리도 이런데. 재윤이 중얼거리며 붕붕 떠버린 영빈의 머리칼을 매만지고 뺨으로 번진 침을 마찬가지로 손으로 문질러 닦아주자 밖에서 몇 번 더 비밀번호를 눌러보던 영빈의 형제들은 여전한 경고음 소리에 ‘야 막내한테 전화해 봐.’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아침부터 애정행각에 격정적이었던 모습을 정리하느라 뒤늦게 현관을 향해 달려나가려는 영빈을 붙잡은 재윤이 왜? 하고 묻는 동그란 눈가에 쪽 입을 맞추고는 형 옷 다른 거 입어야겠는데? 하고 난감한 듯이 말했다.


“옷? 왜?”

“여기 다 비치는데?”


툭툭 뭉툭한 재윤의 손끝이 목덜미와 쇄골, 팔뚝 아래 여린 살, 그리고 옆구리를 따라 가슴팍까지 건드리며 가리키자 눈을 동그랗게 뜬 영빈이 곧 벌게진 얼굴로 드레스 룸을 찾아 부리나케 뛰었다.


김영빈은 딱딱하고 뻣뻣한 옷은 질색이었다. 직업군인이 되라는 집안 어르신들 권유에 펄쩍 뛰며 난색을 표한 이유 중에는 군복도 큰 몫을 했다는 말이었다. 영빈이 가장 좋아하는 티셔츠들은 처음 살 때부터 비쩍 마른 영빈에겐 널널한 옷들이었고 목이며 팔뚝이 움직임에 따라 얼마든지 훤히 드러나는 소재와 디자인이었다. 대부분의 홈웨어가 그런 옷들인데 당장 드레스룸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으라고 말해도 재윤이 며칠간 새겨 놓은 울긋불긋한 자욱들을 가릴만한 마땅한 옷들은 영빈에게 있을 턱이 없었다. 슬쩍 들여다본 전신 거울엔 쇄골 아래부터 팔 안쪽, 가슴팍 군데군데 전부 붉고 푸른 멍울이 있었다. 하필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두께가 얇은 탓에 흐리게 실루엣까지 비치는 터라 이대로 나갔다간 대참사가 일어날뻔 했다. 아 당분간 흔적 남기는 건 자제하라고 해야겠다.


괜히 민망해지는 얼굴을 좀 문지르다가 대충 티셔츠 중에 검은색을 골라 아무거나 입었다. 입고 보니 재윤의 옷이라 좀 크긴 해도 확실히 온몸이 전부 가려지기는 해서 목 부분만 아니면 괜찮을 것도 같았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뛰어나가 티비 테이블 서랍을 뒤져 파스를 꺼낸 영빈이 목선을 전부 가리도록 치덕치덕 엉성하게 붙이고는 좀 전부터 진동이 쉴 새 없이 울리는 휴대폰을 소파 위에 던져 둔채 후다닥 현관의 문을 열었다.


“뭐야 아침부터.”

“오냐 우리 막내. 환대 고맙다.”

“반갑다는 소리를 참 빨리도 하네, 집에 있었으면 빨리 좀 열지 뭐 했어?”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형제들에게 부러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며 열이 난 몸을 식힌 영빈이 타박에 타박을 더하며 자연스럽게 집으로 쳐들어오는 형과 누나에게 스르륵 밀려 거실로 들어서자 그 뒤로 떡하니 전봇대처럼 버티고 선 낯선 남자에 영빈의 형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오빠 뭐하냐 안 들어가고. 뒤따라 들어오던 영빈의 누나, 수빈이 물으면 형인 영재가 옆으로 비켜서 재윤과 형제들이 마주 보고 나란히 서는 아주 어색한 그림이 완성되었다. 아, 안녕하세요. 이재윤입니다. 누가 들어도 서울이 고향이 아닌것 같은 어투로 재윤이 고개를 숙이자 위풍도 당당하고 뻔뻔하게 막내 동생의 집을 습격했던 두 사람이 목각 인형처럼 삐걱이며 재윤과 맞절을 해 보였다.


“근데, 누구...?”

“사정이 있어서 같이 살고 있어. 우리 카페 제빵사.”


아아, 영빈의 소갯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영재와 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탄성을 내지르자 재윤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며 무언의 인사를 전했다. 몇 살이에요? 묻는 수빈에게 재윤이 말 놓으세요. 영빈이 형보다 한 살 어려요. 하더니 두 사람의 손에 들린 짐들을 받아 주방으로 옮겼다. 아이고, 우리가 해도 되는데. 입에 발린 말을 하면서도 집에서 엄마가 챙겨준 반찬들을 확인해 냉장고에 차곡차곡 정리하는 재윤을 굳이 따라가지 않은 수빈이 재윤의 뒷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반찬 갖다주러 온거면 한 명만 와도 되는데 왠일로 둘 다 왔어?”

“너 죽었는지 살았는지 보려고.”

“엄마한테 이틀에 한 번씩 전화하거든?”

“형이랑 누나한테 안 하잖아?”


나름 손님이라고 두 사람을 식탁에 앉혀놓은 재윤이 주스며 먹을거리를 내놓는 동안 영빈은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아 수빈의 말에 툴툴거렸다. 재윤의 뒷모습을 열심히 쫓던 수빈의 눈이 불만 가득한 영빈의 목소리에 영빈을 향해 돌아갔다.


“둘이 같이 산 지 얼마나 됐어?”

“그게 왜 궁금해?”

“왜 이렇게 적대적이야? 그냥 주방 왔다 갔다 하는 게 익숙해 보여서.”

“... 세 달 넘었는데.”


수빈이 영빈에게 재윤의 호구 조사를 하는 동안 영재는 오랜만에 보는 영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중이었다. 정확하게는 영빈이 엉성하게 목덜미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파스라던가, 평소 잘 입지 않는 목덜미가 타이트한 도톰한 소재의 검은 반팔이라던가, 까치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인위적인 뻗친 머리라던가 하는 것들을 아주 자세히.


그리고 그런 것들은 수빈과 영빈이 티키타카를 주고받으며 안부를 묻는 사이 여전히 분주하게 과일을 깎아 내오며 포크를 내미는 재윤의 모습과 매치 되었다. 뒷머리가 조금 떠 있고, 티셔츠의 등허리 부분이 손으로 쥐었다 편 것처럼 주름져 있고, 결정적으로 라운드 목덜미 위로 흐릿한 멍울이 보였다. 누가 봐도 애인이랑 한바탕 행복했을 것 같은 모양인데 그게 꼭 방금 전까지 그랬던 것 같은 건 그냥 느낌일까? 영재는 사태가 파악될수록 뱃속이 싸했다.


“군대는 갔다 왔어요?”

“나이가 몇인데 당연히 갔다 왔지.”

“너 말고 재윤씨한테 물었어.”

“아, 네. 형님도 말 편하게 하셔도...”

“전 이게 편해요.”

“아, 넵.”


팔짱을 척 끼고 대화의 흐름을 일부러 끊은 영재가 살갑게 구는 재윤에게 부러 더 딱딱하게 굴었다. 누가봐도 일부러 재윤에게 거리를 두는 모습에 제게로 시선이 모이자 영재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영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쎄한데. 영재가 중얼거렸다. 영빈은 말없이 포크를 들어 재윤이 잘 깎아 놓은 사과 한 조각을 찍었고 수빈은 뭔가 흥미진진한 분위기에 두근두근한 얼굴로 제 오빠와 동생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 기시감은 뭘까. 영재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재윤은 시선을 피하는 것처럼 보였고 영빈은 태연한 척 해보려 했지만 다리를 떨고 있었다.


“여자친구 있어요?”

“...네?!”

“아니, 둘이 같이 사는데 여자친구가 있으면 불편하겠다 싶어서. 요새는 집에서 데이트 많이 하잖아요.”


꼭 뭘 알고 있다는 듯이 날카로운 눈이 영빈과 재윤을 차례대로 속속들이 훑었다. 재윤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눈을 굴렸다가 영빈을 살폈다. 형의 갑작스러운 물은에 사과를 씹다 말고 불안한 표정으로 동작 그만 상태가 되어버린 영빈을 보며 아니요, 없습니다. 라고 재윤이 제법 신중하게 답했다. 그 시선 끝에 영빈이 닿는 것을 정확하게 본 영재가 뒤틀리는 심사에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애인은?”


태연하게 묻는 말이 꼭 어느 학교 나왔어? 와 같은 흐름이라 대답하려 입을 열었던 재윤이 합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다리를 떨던 영빈의 움직이 멈춘 것도 싱글싱글 웃고 있던 수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은 것도 같은 때였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영재는 손에 들고 있던 포크로 사과를 찍어 아삭, 하고 물었다. 아주 잠깐 영재가 사과를 씹는 소리만 공간을 매웠다.

 

"침묵을 긍정이라고 봐도 될까요?"

"네?"

"우리 막내랑 만나는 사이냐고 물은 건데?"

 

말의 뜻을 헤아리려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재윤에게 영재가 돌직구로 물었다. 그래놓고 태연한 척, 여전히 아삭아삭 혼자 사과를 씹는 소리가 요란했다. 영빈이 아주 작게 형... 이라고 영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수빈은 턱을 괴고 있다가 자세를 곧게 펴고 바로 앉아 제 앞에 마주 앉은 재윤을 조금 다른 눈으로 훑었다.

 

대한민국 특수부대 대위 김영재, 전투부대 대위 김수빈. 다이아 세 개를 나란히 어깨에 단 직업군인 남매는 집안 어르신들의 떠밀림이 아니었더라도 육사를 지원 했을 거라고 말 할 정도로 이 일을 사랑했다. 광산 김씨 어른들은 말했다, 직업군인에 제격인 건 영빈이라고. 영빈이라면 집안에 별도 나올 뻔 했다고. 저 성격에, 저 운동 신경에, 저 리더십에. 뭐하나 빠짐없는 장군감이라고.

 

그러나 수빈과 영재는 다른 길을 가기로 한 영빈을 누구보다 이해했다. 두 사람은 영빈이 가족의 사랑과 보호 속에서 얼마나 오냐오냐 자랐는지 알고 있었다. 감정에 솔직한 게 아니라 숨길 줄 모르는 거고, 대범한 게 아니라 눈치를 살피 줄 모르는 거다. 리더십이 아니라 사랑을 충만히 받고 자란 사람 특유의 다정함과 배려. 그 사이 어디쯤이 형제들이 알고 있는 영빈이었다. 친척들 모두 그 놈 장군감이네. 하고 말할 때, 영재와 수빈, 두 사람만은 넌 절대 군대 오면 안 되겠다. 직업군인은 절대 못 하겠다. 하고 말했다.

 

그런 영빈이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서툰 거짓말을 하는 걸 이미 진즉에 눈치챘다. 재윤을 싸고 도는 걸 보니 재윤과 관련 있겠군 싶었던 수빈은 영재의 물음에 눈이 번쩍 뜨였다. 감추기 위한게 아니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재였나, 싶어 다시 영빈을 살피면 심하게 동요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네."

 

대답은 한참 만에 나왔지만 꽤 선명했다. 잠시 잠깐은 숨소리도 흐르지 않았다. 재윤은 그 침묵 사이에 제 목소리를 더 했다. 만나고 있습니다. 저희. 라고.

 

 

중학교 때, 영빈이 인성에게 물었었다. 너 남자 좋아하는구나. 하고 가볍게. 그 날 김인성은 가출 아닌 가출을 했었다. 매일 하교길을 함께하던 영빈을 버리고 저녁 내내 연락이 되지 않았다. 한참 만에야 괜찮다는 문자가 도착했고 다음 날 돌아온 녀석은 무서워서 그랬다고 했다. 내가 널 탓한 것도 아닌데 뭐가 무서워? 영빈은 당시의 인성을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냥 넘어갔다. 어차피 휘몰아치는 감정을 오롯이 이해하는 건 당사자 뿐일 테니까.

 

그러나 이제 와서 그 순간을 조금은 후회했다. 그래서? 무서워서 그걸 어떻게 극복했는데? 인성에게 물어나 볼 걸, 싶었다.

 

"형, 그러니까 이게..."

"넌 조용히 하고."

 

말을 보태려는 영빈을 영재가 막았다. 덜덜덜 손끝이 떨렸다. 새삼 영재와 수빈의 표정이 싸늘해 보이는 건 착각이길 하고 바랐다. 피가 식는다는 건 이런 거구나. 싶어서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만난다고? 둘이? 그러니까, 진짜로 오빠가 말하는 것처럼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수빈이 오른손 검지로 재윤과 영빈을 번갈아 가리켰다. 영빈은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고 재윤은 다시 한번 네, 하고 답했다.

 

"어쩌다가?"

 

사람이 사람의 말에 상처를 받는 건 아주 사소하고 악의 없는 한마디에서 비롯하는 법이었다. 수빈은 제 동생을 비난할 마음은 없었지만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영빈은 쭉 이성애자였고 남자를 만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 의미의 어쩌다가? 라는 물음이었으나 영빈은 그 말에 울음을 터뜨렸다. 수빈은 제 동생이 우는 모습에 당황해 말을 잃었고 영재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영빈을 바라볼 뿐이었다.

 

우는 영빈을 달래는 건 재윤밖에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았다. 영빈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을 톡톡 쳐 저를 바라보게 만든 재윤이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방으로 갈래요? 하고 물었다. 영빈은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며 울음을 삼키고 소리 없이 끅끅거렸다.

 

생각해 보니 어차피 들킬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남자 둘이 살면서 게스트 룸을 비워두고 안방을 함께 쓰는 모양새도 그렇고 숨긴다고 숨겼지만 여기저기 남아있는 둘을 흔적도 그렇고, 가족과 따로 떨어져 살다 보니 워낙에 자유분방해 나중 일은 생각도 못했다. 나중을 생각 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기도 했다. 모든 연애가 가볍게 시작해 진심이 더해져 미래를 약속하게 되듯 영빈과 재윤도 3개월 남짓 흔히들 열애에서 말하는 천천히 알아가는 사이, 딱 그 정도 였으니까.

 

대책도 준비도 없는 커밍아웃은 두려움과 혼란의 중간이었다. 수빈과 영재에게 양해를 구한 재윤이 우는 영빈을 일으켜 안방에 앉혀두고 다시 거실로 나오자 남매는 다시 갈 준비를 하는 듯 현관 앞에 서 있었다.

 

“가시게요?”

“여기 더 있을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아서요.”

“아... 네.”

“보통 이럴 땐 죄송합니다. 뭐 그런 말 하지 않아요?”

 

수빈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먼저 나갔고 영재는 잠자코 있다가 재윤에게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 상황이 이 자리가, 죄송하지 않냐고.

 

“저희가 죄송할 짓을 했나요?”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이 너무 말갛고 깨끗해서, 영재는 입을 꾹 다물었다. 기분 나빠. 인사를 나오려는 재윤을 마다하며 영재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기분 나빠.’ 라고. 재윤은 그 말을 듣고서야 자리에 멈춰서 고개를 떨궜다. 영재와 수빈이 빠르게 현관문을 닫고 사라졌다. 터벅터벅, 비어 있는 복도로 멀어져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쿵쿵쿵, 발걸음 소리를 따라서 재윤의 심장도 세차게 뛰었다. 두려움, 분노, 안쓰러움, 막막함.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회오리처럼 뒤섞여 온 몸이 휩쓸리는 것 같았다.

 

무거운 발을 이 끌고 안방 문의 문고리를 잡았지만 선뜻 돌릴 수가 없었다. 영빈이 아직도 울고 있으면? 그렇게 생각하자 눈앞이 캄캄했다. 이런 건 상상해 본 적이 없어서 좀 숨이 막혔다. 그나마도 형제들이었기에 이 정도에서 넘어가는 걸 수도 있었다. 영빈과 저는 이런 것까지 감당할 정도의 시간과 감정을 키웠었나? 선뜻 다 견딜만큼 사랑하는 사이지. 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재윤이 망설이는 사이 안방의 문이 먼저 열렸다.

 

“형.”

“...재윤아.”

 

소리없이 운다고 눈물을 삼키더니 코끝이 빨갛게 물들어 있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이 와중에 이게 귀엽다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진 재윤이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영빈은 갑자기 얼굴을 가리는 재윤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며 너 울어? 하고 물었다.

 

“아니, 형이 너무 귀여워서.”

 

큭큭거리는 소리가 뒤늦게 터졌다. 이런걸 감당 할 수 있을만큼 김영빈을 좋아했냐고 고민한 방금까지의 자신이 어이없고 가증스러웠다. 이렇게나 좋아 죽을 것 같으면서.

 

“형은 이제 다 울었어?”

 

재윤이 손을 내려 여느때와 같이 다정한 표정으로 영빈의 뺨을 어루면 여전히 젖어 있는 얼굴이 울먹거리며 재윤의 티셔츠 가슴팍을 두 주먹으로 꾹 쥐고 끌어당겼다.

 

“키스해.”

“어?”

“울 것 같으니까 키스해.”

“그것만 하면 돼?”

 

눈물이 얼룩진 눈가에 잘게 입을 맞추는 재윤에게 폭 안긴 영빈이 킁- 코를 먹으며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섹스도 하자.”

“그래.”

 

근데 섹스해도 형은 울텐데? 재윤의 말에 영빈은 그제야 씨익 웃었다.

 

***

 

빵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게 뭐야? 라고 물으면 재윤은 단연코 '기다림'이라고 말할 것이다. 반죽이 숙성되길 기다리는 시간, 오븐에 넣고 구워지길 기다리는 시간, 크림이 녹아들길 기다리는 시간.

 

바쁘게 움직이다가도 숨 고르기를 하듯 그렇게 기다림의 시간이 찾아 오고, 대게 빵 맛은 그 기다림의 시간들이 좌우하기 때문이었다. 재윤은 본인이 만든 빵을 사랑하는 편이었다. 그건 자만이라기보다 내가 만든 빵을 내가 제일 사랑하지 않으면 먹는 사람들에게도 예의가 아닐 거라는 신념 같은 거였다. 그런 면에서 자기만족을 위해 커피를 공부하는 영빈과 다른 듯 닮은 면이 있었다. 둘 다 자기 일을 꽤 단단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 그랬다.

 

기다림이 가르쳐 주는 인내심과 차분함. 침착함 같은 것들은 재윤이 가진 장점이자 단점이었고 재윤은 그게 유일한 장기라고 말했다. 그래서 내 빵이 맛있는 거지. 실습 점수에서 유일한 만점자였던 재윤에게 아이반이 비법을 물으면 재윤은 장난스럽게 물었었다. 이재윤이 제일 잘하는 건, 침착하게 기다리는 거.

 

"우리 막내가 왜 좋아?"

 

아기자기한 카페에서 커피를 앞에 두고 마주 앉은 두 남녀의 분위기는 사뭇 상반됐다. 남자는 여자의 입이 열리길 기다리며 매우 초조해 보였고, 여유라곤 1절 없는 표정으로 연신 눈동자룰 굴리고 있는 반면 여자는 빨간색 스트로우로 느리게 커피잔 안을 저으며 남자의 이곳저곳을 찬찬히 살폈다.

 

말투는 상냥했지만 말뜻은 날카로웠다.

 

“처음엔 동경이고 존경이었어요. 빵을 만드는 사람이라 바리스타 대회에서 우승했던 형은 기사로 처음 봤었거든요. 함께 일할 기회가 우연히도 왔고, 망설일 이유가 없었어요. 더 없는 행운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성적인 감정이랑 착각했을 확률은?”

“누님의 그 질문은 매우 무례하지만 굳이 답을 드리자면 제 대답은 확실한 0%입니다.”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내가 무례한 이유. 영빈이가 그날 운 이유. 나한테 설명 좀 해 줄 수 있어?”

 

놀리는 건가 싶어 눈을 맞추면 수빈은 진심이라는 듯이 사뭇 무거운 눈으로 재윤의 답을 기다렸다. 어려울 수도 있다. 3대보다 더 된 군인 가문이라고 했다. 보수적인 집안 어르신들 사이에서 나중에 자라면 집안이 어떻고, 직업이 어떻고. 막내라 자유로운 편에 속했던 영빈보다 제약이 많았던 형과 누나는 좀 더 편견이 클 수도 있다고 영빈이 말했다. 실은 영빈조차 재윤을 향한 마음이 호감이라고 인정하기가 꽤 힘들었다고 말도 했다.

 

“그렇게 물어 보시는 건 저희를 이해하기 위해선가요?”

 

다행이라면 수빈은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라는 점이었다. 그 때 그 말, 내가 그렇게 잘 못했어? 영빈이가 들어서 그렇게 슬픈 말이었나? 우리 막내 눈물 많이 없는데. 내내 그게 너무 마음에 걸렸어. 수빈은 가감없이 담백하고 솔직하게 말했다.

 

“저도, 형도. 서로가 처음이에요.”

“연애가? 아닌데, 영빈이는...”

“남자가요.”

“...아...”

 

“그래서, 어떤말이 상처일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크게 없었어요. 우리 사일 아는 유일한 사람은 우릴 이해해 주는 사람이었거든요.”

 

이성애와 동성애라고 구분지어 생각해 본적이 없어요. 그냥 서로가 좋았고 끌렸고. 그걸 동경과 헷갈릴만큼 영빈이 형이랑 저 어리지 않아요. 치기 어린 반항심에 서로를 곁에 두기엔 24, 25살 남자 둘은 서로의 가족들에게 너무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고 차라리 세상 물정 모르고 그냥 오로지 호감으로 시작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만큼 서로가 서로한테 좋았구요.

 

“어쩌다가, 라고 물으셨죠? 꼭 탓하는 말 같았어요. 어쩌다가, 그런 큰 잘못을 했냐고 묻는 것 처럼요.”

“나는 그런 뜻이...”

“알아요, 아닌 거. 형도 알 거고요. 그런데 그냥, 날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부정당하는 기분은 좀 무서웠데요.”

 

수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재윤은 긴 말을 더 하진 않았지만 간간히 수빈이 묻는 말에 답했다. 영빈은 잘 추슬렀고, 가끔 울기도 하지만 여전히 씩씩하고. 두 사람이 다녀가고 난 뒤엔 우리가 너무 안일하게 우리 편할데로 연애했구나 하는 생각에 좀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연애를 하는데, 뭘 많이 생각해야 하는 건가?”

“누님과, 형님 같은 분들이 많을 테니까요. 상처를 덜 받기 위한 준비를 하는거죠.”

“지금 은근히 나랑 오빠 먹인 거 같은데?

 

”영빈일 울리셨잖아요.“

 

세상 따뜻하게 웃는 재윤의 얼굴에 영빈이 좋아하는 보조개가 쏙 패였다. 말랑해 보이는 얼굴로 무섭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수빈은 오소소 돋는 소름을 애써 참았다.

 

”형을 상처주면, 아무리 가족이어도. 저는 화가 날 것 같아요.“

 

물렁물렁 말랑말랑 하얀 두부같이 순해 빠진 얼굴로 어눌한 사투리를 쓰던 막내의 동거남은 오늘 이 말을 수빈에게 하기까지 얼마나 준비했을까 싶을정도로 완벽하게 서울말을 구사했다. 이 애들이 하고 있다는 준비는 이런걸까? 서로가 서로를 지키면서 설득시키고 이해시키고, 안된다면 상대를 위해 물어 뜯어주는거?

 

”좋은 전술이네.“

”네?“

”직업 군인은 영빈이 말고 너 같은 사람이 해야 되는건데.“

”아...“

 

”잘 부탁해 내 동생. 아직 완전히는 아니지만 나는 이해하려고 노력해 볼게.“

 

물론 내 입장은 오빠의 입장을 포함하지는 않으니까, 그 점을 염두해 두고. 수빈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재윤의 어깨를 툭툭 도닥였다. 영빈이한테 전화하라고 해. 자몽이 사진 보내 줄테니까 보고 싶으면 엄마 괴롭히지 말고 나한테 말하라고 해. 자몽이 사진은 내가 더 많이 찍으니까. 주절주절 이어 붙이는 말들은 영빈에게 먼저 연락하기 민망하니 안부나 전하라는 뜻인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재윤의 앞에 손바닥을 척 내민 수빈이 고개를 까딱였다.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재윤이 제 손을 살포시 얹어 놓자 웃음이 빵 터진 그녀가 무너지듯 주저앉아 깔깔거렸다.

 

”핸드폰 달라고, 우리 막내한테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연락하라고.“

”아, 아아... 죄, 죄송...합니다.“

 

그 말에 얼굴이 벌게진 재윤이 민망함에 몸을 비비꼬며 핸드폰을 내밀자 수빈이 바닥을 팡팡 차며 몇 번 더 큭큭 거리다가 재윤의 핸드폰으로 제 핸드폰 번호를 입력해 전화를 걸었다. 진동이 몇 번 울리고 핸드폰을 돌려 준 수빈이 진짜로 안녕을 고하며 돌아서자 재윤은 그제야 자리에 털썩 앉아 긴장했던 몸을 늘어뜨리며 테이블 위에 남아있는 아이스커피를 쭉 들이켰다.

 

”으아, 맛없어. 영빈이 형이 내려 준 게 훨씬 맛있다.“

 

마저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재윤의 핸드폰에 새로운 문자 수신 진동이 징징 거렸다.

 

다른 건 모르겠고, 영빈이가 널 좋아하는 이유는 알 것 같네. 너 강아지 같다. 우리 집 자몽이 같네.

 

낯선 열 한자리 번호는 수빈일 것이 뻔했지만 재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부터 자몽이가 누고? 집에 돌아가면 영빈에게 그것부터 물어 볼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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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림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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