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ostrophe (어포스트로피)

Apostrophe 01

노을

Apostrophe :: 생략


김석우 x 강찬희



노을이 예쁜 날이었다.

조금 더웠던 낮을 시원한 바람이 훑고 가는 늦은 오후였다. 춘추복은 덥고 하복은 추운 애매한 날의 오후라 찬희는 하복 위에 후드집업을 덧입었다. 하교 시간은 한참 지났고 주번에게 받아 둔 열쇠는 후드집업의 주머니 안에 고이 모셔진 채였다. 기다리는 이에겐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아직도 안 끝난 건가 싶어 뾰로통한 표정으로 다리를 달랑거리는데 아래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벌떡 일어나 창문 밖으로 금방 간다고 손을 흔들었다. 급하게 창문을 닫고 교실 문을 닫아 자물쇠를 잠그고 앞문 창틀 위에 열쇠를 끼워 넣었다.


먼저 가라니까 왜 맨날 기다려.

혼자 가기 싫단 말이야.

그러니까, 애들 갈 때 같이 가면 되지.


대꾸를 말았다. 그 애들 속에 형은 없잖아. 형 기다린 거지. 왜 맨날 모르는 척 굴어?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한 말들을 가득 담아 입술을 삐죽였다. 삐졌어? 하고 묻는 소리에 부러 발걸음을 쿵쿵거리며 앞서 걸었다. 어차피 저를 잡아 줄 걸 알아서 앞 서는 걸음에도 가슴께가 간질 거렸다.


"찬희야-"


제 이름을 부르며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뒤를 돌아 보면 노을을 닮아 노랗고 빨갛게 반짝거리는 머리칼도 좋았다. 커다란 키만큼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제 걸음을 따라잡아 같이 가자며 왜 혼자 가, 하고 활짝 웃었다. 아, 예쁘다. 웃는 얼굴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


"노을아 이리와-"


아빠아- 하고 종종 달려와 품에 폭삭 안기는 아이를 찬희가 번쩍 안아 올렸다. 보들보들한 복숭아 빛 뺨에 뽀뽀를 쪽 해주고 뛰지 말랬잖아, 하면서 타이르듯 말하자 찬의 뺨에 뽀뽀를 돌려주고는 아빠 좋아서! 하고 까르르 웃었다. 꼭 닮은 얼굴 두 개가 마주보고 입꼬리를 끌어 올린 채 환하게 웃었다.


"엄마 나 갈게, 나오지 말고 들어가요."


아들 목소리에 손자 녀석 외투를 입히다 말고 헐레벌떡 뛰어온 어머니가 제 자식을 품에 안자마자 간다는 소리에 섭섭한 얼굴로 밥이라도 먹고 가지- 하셨다. 죄송한 마음이 들면서도 오늘은 야근이 길어져 일찍 씻고 자고 싶어 부러 현관에서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귀가를 서두르니 아쉬워서 저러시는 모양이었다.


"밥 대충 먹었어, 지금 시간이 몇신데. 내일 노을이 픽업 좀 부탁드릴게요. 요새 계속 야근이라."


미안 엄마. 한숨을 폭 내쉬는 그늘 진 어머니의 얼굴을 일부러 외면하며 애교섞인 얼굴로 샐샐 웃은 찬희가 노을아 할머니랑 빠빠해, 하고 빨리 시선을 돌렸다. 늦은 시간까지 제 아빠의 퇴근을 기다리던 노을이는 여태 쌩쌩한지 동그란 눈을 굴리며 할머니 빠빠! 하고 곧잘 손을 흔들며 찬희의 말을 따라 했다.

본가가 있는 아파트의 바로 아래층에 자리 잡은 노을이와 찬희의 집은 부모님이 알아 봐주신 곳이었지만 처음에는 완강하게 반대했던 곳이었다. 지금은 매우 감사한 것 중 하나였으나 대놓고 저를, 그리고 아이를 맡기는 일이 되어 버릴것 같아 손을 빌리는 느낌이 들었다. 엄마 힘들어, 그냥 사람 쓰면 돼. 요새 24시간 보육원도 있고, 낮에만 잠깐 맡기면 되지. 그땐 그런 말을 참 쉽게도 했었다. 애 키우는 게 뭔지도 몰랐던 철없던 때였다. 노을이를 낳기 세 달 전 쯤에 부자는 단 둘만의 집을 가지게 되었다.


감히 아이를 봐 달라는 말도 쉽게 할 수가 없었다. 그것마저 부모님에겐 상처일까 봐 그랬다. 찬희는 미혼부라는 이름이 제겐 평생 갚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했다. 노을이를 선택한 제 과거를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으나 그게 아들이 가려는 길에 늘 응원을 던지던 부모님에겐 선택 외의 길이라는 것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마른 배 속에 아이가 있다며, 불쑥 집에 돌아와 사흘 내내 눈을 뜨면 울고 눈을 감으면 잠만 자던 찬희를 깨워 '살리고 싶으면 먹어라' 하고 죽을 쑤어 내밀던 어머니의 말에 또 얼마나 울었더라. 살고 싶으면 이 아니라 '살리고 싶으면'. 분명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찬희는 그 날의 어머니도 저를 살리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이 들자 또 어딘가 무너져 내렸다.



"노을이 오늘은 뭐 하고 놀았어?"


아이는 잎새반 강노을, 이라고 적힌 찬희의 손바닥만 한 노란 가방에서 주섬주섬 쉬지 않고 무언가를 계속 꺼냈다. 알림장, 꽃밭이 그려진 찢어진 스케치북, 노을이 제일 좋아하는 노란색 색연필, 간식으로 나온 머핀 같은 것들. 찬희는 피식 웃으며 노을이가 한 입 베어 문 것이 분명한 초코머핀을 들어 올렸다. 아들, 이건 왜 가져왔어? 


"으응~ 아빠 주려고! 노을이가 먹어 봤는데 너무 맛있어서 아빠 주려고 선샌님 몰래 가꼬 온 거야!"


또래보다 말이 빠른 노을이는 5살인데도 제법 어른처럼 말했다. 발음이 다 새긴 해도 대화가 통한다는 게 얼마나 신기했는지 노을의 말이 막 늘어날 즈음엔 말이 느리고 말수가 별로 없던 찬희도 매일매일 노을에게 이것저것 말을 시키고 되묻고 그랬다. 기특하게도 너무 맛있는 걸 더 먹지 않고 꾹 참으면서 아빠랑 같이 먹기를 기다렸다는 말에 찬희는 야근에 지친 피로가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걸 느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시간이 좀 아깝기도 했다. 지금 너무 예쁜데, 더 자라지 말아라, 아들. 찬희가 노을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이들 간식용으로 유치원에서 나눠준 머핀은 5살 아이의 한입에 벌써 3분의 1이나 사라지고 없을 정도로 작은 크기였지만 이 순간 찬희의 눈에는 참 커다랗게 보였다.


"원래 자기 전에 간식은 안 되는데 아직 양치하기 전이니까 아빠랑 한 입씩 나눠 먹고 잘까?"


누가 듣는 사람도 없이 둘 뿐인 집안에서 찬희가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듯 노을의 코앞으로 다가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근소근 속닥였다. 찬희의 비밀스러운 제안에 노을이 기쁜 표정으로 응!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꼬닥거렸다. 아이, 예뻐라- 찬희는 세상 기쁜 표정으로 노을의 뺨에 입을 맞췄다.


***



아이는 자주 아팠다. 너무 어린 나이에 불완전한 오메가의 몸으로 낳은 아이라서 그런걸까, 찬희는 노을이 아플 때마다 가슴이 철렁하는 동시에 자꾸만 이유 모를 죄책감이 생겼다. 아이가 생겼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 무슨 생각을 했더라.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나한테. 그런 것들 중 뭐하나라도 긍정적인 생각은 없었다.

낳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죽지 않기 위해 부모님을 찾아 왔지만 이대로 같이 죽어도 좋지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사흘 내도록 잠만 잤었다. 그때의 아이는 누구에게도 축복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가, 그래서 이렇게 자주 아픈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찬희는 고열로 앓아누운 노을의 뜨끈한 몸을 품에 안고 속상함에 상념에 잠겼다가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죄송해요, 한창 바쁜 거 아는데. 애가 열이 너무 심해서요."


잠이 부족한 제 아빠를 알았는지 간밤엔 고롱고롱 잘 자던 아이가 아침에 유치원 등원을 시키려 씻기려고 보니 통 잠에서 깨질 못해 이상하다 싶었다. 찬희의 상사는 다행히 사정을 잘 배려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녀도 아이가 있는 워킹맘이라 더 이해를 해주는 것도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뭐, 얼른 병원 가 봐. 회사는 걱정하지 말고 내일 얘기합시다.' 짧은 통화를 끝내고 칭얼거리는 노을의 등을 토닥였다.

외투로 두껍게 감싼 노을을 품에 안고 찬희가 주차장으로 내려와 제 차의 뒷좌석 문을 열어 유아용 카시트에 노을을 앉혔다.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고 제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훌쩍거리며 목에 매달리는 노을의 여린 뺨에 쪽쪽 두 번 입을 맞추는데 입술 끝으로도 열감이 훅훅 오른게 느껴졌다. 39.7도, 집에서 나오기 전에 체온계에 찍힌 온도는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잠시 잠깐 이었는데 갑자기 열이 너무 심하게 올랐다.


"노을아, 조금만 참자. 열 쑥 내리고 괜찮아지면 아빠랑 오늘 종일 같이 있자. 응?"


종일 같이. 제 아빠랑 떨어지기 싫어 눈물만 퐁퐁 쏟던 아이는 그 말에 시무룩해진 얼굴로 눈물을 꾹 참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 목을 끌어안은 노을의 손을 풀고 찬희가 얼른 운전석 문을 열어 자리에 앉아 히터를 약하게 틀었다. 환절기긴 했지만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라 방심했다. 미세먼지도 심한데 최근에 활동량이 늘어버린 노을이랑 외출이 잦았던 것도 같고. 마음이 급하고 우울했다.



"강노을 환자 보호자 분."


검사가 꽤 오래 걸렸다. 그 새 아이는 코피가 터져 엉엉 울더니 고열에 토를 두 번이나 했다. 결국엔 입원 검사를 권유하기에 연차를 이틀로 늘렸다. 야근이 이어지던 회사 업무에 거듭 죄송하다고 하는 찬희를 향해 죄송하면 노을이 빨리 퇴원하게 간호 잘해. 하고 쿨하게 연차승인을 해준 팀장님께 백 번 감사했다. 아이를 핑계로 직장에 피해가 되는 건 싫었지만 부모가 되어보니 아이보다 소중한 건 결국 없었다. 나중에 부서에 커피라도 돌려야 겠다 생각하며 전화를 끊었다.

아침에 아이를 맡기기로 했는데 출근 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없어 걱정하신 어머니가 뒤늦게 찬희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노을이 아프니까 아무 생각도 없이 병원으로 내달렸던 찬희가 그제야 아무것도 아니라며 그냥 열감기라고 둘러댔다. 열감기에 무슨 입원씩이나 하냐며 부모님이 성화였다. 노을인 면역력이 약해서 그렇데. 단순 열감기가 아닌 것 같다는 의사의 말에 머릿속이 새하얘졌지만 마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고 마음을 다잡으며 태연한 척 전화를 끊었다. 내가 나중에 검사 끝나고 전화 드릴게, 엄마. 전화를 끊자마자 아빠아- 하고 저를 부르는 노을의 목소리가 들렸다. 검사를 하느라 수면 마취를 하고 한숨 자고 일어난 노을이 정신이 들자마자 찬희부터 찾는 소리였다. 응, 아빠 여기 있어. 가까이 다가가 작은 손바닥에 쪽 입을 맞춘 찬희가 병원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며 안 좋은 소리를 듣느라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가까스로 웃음을 보였다.

고사리 같은 손 등에 커다란 바늘이 꾹 꽂혀 있었다. 아프진 않을까, 여린 아가 피부에 벌써 푸르스름 멍이 들었는데도 아이는 찬희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 터질 것 같은 기분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입안 쪽의 여린 살을 꼭꼭 씹었다. 제가 웃어야 노을이 웃을 테니까. 물끄러미 병원 침대위에 누워 있는 노을이를 바라보는데 눈꼬리가 순하게 쳐진 모양이 찬희와는 사뭇달랐다. 어쩌면 이런 것까지 날 하나도 안 닮았을까. 그 사람도 계절마다 한 번씩 크게 앓았다. 노을에게 저 눈을 물려 준 사람이 문득 떠 오른건 아이가 아프다는 말을 들어서 일 거라고 넘겼다.


"힘들었지 우리 아들?"

"아니, 하나도 안 아팠어. 꿈에 놀이동산 놀러 갔어, 아빠랑."


'노을이 키 이마안큼 커져서 아빠랑 놀이기구도 많이 탔어.' 마취제 성분에 잠이 그득 쌓인 눈으로 노을은 계속 제 아빠를 보고 싶어서 쉴 새 없이 종알댔다. 조그만 얼굴에 찹쌀떡 같이 둥글던 뺨이 하루 새 살이 내린 느낌이라 안쓰러운 마음이 든 찬희가 노을의 동그마한 배를 느리게 쓸었다. 아빠 손은 약손, 그거 해 줘. 찬희의 손길이 좋아서 노을이 배시시 웃었다. 또래보다 키가 작은 노을이는 아직 1m도 채 되지 못했다. 저를 닮아 덩치도 작은 게 못내 속상한데 할머니랑 같이 본 드라마에 놀이동산이 나왔다고 가자고 모처럼 칭얼거리는 걸 키가 작아 어차피 못 간다며 바쁜 회사 대신 핑계를 대었더니 그때부턴 꼬박꼬박 우유도 챙겨 먹었다. 

한 번쯤은 같이 가줄걸. 마음 놓고 놀아 줄걸.

자꾸만 뜨거워지는 눈가를 꾹 누르고 눈이 아프냐고 묻는 노을이의 머리칼에 또 입을 맞췄다. 아니, 그렇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덜덜 떨리는게 느껴졌다. 노을이 대신 제가 아팠으면 싶어서 목소리에 더해 손끝이 잘게 떨렸다.



"자주 열이 나기 시작한 건 최근인가요?"

"환절기 때마다 꼭 앓아요. 최근에 자주 열이 나긴 했는데, 해열제가 곧잘 듣기도 했구요…. 조산으로 태어나서 면역력이 약했거든요…. 심각한, 건가요?"


"머리가 아프다거나, 어디 다른 부위가 아프다거나, 그런 언급은 없었고요?"


노을의 주치의는 명확한 대답없이 자꾸만 말을 돌렸다. 찬희가 알아볼 수 없는 전문용어가 가득한 차트를 팔랑팔랑 무심하게 넘기는 의사의 손가락에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이 주먹을 꾹 쥐었다. 어디가, 아프다고 했었나? 아이와 함께한 시간은 최근엔 저보다 어머니가 더 많았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은 상태로 어머니께 아이의 상태를 물을 수가 없었다. 찬희는 되도록 최근의 기억을 더듬었다. 저녁을 같이 보냈던 가장 최근이 일주일 전쯤이었다. 미안하고 속상한 마음에 절로 눈썹끝이 내려갔다. 그러고보니 아이는 그때도 아팠었다.


"오늘처럼, 열이 나면 코피가 나기는 했어요. 자주 그랬는데…."


안아 달라는 어리광인 줄 알았다. 찬희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아빠랑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긴 아이는 퇴근 후엔 잠자리에 들기까지 찬희의 옆에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안아줘, 토닥여줘, 아빠 나 배 아픈 거 같아. 하면서 자주 안겨 왔다. 제게 붙어있기 위한 어리광이라고, 바보처럼 그렇게 생각했다. 매번 야근하는 아빠한테 짜증 한 번 낸 적도 없는 속 깊은 아이였는데, 그냥 어리광이라고 생각했던 제가 너무 서럽도록 미안했다.

찬희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뒤편에서 잠자코 담당 교수의 말을 듣고 있던 영균이 찬희의 어깨를 꾹 쥐었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는 찬희에게 괜찮냐고 입 모양으로 물었다. 찬희는 처음으로 고개를 도리질 쳤다.


안 괜찮아, 안 괜찮은 것 같아.


***



병원 내부에는 작은 프랜차이즈 카페가 있었다. 서너 개 남짓한 테이블 한 편에 넋을 놓고 있는 찬희를 끌어다 앉힌 영균이 따뜻한 허브티 두 개를 주문하곤 테이크 아웃 잔이 나올 때까지 데스크에 기대 찬희를 조금 먼 거리에서 바라봤다. 핼쑥한 얼굴이 파리해 보였다.

영균이 소아청소년과 레지던트가 되었을 때, 찬희는 이제 노을이 아프면 너한테 오면 되겠다며 장난스레 말했다. 어릴 때부터 곧잘 아픈 노을이는 영균이 전공을 선택할 때 소아청소년과를 선택한 이유 중에 하나기도 했으니까. 찬희가 그런 말을 했을 때, 영균은 그냥 웃었던 것 같다. 아프지 말라고 말해줬어야 했는데 어차피 기우였겠지만 세상 어떤 사람도 제 주변 사람이 쉽게 아플거라고 생각하지 않을테니까. 영균은 아침에 열이 나서 병원으로 온다는 찬희의 연락에 미리 접수를 해 놓는다고 대답을 하면서도 별로 큰 일이 아닐거라 생각했었다. 아픈 아이를 보는 건 이젠 꽤 잘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운 사람의 아이가 아픈 건 또 다른 얘기였다.



급성 림프모구 백혈병,


입원한 지 이틀 만에 피검사에 골수 검사에, 영상검사까지 마친 아이는 열이 내린 다음에도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골수 검사 후에 피가 멎길 기다리면서 인형처럼 미동도 없이 옆으로 돌아누운 노을이를 바라보며 찬희가 하염없이 울기에 영균이 다가가 그냥 자는 거야, 하고 위로했다. 이러다가 꼭 안 일어날 것 같아. 찬희의 울음 섞인 탄식이 자꾸만 낮게 터져 나왔다.


***



누구의 아이인지는 처음부터 명확했다. 스무 살 되도록 잠자리를 함께한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으니까. 알릴 수 없었던 건, 그저 너무 어렸기 때문이라고 스스로에게 변명을 했다.

서툰 연애의 이별은 겁이 많았고, 경황이 없었고, 그래서 점점 돌이킬 수 없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거리가 벌어진 후였다. 사실은 일부러 멀어졌다. 상처받기 싫어서. 참 애석하게도 제 뱃속에 노을이의 존재가 있다는 건 그 뒤에 알았다.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지고 난 후엔 오히려 노을이의 존재를 지키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어차피 저 혼자만의 아이라는 생각이기도 했고, 다시는 아이 아빠를 보지 않고 살겠다고 마음먹은 탓도 있었다. 자신 있었는데, 분명 그랬는데.


"골수 이식이 빠를수록 완치 가능성이 커, 노을인 아직 초기고 소아들이 걸리는 난치병 중에선 그래도 완치율이 높고."


이런 말도 전혀 위로가 안 되겠지만 일단 골수 이식 수여자 명단에 이름 올려놨어. 영균은 찬희의 앞에서 침착하고 객관적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괴로워하는 친구의 얼굴 앞에선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다. 한참 만에 의식이 깨어난 노을이는 등이 아프다며 엉엉 울다 진통제를 투여받고 다시 잠이 들었다. 퉁퉁 부은 작은 얼굴을 끌어안고 찬희는 의연하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아무래도 가족 중에서 골수 기증자를 찾는 게 빠를 거야, 그게 제일 맞을 확률도 높고."


조심스럽다는 듯이 말을 꺼낸 영균은 작은 한숨 뒤에 덧붙였다. 아이 아빠, 찾는 게 어떨까 싶은데 나는. 하고. 의연해지려 애쓰던 찬희는 영균의 그 말에 그대로 무너졌다. 이미 찬희의 골수 검사 결과는 불일치로 결론이 난 후여서 더 그랬다. 노쇠하신 부모님은 골수 이식이 큰 부담일 거라 시도하는 게 조심스러웠고 저 몰래 이미 영균도 제 골수를 검사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물밀듯 밀려와 더 그랬다.


"노을이 처음 가졌을 때, 왜 하필 날 찾아 왔냐고, 계속. 계속, 원망했어."

"강찬희."

"왜 하필 지금이냐고, 계속 끔찍해 했어, 내가."


그래서 아픈가 봐. 내가 벌 받나 봐. 나 때문에 우리 노을이 아픈건가 봐.

병실밖 복도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은 찬희가 얼굴이 벌게지도록 울었다. 그 와 중에도 병실 안에 있는 노을이 들을까 봐 두 손으로 제 목을 조르듯 목울대를 꼭 잡고 소리 하나 못 낸 채 줄줄 눈물만 흘리는데 해줄 수 있는 게 그저 카운터에서 가져온 휴지 몇 장을 건네주는 것뿐이라 영균은 절실하게 담배가 말렸다.







갈피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갈 림 길
갈 림 길
구독자 835

1개의 댓글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
새로운 알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