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쟁빈] 사묘인뎐(蛇卯人傳)

뱀과 토끼의 이야기

쟁빈


 

 

장터를 돌아가는 큰길을 따라 아침부터 분주하게 하얀 비단이 깔렸다. 1리는 더 되어 보이는 비단길 끝에 한 송이 동백꽃같이 붉은 꽃신이 놓이고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어 비단의 가장자리를 따라 늘어서자 커다란 북소리가 둥둥 울렸다. 북소리가 끝나면 꽃신 앞에 가마가 내려앉았다. 지붕 끝에 붉은 등을 단 가마의 문이 열리자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사뿐히 발을 나린 신부가 꽃신에 발을 꿰었다. 가마를 뒤따르던 자들이 하얀 천을 펼쳐 신부의 얼굴이 가려지도록 양옆에 서고 신부는 자박자박 좁은 보폭으로 걸었다. 근래에는 보기 드문 성대한 혼사에 시끌벅적 모여든 사람들은 붉은 혼례복을 입은 신부의 머리 위로 축복의 말과 함께 붉은 꽃잎을 뜯어 날렸다.

 

하얀 비단길 위로 온통 붉은색이 흐드러졌다.


 

어제까지 흐린 하늘에 눈발이 거세더니 새벽녘부터 햇무리 뒤로 해님이 솟았다. 걷히는 구름을 물끄러미 올려보던 영빈은 ‘아래를 보시고 얼굴을 가리셔야 합니다.’ 하며 채근하는 목소리에 얼른 다시 얼굴을 내렸다. 추위에 코끝이 떨어져 나갈 듯이 시렸다.


어차피 쌍방으로 마음에도 없이 치러지는 정략혼인이라 이토록 거창하고 번거롭게 규모가 클 줄 몰랐다. 긴장되는 마음에 얇은 입술을 몇 번이나 감쳐 물다가 또 한 번 ‘얼굴을 가리소서.’ 하는 목소리에 활옷의 소매를 높이 들어 얼굴을 가렸다. 양손이 벌어지지 않도록 묶어 놓은 활옷의 소매 끈은 초야에 신랑이 풀어주어야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했다.

 

그나저나 아무리 정략혼인이라지만, 참 혼인날을 잘도 잡았다. 아무리 제 혼현이 눈토끼라도 한겨울에 눈밭에서 혼인이라니. 살을 에는 바람에 꽁꽁 언 뺨을 날카로운 겨울바람이 쉴 새 없이 할퀴는 바람에 영빈은 말없이 입술을 꾹 물었다.


***


뱀의 신부. 오늘 영빈이 새로이 얻게 된 감투 아닌 감투였다. 뱀신은 본디 십이지 중에서도 중립을 유지하는 가문으로 대대로 열두 가문의 대소사에서 심판을 맡는 자리였다. 음양 중에서도 가장 음의 기운을 타고났으며 성정이 냉하며 이성적인 것이 본질이라는 말도 있었다. 뱀 자체가 냉혈 동물이다 보니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가문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쉬이 열을 내지 않고 급하게 끓어오르는 일이 없으니 섣불리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심지가 곧은 인물들이 많았다.


하여 십이지 가문 중에서도 뱀신의 배필을 정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열두 가문의 수장과 직계들이 직접 한자리에 모여 긴 대화 끝에 만장일치라는 결과만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중립이라고는 하나 가지고 있는 육체는 인간이기에 어느 쪽이든 뱀 가문의 마음을 얻어 나쁠 일이 없었다. 중립이 권력을 향해 기울어지는 일은 쉬이 일어나지 않으나 역사에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 신중하게 고른 반려가 하필 뱀의 먹이인 토끼일 것은 무엇이람.

 

영빈은 이제야 실내로 들어서는 긴 행렬의 끝에 얼굴을 가렸던 팔을 내리고 굳은 표정을 애써 숨겼다, ‘부군께서 직접 소매 끈을 풀기 전까지는 얼굴을 반드시 가리소서.’ 잔소리 같은 시종의 말에 영빈은 이제 진절머리가 날 것 같았다. 어차피 이제 평생 얼굴 맞대고 살 부군인데 왜 얼굴을 가려야 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가 혼인을 하는 것인지 이 집안의 가노로 팔려 온 것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면서 벌써 숨이 턱턱 막혀 발걸음이 느려졌다.


십이지의 혼현은 자연의 먹이 사슬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동물의 혼현이 담겼다고는 하나 어쨌든 육체는 모두 인간이었다. 하여 토끼라고 뱀에게 잡아먹히거나 자연의 법칙에 따라 서열의 상하 관계가 따로 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물의 혼을 몸에 담았으니 본능적으로 꺼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윗분들의 일은 제 관심사가 아니었으나 그 일에 제 인생이 판가름 되는 것은 좀 부당한 일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물론 발걸음을 돌리기에는 이미 늦었지만.


[이번 뱀신은 영물이라더군.]

[백사라지 않소.]

[글쎄 날 때부터 머리카락이 하얗게 셌더랍니다.]

[어찌나 서늘하게 생겼는지 눈만 봐도 소름이 돋는다던데.]


저자를 걸어오면서 내내 사람들이 수근거렸던 이야기들은 영빈이 이 자리에 있는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했다. 팔려가는 거겠지. 알만한 이야기였다.

 

토끼는 본디 온혈 동물이지만 영빈은 이 나라, 현국에 몇 없는 눈토끼족이였다. 현국은 사시사철 기온이 낮고 건조한 바람이 부는 곳이었으니 토끼 같은 온혈 초식 동물이 살기 좋은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생명이 살지 않는다는 척박한 추위의 땅 아라사에 뿌리를 둔 눈토끼족은 상업과 무역이 발달해 언제나 먹거리가 풍족한 현국이 터를 잡기에는 참으로 좋은 곳이었다고 했다. 선조의 어느 대에 이곳에 터를 잡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영빈의 부모님 모두 이곳이 고향이었다.


 

뿌리는 하나이나 갈래가 다르므로 토끼 가문이라고 하여도 모두 같은 종족도 아니었다. 현국에 사는 눈토끼족이라고는 영빈과 영빈의 부모님, 딱 세 가족뿐이었다. 묘족 가문 안에서도 세력이라는 게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 가문의 권력에 의해 소 종족이 희생되는 것이었다. 같은 토끼지만 같은 토끼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배척.

 

혼인을 통한 가문의 유지를 위해 영빈은 오늘부로 묘족(卯族)이 아니라 사족(蛇族)가문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더 이상은 토끼조차도 될 수 없다는 소리였다.


 

백사, 영물. 어떤 의미로는 그 존재 또한 배척을 당하는 존재일 것이다.


인간의 지식을 뛰어넘는 지혜와 이 능력을 타고 태어난다는 천자. 선망의 존재는 두려움의 존재도 되는 것이었다. 하여 뱀신이 가진 중립의 힘을 제 쪽으로 기울이기 위해 늘 편 가르기와 아부를 일삼던 저 십이지 가문 수장들은 생각했을 터였다. 하늘이 내렸다는 영물에게는 그런 것이 통하지 않을 것이고, 아직은 나이 어린 영물의 힘을 빼는 것이 훗날 권력을 휘두르기에 가장 탁월한 선택이겠구나.

 

가장 힘이 없고 가장 나약하며 가장 재물로써 탁월한 역할의 존재를 맺어주면 되겠구나.

 

영빈은 맞물린 이를 아득 물었다. 이 모든 상황으로 미루어 영물이라는 백사를 볼품없고 무능하게 만들 최적의 개패가 자신이라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

 

 

대낮이었으나 빛이 들지 않는 방이었다. 온 사방에 검은 발을 드리워 캄캄한 방 한가운데 얌전히 앉은 영빈은 저를 데려다 놓은 시종들이 문을 닫고 돌아서는 소리를 듣고 팔을 내려도 되는가에 대해서 잠시 고민했다. 겹겹이 조여 입은 혼례복은 얼굴을 가리기 위해 팔 부분이 길게 늘어진 활 복이라 슬슬 팔이 저렸다. 인기척이 없는 걸 보니 슬쩍 내렸다가 부군 될 백사가 올 때쯤 다시 올리면 되지 않을까 싶어 눈치를 살폈다.

 

 

"무거우시지요?"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영빈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어깨를 움츠렸다. 너무 놀라 발작하듯 튀어 오르려는 몸을 애써 눌렀다. 분명 인기척이 없었는데? 동그란 눈이 휘둥그레 커지는 동안 목소리가 들려온 쪽에서 인영이 걸어 나왔다.

 

겨우 호롱불 하나로 밝혀진 방안에서 어른거리는 형체로 다가온 사내가 얼굴을 가리고 있는 영빈의 팔을 먼저 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영빈이 어버버 할 동안 사내는 영빈의 두 팔을 묶은 소매 끈을 풀고 팔을 내려 주었다. 아, 그제야 팔을 내려 사내의 얼굴을 본 영빈이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어리다. 약관(20세)은 되었을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런 것들이었다. 가문의 차기 수장이라고 하여 조금은 세월이 느껴지는 이립(30세)쯤의 남자이지 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말도 안 되게 앳된 모습이었다. 제가 이렇게 십이지 가문의 수장부와 얽힐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해서 어느 가문에 직계가 태어났다. 어느 가문의 누가 대를 잇는다더라 하는 소문들을 귓등으로 흘리고 산 세월이 조금 아쉬웠다.

 

“사족의 직계 장자 이가 재윤입니다.”

“아, 묘족의 김가 영빈입니다.”

 

웃기는 일이었다. 혼례를 치르기 위해 만난 두 사람의 통성명조차 오늘이라는 것이. 영빈이 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 올리는 재윤을 보며 제 고개도 함께 숙였다 들어 올렸다. 참 단정한 얼굴이었다. 남색의 복식을 차려입고 고동색의 차렵이 묵직한 어두운 혼례복을 입었으나 재윤의 얼굴은 참으로 희고 고왔다. 오직 호롱불 하나만이 불을 밝힌 이 암흑 같은 방에서 그 얼굴 하나만 환하게 빛났다. 영빈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우와…. 하고 조그맣게 탄성을 질렀다.

 

얼굴만큼이나 새하얀 재윤의 머리칼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정말, 백사였구나.

 

“신기하십니까. 제 머리칼이?”

“아, 죄, 죄송합니다. 그저….”

“그저…?”

 

“너무 아름다워서.”

 

자꾸만 재윤을 보며 탄식이 흘러나오는 제 입을 두 손으로 막고 창피함에 고개를 숙인 영빈의 귀에 재윤의 웃음소리가 나직하게 들렸다.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 봅니다. 하고 말하는 목소리가 어쩐지 들뜬 것 같아 영빈도 함께 웃었다.

 

“부인의 대문니도 토끼를 닮아 참 앙증맞습니다.”

“이건 토끼족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저도 그저 어여쁘다는 말을 한 것인데, 기분이 나쁘셨습니까?”

 

“...아니요, 아닙니다. 어여쁘다는 말을 싫어하는 이가 어디 있습니까.”

 

수줍어 얼굴을 붉힌 영빈이 입을 합 다물었다. 커다란 앞니 두 개가 묘족에 딱 어울린다며 어릴 적부터 놀림을 몇 번 당한지라 신경을 쓴다는 것이 재윤의 웃음 앞에서는 다소 무방비로 보여버린 참이었다. 한차례 웃음을 주고받으니 분위기는 더 가벼워진 듯했다. 수장의 직계라 하여 권위적이고 답답한 사람일 거라고 지레짐작을 했던 것이 미안할 정도로 백사의 실체는 좀 더 어리고 부드럽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혹여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올해 춘추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재윤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마주 앉아 묻자 재윤은 조금 머뭇거리며 답했다. 올해 스물둘입니다. 하고. 그 답에 영빈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정략혼이라 어느 정도의 나이 차는 각오를 했던 터였다. 어차피 가문의 의중인데 부군과 서로 척을 지고 살게 되어도 상관없다 결심에 차 발을 디딘 사족의 가문이었다. 처음 호롱불 아래서 재윤을 봤을 때, 그 미령한 신체에 감히 열다섯은 되었을까 짐작했는데, 헌데 스물둘이라니. 겨우 저와 한 살 차이건만 어찌 이리 작을 수 있단 말인가 싶어 섣불리 말을 보태지 않고 생각을 정리했다.

 

“제 겉모습이 이상하시지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뱀은 탈피를 하여 성장을 합니다.”

 

“예?”

 

신체는 인간이나 혼현의 모습으로 돌아가 탈피를 겪어야만 성인의 모습으로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 뱀은 다른 십이지와 달리 성장의 과정이 혹독하고 괴로운지라 심판자의 역할을 맡는다고들 하지요. 헌데 저는,

 

백사이니까요. 그 과정이 남들보다 더디게 오는 모양입니다.

 

 

영빈의 혼례가 결정되고, 영빈의 부모님은 무너지는 억장에 묘족의 수장을 찾아갔다가 몇 번이나 문전박대를 당했다. 백사의 소문은 생각보다 무성하고 두려운 것이어서 매번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나면 어머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수장의 집으로 찾아가 몇 번이고 대문을 두드렸다. 차라리 현국을 떠나겠다고 빌기도 했다. 그러나 힘이 없는 소종족에게는 이탈도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막대한 재물과 앞으로의 작위를 영위 받았으나 그것은 모두 영빈의 몸값이었다. 타국에서 이전한 종족에게 이 정도면 과분한 처사라며 모진 하대를 받는 부모님을 보다 못해서 영빈은 끝내 자의로 혼인을 수락했다. 흙바닥에 너부러진 모친의 몸을 일으키고 좋은 비단으로 옷을 지어 부모님께 입혀놓고 붉은색 혼례복을 입기 전날엔 어머니가 지어주신 밥을 꼭꼭 씹어 먹으며 웃는 얼굴로 그간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큰절을 올리면서 영빈은 울컥이는 울대를 삼키고 끝까지 웃는 얼굴로 돌아섰다.

 

뱀의 혼현을 가진 것이 아니라 뱀의 현신을 한 괴물이라더라. 그것이 아니면 반푼이라더라, 몇 년이 지나도 하늘의 뜻을 받지 못한 버림받은 천자라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지낸 지 벌써 몇십 년이 넘었다더라. 하는 소문들을 들었다. 무엇이 진정이든 영빈이 마음을 줄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바위처럼 굳히고 그저 그림처럼 앉아 있다가 생을 마감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리하면 부모님은 호의호식하며 내 자식이 행복하게 좋은 집에서 지냈다고 생각하시겠지. 집에는 연통 한 번 넣지 않을 마음으로 발을 들였다.

 

“슬프십니까?”

“슬프기보다는 송구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부인이 되실 분에게.”

 

그러나 이곳에 와서 마주한 이 하얀 사내애는 가문의 견제를 받으며 모진 배척을 견뎌내기엔 아직 너무 어리고 여리고 그저 자라지 못해 슬프고 그런 제 옆에 이유 없이 끌려온 영빈이 너무 미안한, 다정하고 따뜻해 보이는 이였다. 애정은 모르겠으나 눈을 마주친 순간 이미 정은 주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하지만 고요하고 다정하지만 차분한 백사, 재윤은 제 기척을 죽이는데 사력을 다하며 몸을 웅크리는 중이었다.


“제 신체는 벌써 7년을 멈춰 있었지요. 저는 줄곧 열다섯을 사는 중입니다. 집안사람들의 눈총에 숨이 턱턱 막히다가도 성체가 되어 몸이 다 자라고 나면 오르게 될 수장의 자리가, 더 무섭다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이렇게 나약하여 가문 사람들은 절 더러 반푼이라고 합니다. 반쪽짜리 천자라고도 하지요. 이미 혼사를 치를 나이가 훨씬 지났는데도 제게 와줄 배필 하나 찾지 못해 결국 그대를 제 앞에 강제로 앉혀두게 되었으니, 나는 그대에게 평생에 죄인일 것입니다. 그러니 제게 마음을 주지 못하셔도 좋아요. 제게 힘이 생기게 된다면 그대를 가장 먼저 이 집 밖으로 보내드릴테니.

 

 

초야는 단출했다. 그토록 성대한 행진과 화려한 의상은 그저 저자와 민심을 위한 보여주기식이었다는 걸 너무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을 만큼. 만 하루도 되지 않아 영빈은 재윤의 처지가 어떤지를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백사로 태어나 마지못해 오른 차기 수장 자리, 그러나 성장이 열다섯에 멈춰 버린 반푼이. 혼사 하나 제 손으로 해내지 못한 모자란 가문의 수치. 하지만 십이지 가문 모두에게 견제를 당해야 하는 하늘이 내린 천자.

 

재윤이 거주하는 별채는 고요하기가 절간과도 같았다. 영빈의 머리 위 가채를 내려 주고 겹겹이 입은 혼례복의 고름을 풀어 벗기며 편한 옷을 내어주었다. 성인이 되지 못한지라 초야의식은 탈피 이후로 미뤄졌다고 말했다. 분명 다 자라지 못한 재윤이 사내구실을 못하지 않겠느냐며 조롱의 의미를 담았겠지만 그건 재윤이나 영빈 모두 마음을 주고받지 못한 터라 다행이라고 여겼다.

 

침의를 갈아입고 함께 들인 주안상으로 배를 채우고 호롱불에 두런두런 그저 친우처럼 이야기를 나눴다. 사가의 별채에 갖힌 채 사람들의 시선에서 철저하게 숨겨진 재윤은 천방지축으로 저자를 뛰어다니며 자란 영빈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곧잘 웃음을 터트렸다. 영빈은 묘족에서도 외부에서 온 종족이라 문중의 사람들과는 친하지 않았는데 소동물 중에서는 제일 활달하여 골목에서 대장 노릇을 하며 자랐다는 말도 보탰다.

 

“그런 분이 이곳에 와서 어찌합니까, 답답하시겠어요.”

“이젠 당신이 있잖아요. 이리 말하면 불쌍한 우리 처지가 더 처연할지 모르겠으나 당신도 나도 어차피 문중의 눈 밖에나 버려진 사람들인데, 혼자일 땐 외로워도 둘이면 견딜 만하지 않겠어요?”

 

한참을 까르르 웃던 재윤이 호쾌한 영빈의 말에 잔잔한 미소를 띄웠다. 눈을 맞추고 함께 웃어주던 영빈이 재윤의 입가에 쏙 패는 보조개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뺨을 콕 찔렀다. 아...!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라 헉하며 손을 뗀 영빈이 미안해요. 너무 예쁘고 신기해서, 하며 거듭 사과하자 함께 눈을 크게 뜨고 놀랐던 재윤이 손사래를 치며 데굴데굴 눈알을 굴렸다. 아무리 어린 외모를 하였다고는 하나 기껏해야 저보다 한 살 어린 다 큰 성인 남성을, 그것도 이젠 제 지아비 된 자의 뺨을 함부로 신기하다며 만지는 일이 말이 되나 싶어 영빈은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창피함을 삼켰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그래도, 이리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되는 것인데….”

“왜 아니 됩니까?”

“예?”

 

“그대는 이제 내 아내가 되었고, 나는 그대의 부군이 아닙니까. 지금 내게 유일하게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대는.”

 

나의 어떤 곳을 어떻게 만져도 나는 그대라면 다 좋습니다.

 

 

쿵, 쿵, 쿵. 오늘 아침 행진을 시작할 때 들렸던 북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영빈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재윤의 목소리를 듣다가 별안간 휙 고개를 돌려 어두운 방을 밝히던 호롱불을 훅- 하고 불어 껐다. 북소리가 아니라 가슴이 뛰는 소리였다. 두 손을 겹쳐 세차게 뛰는 가슴팍 위로 올리고 꾹 누르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무슨 어린 애가, 저런 말을 저렇게 서슴없이 같은 사내에게. 물론 외형만 그렇지 어린 애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분명 저 말을 하기 전까진 제게 그저 어린 남동생 같았던 이라 더 당황스러웠다. 불타오르듯 열이 오르는 귓불을 숨기기 위해 불을 끄고 조그맣게 몸을 구긴 영빈이 갑자기 제 등에 얹어지는 재윤의 손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어디가 아프십니까?”

“아, 아... 아닙니다.”

 

“불을 끈 것이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뱀은 어둠과 상관없이 사위가 보입니다.”

 

지금 제가 보인단 말씀이에요? 재윤의 말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영빈이 숨까지 멈춰 버리자 재윤의 손이 영빈이 쥐고 있는 가슴께 위로 얹어졌다. 가슴이 아프십니까? 그리 묻는 목소리는 너무 다정한데 영빈은 영 맥을 차릴 수가 없었다. 대답하기 위해 입을 벌려도 나오는 목소리가 없어 두 눈을 꼭 감는데 재윤의 손이 이번에는 영빈의 이마 위로 얹어졌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추운날 밖에서 행진하시느라 고뿔이 든 것은 아닙니까? 의원을 부를까요?

 

세상 차분한 그 말에도 심장이 달음박질을 멈추지 않아 한참이나 허우적거리던 영빈이 아니라며 어렵사리 재윤을 밀어내고 거리를 벌렸다.

 

“너무, 어두워서.”

 

제가 불을 꺼놓고 말도 안 되는 소리란 걸 알고 있지만, 딱히 화제를 돌릴 거리가 없었다. 멀어진 재윤과의 거리에 그제야 숨을 몰아쉬던 영빈은 덜컹거리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빛무리에 눈을 깜짝였다.

 

“제가 어둠에 익숙하여 그대를 배려하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다행히 달빛이 밝으니 아픈 게 아니라면 잠이 들기 전까지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시겠어요?”

 

창문을 연 재윤이 방안으로 들이치는 빛무리 속에서 하얗게 웃었다. 보름달이 휘영청 뜬 창밖으로 온통 세상이 푸른빛이었다. 재윤과 웃고 떠들며 서로를 위로하는 동안 시간이 꽤 흐른 모양이었다. 침의 위에 가벼운 옷을 걸치고 재윤이 이끄는 대로 손을 잡고 별채의 뜰로 나가는 동안 영빈은 꼭 뭐에라도 홀린 듯 저를 이끄는 재윤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좋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저 사내, 이재윤은 참 좋은 사람인 것 같다고.

 

 

***

 

 

푸른빛이 은은하게 도는 별채의 뒤뜰은 작은 연못을 가로지르는 작은 정자가 함께 있었다. 간밤에 내린 눈이 녹지 않아 함께 걷는 걸음이 하얀 눈밭 위로 선연하게 찍혀 있었다. 고요한 밤, 온통 사위가 눈밭이었다. 얼어붙은 연못 위로 쌓인 눈은 포근하게까지 보였다. 영빈은 그 고요하고 반짝이는 풍경이 퍽이나 재윤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돌아본 재윤의 얼굴이 여전히 영빈을 향해 웃고 있었다. 뺨에 패인 보조개도 그대로였다. 달빛 아래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머리칼은 진정 눈, 포근하게 쌓인 눈과도 같았다.

 

손을 뻗어 재윤의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었다. 저와 키가 비슷한 탓에 눈높이가 비슷한 재윤은 이보다 더 자라 성체가 되면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재윤은 제 머리칼을 쓰다듬는 영빈의 손길에 놀란 듯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 머리를 대어주고 있었다.

 

“눈같이 하얘서, 차가우리라 생각했는데,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오늘 그대가 내게 해 준말들은, 내가 태어나 모두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무슨 말들을 했나요?”

 

“내 머리칼이 예쁘다고.”

 

내 하얀 머리칼이…. 따뜻하고 부드럽다고.

 

그렇게 말하는 재윤은 너무 부끄럽고 쑥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어서 영빈은 세상 행복하게 웃으며 계속 재윤의 머리를 살살 쓸었다. 이리 어여쁜데, 어여쁘다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까? 깨끗하게 갈라진 눈매도 차분하고 뚜렷한 눈썹도 끝이 둥근 코도 모두 어여쁩니다. 그중에서 가장 어여쁜 것은 그대의 머리칼입니다. 꼭 눈과 같이 하얗지 않습니까, 이젠 눈을 보면 당신의 머리칼이 생각날 것 같습니다.

 

“이왕 하늘이 준 것이니, 두려워 말고 세상을 거느리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머리칼을 가지고 태어나 세상이 손에 쥐어지는 것이라면, 그 또한 그냥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당신이 강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미약하나마, 그 길에 제가 힘을 보탤 수 있다면 더 기쁘겠지요.”

 

문중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부모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살아온 스무 해가 넘는 시간 동안 재윤은 점점 제가 백사라는 사실이 두렵고 원망스러웠다. 저를 아름답다고 어여쁘다고 말해 주는 이는 처음이라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물고 눈물을 삼켰다. 어린 애의 외향을 하고 있으나 사내로 태어나 타인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만큼 꼴사나운 일도 없는 것인데, 하물며 제 진짜 나이를 알고 있는 제 안 사람의 앞에서 이렇게 눈물 바람이라니 창피한 일이었다. 그러나,

 

“내 앞에선 울어도 됩니다. 당신의 말대로 우리는 혼인을 하였고, 내가 당신의 것이 듯이 당신도 나의 것이라면. 우리는 굳이 서로에게 타인일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영빈이 그런 말을 남기고 재윤의 앞에서 두 팔을 벌리는 순간, 재윤은 그저 그 작은 품에 안겨 속절없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

 

 

재윤이 아팠다. 간밤에 찬바람을 쏘이며 울더니 체력이 다했는지 벌써 며칠이나 앓아눕는 통에 영빈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답답한 것은 가문의 태도였다. 재윤이 아프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별채의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재윤은 영빈과 격리되었다. 가벼운 고뿔에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지만 차기 수장인데 어련히 극진히 시중을 들까 싶어 발만 동동 구르며 지켜보다가 닷새가 지나고는 얼굴 한 번이라도 보게 해달라며 애원했다.

 

“지금 아픈 것은 제 지아비인데 어찌하여 제가 볼 수 없습니까.”

“평소의 고뿔과는 결이 달라 의원의 진료가 필요한 사안입니다. 병증이 무엇인지 확인이 될 때까지는 문중의 누구도 이 방안에 들이지 말라는 명이 있으셨습니다.”

“누가 그런 명을...!”

 

“수장 어르신이셨습니다.”

 

재윤이 병을 앓는 동안 방을 드나드는 것은 의원과 시중을 드는 가솔 두엇이 전부였다. 닷새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자리에 누웠는데 어떻게 부모라는 사람들이 코빼기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있을까. 매일 재윤이 머무는 방문 앞을 지키는 영빈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물며 방안에 누구도 들이지 말라 명을 한 것이 재윤의 아버지라는 말에는 저도 모르게 그만 속에 있는 무언가 툭 떨어진 느낌이었다. 버림을 받은 천자라더니. 성장하지 못하는 반푼이라더니. 진정 저 사람의 곁에 남은 이가 이리도 없을 수가 있나. 제가 다 억울하고 분해서 멀뚱이 서 있다 말고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쳤다. 재윤이 이 집안에서 혼자라고 했던 말은 농이 아닌 모양이었다.

 

재윤을 만났던 처음, 그날 밤 달빛 아래서 품에 안았던 어린 사내애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애정이 아니라 정을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이토록 애끓은 마음이 그저 정이기만 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성체가 되어 수장의 자리에 오르면 저를 이 가문의 밖으로 보내 주겠다는 재윤의 말이 기뻤다가도 아쉬웠다면 그것 또한 정이기만 할까. 영빈은 그저 재윤이 무사히 이 방 밖으로 걸어 나오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초야의 밤 이후 재윤의 얼굴을 보지 못한지 열흘은 더 지나간 날이었다. 아침나절부터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영빈은 별채의 뒤뜰을 홀로 걸었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걸음마다 뽀드득 소리를 내는 눈이 서러워서 눈물을 뚝뚝 떨궜다. 첫날밤에 소박맞고 쫓겨나는 며느리도 이보다 서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재윤이 보고 싶었다. 보지 못하게 하니 마음이 점점 더 커져서 한참을 울다가 돌아본 자리에 눈길 위를 걸어온 발자욱이 저 혼자의 것이라 더 서글퍼졌다. 정자에 오도카니 앉아 온통 새하얀 눈이 흩날리는 허공을 바라보며 이제 그만 혼자 두라고 닿지도 않을 말을 삼켰다. 보고 싶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그걸 깨달은 순간부터 매일이 눈물이었다.

 

재윤이 깨어났다는 소리를 들은 것은 그로부터도 삼일이나 더 지나서였다. 이렇다 할 병증도 알려주지 않고 그저 위중하다는 소리만 들은 터라 매일 눈물이던 영빈은 아침부터 제 방을 찾아 재윤이 일어났다는 말을 남긴 채 사라지는 시종에 몇 번이나 감사하다는 말을 남겼다. 우느라 퉁퉁 부어 꼬질한 얼굴을 씻어내고 의복을 단정하게 갖춰 입은 채 꼭 첫날 밤을 앞둔 새색시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재윤이 있는 방문을 열었다.

 

벌컥 열리는 문에 안에 있던 인영이 문쪽을 돌아보고는 세상 반가운 눈을 해 보였으나 영빈은 방 안쪽으로 보고는 문지방을 넘어 들어서지도 못하고 다시 문을 닫았다.

 

“부인!”

 

부인? 누가요? 저를 부르신 겁니까? 낮고 굵은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던 영빈이 금세 벌컥 열리는 방문에 놀라 옷자락을 밟고 휘청거렸다. 악- 소리도 못 내고 미끄러져 뒤로 넘어가려는 걸 저도 모르게 눈앞의 사내를 향해 손을 뻗자 사내는 팔을 뻗어 영빈의 허리를 깊숙이 안아 제 품으로 와락 끌어안았다. 쿵, 쿵, 쿵. 별안간 다시 뛰는 가슴이 넘어질 뻔해서일까 싶다가도 익숙한 느낌에 입을 틀어막은 영빈은 저를 끌어안은 사내의 어깨에 색색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재윤…. 당신이에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본능이 말해 주고 있었다. 눈앞에 이 거대한 사내는 영빈의 지아비라고.

 

“내 머리칼이 더는 어여쁘지 않습니까?”

 

그대의 대문니는 여전히 너무 사랑스러운데, 제가 너무 많이 변한 거겠죠? 농이 섞인 질문을 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너무 낯설었다. 넘어지는 영빈을 끌어안느라 기울어진 몸을 따라 사내의 머리칼이 영빈의 눈앞으로 흩어졌다. 새하얗게 빛나는 머리칼은 분명 그이의 것이라 영빈은 눈앞의 남자가 재윤이라는 확신에 사내의 목에 답싹 매달려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지금, 농이 나오십니까! 솜방망이 같은 손으로 가슴팍을 치는 영빈의 손목을 잡고 재윤이 소리 내어 웃었다. 여전히 제게 매달린 영빈을 바로 세우고 한참이나 내려다보다 신기하네요. 하고 말했다.

 

“분명 열흘 전에 저와 키가 비슷했던 것 같은데. 왜 이리 작아지셨습니까?”

 

영빈보다 머리 하나는 댕강 올라간 눈높이가 영 다른 사람 같다가도 다정하게 눈을 맞추며 씨익 웃는 깨끗한 눈매와 입가 옆에 쏙 패는 보조개가 너무나 익숙한 그것이어서 영빈은 엉엉 울면서도 재윤의 허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탈피가 끝나 성체가 되면 어떤 모습일까, 마냥 어린 동생처럼 살가이 보이던 미령의 사내애는 이젠 한참이나 올려다보아야 눈을 맞출 수 있는 건장한 사내가 되어 있었다.

 

그간 눈물도 많아지신 것 같구요. 자꾸만 실없는 농을 하며 영빈을 달래려 애쓰는 재윤의 다정한 목소리에 차차 울음을 멈춘 영빈이 헐떡이는 숨을 고르게 쉬며 다시 한번 그 낯설고도 익숙한 얼굴을 올려보았다.

 

탈피.

 

뱀 가죽 아래 더 자란 몸을 세상밖에 꺼내기 위해 허물을 벗어내는 사족의 성장. 그 과정이 유별나게 고통스러워 그 과정을 이겨낸 자만이 성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재윤이 말했다. 오롯이 혼자 고통을 감내해야만 진짜 자랄 수 있다고. 그러나 성체로 자라게 되면 가문을 책임지는 자리로 올라서야 하는 것이 두려워 탈피 또한 두렵다고.

 

한 뼘은 더 자란 키만큼 딱 벌어진 어깨와 더 길어진 백발이 낯설다가도 저를 바라보는 다정한 눈빛은 변한 바가 없어 여전히 가슴이 북을 울리듯 울렸다.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가 재윤의 뒤에 앉은 영빈이 참빗으로 재윤의 머리칼을 한데 모아 매듭 끈으로 묶어주는 중이었다. 재윤은 성체가 되기에 두렵다고 말했던 것과 달리 어쩐지 조금 신이 나 보이기도 했다. 탈피는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하는 질문에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부정하던 재윤은 기분이 좋으십니까? 하는 질문에는 곧잘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당신보다 내가 더 크지 않습니까. 그게 좋습니다. 당신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랐으니까요.' 그리 답하는 재윤의 어깨가 너른 게 느껴져서 영빈은 저도 모르게 뾰족하게 입술을 오므렸다. 어쩐지 쑥스러운 느낌이었다.

 

“성체가 되셨으니 수장의 자리에 오르실 참입니까?”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힘을 가지면 제일 먼저 저를 이 집안 밖으로 내보내 주신다고 하셨지요.”

“... ...그렇게도 말하였지요.”

 

“허면 저는 혼인한 지 스무날도 지나지 않아 소박을 맞게 되겠군요.”

 

왜 이렇게나 억울하고, 아쉽고 속상한 것일까. 백날을 생각해봐야 답은 하나일 것이다. 재윤의 머리칼을 묶은 매듭을 잘 정리해 넘기고 나기 한층 더 훤칠한 얼굴이 드러났다. 영빈은 눈토끼족이라 탈피와 관련된 식견은 없으나 이렇게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자랄 수 있다는 게 좀 놀랍기는 했다. 신기하고 아쉽고 속상하고, 기쁘고. 온갖 감정들이 휘몰아쳐 아무 말도 못 한 채 재윤의 옆에 털썩 주저앉은 영빈이 재윤의 어깨 즈음에 머리를 대고 스르륵 기대었다.

 

“부인.”

“...”

 

“혹시 뱀신의 신부를 고르는 자리에 누가 가게 되는지 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각 십이지신 가문의 수장과...”

“직계 장자가 차기 수장의 명분으로 함께 가게 되지요.”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걸까 싶다가 번뜩 스치는 생각에 재윤을 올려다본 영빈이 저를 여전히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는 두 눈에 설마 하는 얼굴로 재윤을 응시했다. 재윤은 말없이 배시시 웃으며 영빈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엄지로 젖은 뺨을 문질러 닦아 주었다. 재윤의 손이 닿는 손에서 열이 오르는 느낌에 손바닥에 뺨을 비빈 영빈이 다시 울먹거리자 재윤은 영빈을 다시 품에 안았다.

 

뱀신의 신부는 열두 가문의 수장과 직계 장자가 모두 모여 그 대상에 대한 만장일치가 이루어져야 결정될 수 있었다. 지금 재윤의 말은 그 자리에 재윤이 있었고, 그는 스스로 영빈을 택했다는 말이었다. 날 어찌 알고 선택할 수 있단 말이에요. 영빈의 물음에 재윤은 그저 어느 날 보았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가문을 벗어나고파 짧은 가출을 감행 했던 어린 날, 제 또래이면서 자기와는 전혀 다른 얼굴과 표정으로 세상 햇빛을 모두 받고 빛나던 어린 영빈을.

 

“부인께서는 진정 그 골목의 모든 아이들을 모아두고 대장 놀이를 하고 계셨지요.”

 

저토록 밝은 사람이라면, 저렇게나 빛나는 사람이라면. 그날부터 그대가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그 뒤로 집안 어른들께 잡혀 꾸중을 들으며 바깥출입을 하루 두 식경씩 허락받았는데, 나는 오롯이 그 모든 시간을 당신을 쫓는 데 사용했습니다.

 

“하루는 누가 토끼야, 하고 불러 그대가 토끼라는 걸 알았고. 하루는 누군가 빈아- 하고 부르기에 그대의 이름이 빈이란 걸 알았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대를 내 배필로 들이고 싶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냐고 물으면, 그저 당신을 보고 연정을 느낀 모양이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줄곧 성인이 되어서도 당신을 생각했으니까요. 하여 당신이 진정 내 사람이 되어 이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 나는 당신만은 나처럼 외면받고 배척당하지 않도록 지켜야겠다고 혼자 다짐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가만히 있었던 것은, 두렵고, 자신감이 없고. 내가 나로 있을 때의 자존감이 모자란 탓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닙니까?”

 

“혼자가 아니니까요.”

 

아주 마음에 드는 답이었다. 영빈은 그 말에 활짝 웃었고 재윤은 그런 영빈을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성체가 되면 그대를 이 가문의 밖으로 내보내 주겠다 약조했지요. 네, 저는 분명 그리 말했습니다. 허나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여 어제의 마음이 다르고 오늘의 마음이 다르다 하였습니다. 하여 나는 지금 전혀 다른 꿈을 꿉니다.

 

어른이 되는 것이 두려웠던 내가 성체가 될 수 있었던 건 영빈, 그대가 내 곁에 있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바라 건데 그대 또한 나와 마음이 같아 내 곁에 그대로 있어 주시겠다면.”

 

그 이후 재윤이 뱉은 고백은 영빈이 지금껏 들어온 어떤 혼인의 서약보다 진정으로 가슴 떨리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바라 건데,

그대 또한 나와 마음이 같아 내 곁에 그대로 있어 주시겠다면.

나는 이제 하늘이 내린 자가 되어 우리를 버려두었던 세상을,

 뒤집어 볼 생각입니다.

 

함께 해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묻는 재윤에게 영빈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라고.

 

 

 

 

 

 

 







쟁빈 계절 합작

겨울, 눈 으로 참여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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