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이

어떤 사이 01

The Spring in the Summer

린당


유난히 햇빛이 강하고 아스팔트에서 올라 온 복사열이 숨막히도록 뜨겁던 그런 날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이가 어느정도 차고 나서는 일상에 특별한 일이 일어나거나 새로운 인연을 만든다는 게 꽤 한정적인 일이라는 걸 깨달았고 그 날도 그저 그런, 모든 일이 무난한 보통 날 중에 하루일 뻔했다.


손수 외부 테라스에 어닝을 펼치며 그늘막을 만들던 인성이 카페엔 들어가지도 않고 제 앞에서 우물쭈물 거리는 교복 입은 학생을 보며 손님, 주문은 안 쪽에서 하시면 되는데요? 하고 영업용 미소를 지었을 때였다. 아이는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손가락 하나를 들어 출입문 앞에 붙어 있는 '알바 구함' 구직문을 가리켰고 이건 누구한테 말하면 되나요? 물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 알바 하려고? 네에, 하고 대답하는 아이는 이 더운 날에도 긴 팔 춘추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꼭 그 순간이 봄 같았다고 인성은 생각했다. 


아! 오늘 딸기 마카롱 첫 개시하는 날인데 알바 면접 보러 온 김에 먹고 갈래요? 허허실실 웃는 얼굴의 첫 인상은 ‘이상한 사람’ 이었다고 아주 훗날 상혁이 말해 줬다. 꼭 봄 같은 여름이었다.



***



이력서에 적힌 나이를 보고 주춤하는 인성에게 상혁은 저 수능 안 봐요, 그래서 알바 시간 괜찮아요... 하고 작아지는 소리로 덧 붙였다. 동그랗고 커다란 눈이 저를 마음에 안 든다고 할까봐 지레 겁을 먹은 듯 동공지진 중이었다.


인성이 학생-, 하고 짧게 부르자 눈을 맞춰오는데 가로로 긴 눈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네? 하고 대답하는 통통한 입술은 아랫 입술만 색이 진해서 색이 다른 꼬끄를 얹어 놓은 마카롱 같았다.


"내일부터 나와 줄 수 있어요? 우리가 사람이 좀 급한데?"


인성이 사르르 웃으며 하는 말에 진한 분홍색 마카롱이 입속으로 쏙 사라졌다가 통 튀어 나오더니 고개를 꼬닥꼬닥 열심히 끄덕였다. 그래 그럼 상혁아, 내일 저녁 6시 반에 보자? 불쑥 뱉은 반말에도 아이는 배시시 순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크게 허리를 숙이는 아이의 손에 쇼케이스에 있던 개별포장 마카롱을 세 개쯤 들려 보낸 뒤 딸기 맛이니까 맛있게 먹어, 하면서 손을 살살 흔들었다. 몸통 만한 까만 가방을 앞으로 맨 아이가 연신 허리를 굽히며 사라졌다. 귀엽네.


상혁이 떠난 지 10분 내도록 입구만 보며 엄마미소를 짓고 있는 인성을 보고 커피를 내리던 영빈이 고개를 저었다. 저거저거 또 뭐에 꽂혔구만, 야, 쟤 교복 입었다. 정신차려!




상혁이 가게에서 일한 지 3개월 즈음이 됐을 때, 인성은 슬그머니 물었다. 근데, 수능은 왜 안 봐? 하고. 사람마다 사정이 다 있는 건데 괜히 늙다리 꼰대처럼 보일까봐 타이밍을 고르고 골랐다. 그래도 3개월을 같이 지내면서 나름 친해진 것 같은데 이 정도는 물어 봐도 되겠지 싶어 가장 궁금한 걸 물었다. 인성의 물음에 쇼케이스의 비어 있는 자리를 정리하던 상혁이 쪼그려 앉아있던 그대로 인성을 올려 보다가 답했다.


"대학 갈 돈이 없어요."


너무 담담한 말에 인성이 아, 하며 작게 탄식을 하고는 미안하다고 말하기도 전에 들어오는 손님에 사과할 타이밍을 놓쳤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선 상혁은 퍽 상냥하게 웃는 영업용 미소로 주문하시겠습니까? 따위를 말하고 있었다.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별로 상처 되는 질문 아니거든요. 그냥 어릴 때부터 돈이 없었으니까 대학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어차피 공부 머리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주문받은 내용을 정리해 인성에게 건네며 정말 담담하게 웃어 보이는 상혁에게, 그 때부터 조금 다른 의미로 눈길이 갔다. 불쌍했던 걸까, 연민인가? 하면 딱히 정의할 수 없었다. 부모 잘 만나 넉넉한 가정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고 타고난 머리가 좋아 명문대를 졸업했지만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던 터라 부모님의 투자로 친구들과 작은 디저트 카페를 열었다. 평생에 뭘 해보고 싶다 생각 한 적은 없으나 지루할 정도로 굴곡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하고 싶은 일을 만들어야 하는 걸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런 인성의 눈에 인생이 고달픈 고삼이 하나가 데굴데굴 굴러 들었다. 동그란 뒤통수가 예쁘고 뽀둥한 뺨이 귀엽고 커다랗고 깨끗한 눈매가 시원한, 어리고 불쌍한 고삼이. 아이는 놀랍도록 손이 빠르고 익숙해 가게 일은 한 달이 되기도 전에 손에 척척 익혔고 눈치가 빨라 곧잘 커피를 내리는 법이며 가벼운 디저트 데코를 배워 바리스타 담당 영빈과 베이킹 담당 재윤의 예쁨을 받았으며 사교성도 제법 좋아 누구와도 살갑게 지냈다.


다만 이따금씩 보이는 세상살이에 지친 모습이 꼭, 눈 속이 텅 빈 것처럼 보여서. 인성은 최근 들어 저 어린 알바가 너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주제 넘은 질문일 수도 있는데."

"하세요."

"보통 이런 말 하면 하지 마세요, 하지 않나?"

"점장님은 저한테 돈 주는 분이 잖아요. 적당한 갑질은 참아 드릴 게요."


저를 보며 개구지게 씨익 웃는 얼굴에 웃음이 팍 터진 인성이 유니폼 베레모를 쓴 상혁의 머리를 꾹 눌렀다 떼며 눈을 맞췄다.


"졸업하면 뭐 할 거야?"

...


아, 역시 괜히 물었나? 잠시 잠깐 찾아 온 정적에 인성이 도르륵 눈알을 굴려 상혁의 시선을 피했다. 지금이야 고등학교 졸업이 우선이니까 하교 후에 알바를 한다지만 졸업 후엔 돈이 필요하다는 명목 하에 이곳을 언제든 떠날 수 있지 않을까, 조바심에 물었다. 아, 음, 그러니까. 알바자리에 공석이 생길까, 그게 신경이 쓰여서. 아니면 그냥,


네가 신경 쓰여서.




"저, 졸업해도 계속 여기서 일하면 안 돼요?"

"어?"

"뭘, 해야 겠죠. 근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서."


돈은 벌어야 하고, 여기 시급도 높아서 계속 일하고 싶은데... 시무룩하게 톡 튀어나온 아랫입술이 너무 귀여워서 인성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손바닥으로 입을 막은 채 표정을 숨겼다. 아 이거 뭔지 알아, 입틀막 그거. 상기된 얼굴로 컴다운 컴다운 김인성 진정해!! 를 속으로 몇 번이나 외치다가 정신을 차리자 주문이 들어 온 드립 커피를 내리다 말고 눈이 마주친 영빈이 요상한 표정으로 관자 놀이 옆에서 검지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미친놈 하는 입모양도 덤으로.


"그, 그... 우리가 풀타임 알바 구하려고 했거든 원래. 그러니까 나는, 그, 너... 졸업하면 여기 매니저 할래?"


우리가 풀타임 알바를 구하려고 했다고? 쇼케이스에 방금 갓 만든 크레이프 케이크를 넣어 놓던 재윤이 굽이굽이 접었던 허리를 펴내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인성을 살폈다. 영빈이 그냥 모른척하라며 어깨를 으쓱하지 않았다면 상혁에게까지 그 어색한 분위기가 전해질 뻔했다. 저 바보는 알바는 계약직이고 매니저는 정규직인 거 알고 말하는 걸까? 그냥 상혁아 같이 살래? 프로포즈라도 해보지 왜? 하며 어이없이 웃었다.


인성은 최근에 상혁을 참 티나게 예뻐라 하는 중이었다. 아니 최근이 아니라 상혁이 들어 온 날부터 거의 짝사랑 중이셨다.


물론 카페 안에 있는 모두가 19살 상혁보다는 적어도 7살은 많은 인성의 친구들인 것도 있었지만 훤칠하니 180 중반을 웃도는 거구들 속에 본인 피셜 180이 조금 안되는 아담한(?) 상혁이 짙은 커피색 베레모에 앞치마를 두르고 커다란 눈을 도르륵 굴리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걸 보는 게 최근 김인성 인생의 낛 인듯 굴었다.


오죽하면 상혁도 인성이 저를 꼭 갓 태어난 강아지 보듯이 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보는 걸 알아서 언젠가는 영빈에게 점장님은 원래 저렇게 사람들한테 다정하냐고 물었던 적도 있었다. 물론 김영빈은 나한테 하는 거 못봤니? 하고 답했고 재윤은 인성이 형이 진짜 본성이 다정하긴 한데 너는 거의 저 형한테 얼라지 얼라, 나는 인성이 형이 상혁이 낳은 줄, 하며 깔깔깔 배를 잡고 웃었다.


"매니저요?"

"응, 정직원! 인 거지 그러니까."


"...아, 그건... 생각 좀... 해봐도 될까요?"


"어? 어, 그래. 내가 너무 성급했지, 미안."


아무 말이나 아무렇게 뱉어 내느라 벌게진 인성의 얼굴 앞에서 상혁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정직원이면 시급도 올라가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라며 후다닥 자리를 비우는 인성을 보고 상혁이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카운터로 돌아갔다. 돈이 부족해서 대학도 안 간다 길래 김인성 나름 필살기로 꼬신 것 같은데 상혁이 어쩐지 망설이는 게 이상해서 둘을 바라보던 영빈이 눈썹을 들썩였다. 인생사 편한게 좋은 건데 꼬맹이는 머리속이 꽤나 복잡해 보였다. 하긴 호의가 좀 심각하긴 하지, 어지간히 좋은가 보네. 그건 그렇고 저 둘 사이에 머리가 복잡한 건 영빈도 마찬가지였다. 괜한 걱정이겠지 싶다가도 바지 주머니에서 징징 울리는 핸드폰 액정에 인성의 '부담스러웠나봐ㅠㅠㅠㅠㅠ'하는 미리보기 카톡을 보니 사서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김인성은 다정했다. 본투비 다정해 인간이었다. 어느 영화에서도 그런 대사가 나오지 않았는가, 이 정도 부자면 나도 착하게 살 수 있다고. 부자라서 착한 거라고. 중견 기업 총수인 아버지와 사회학 교수인 어머니, 반반한 얼굴에 똑똑한 머리. 완벽해 보이는 조건에 삐딱 할 법한 성격은 반전도 없이 초중고 내내 제 옆에 친구들에게 참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베풀었다 평가될 정도로 자비로웠다.


그러나 그래서 인생에 굴곡이 없었느냐, 하면 영빈이 보기엔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인성이 말하길 그 정도는 굴곡도 아니었다고 회상하지만 다시 생각해도 김인성 인생에서는 꽤 큰 파동들이 여럿 있었다. 모태 다정, 그래서 오해도 많이 받았고 시기와 질투는 덤이었으며 사기는 옵션으로 따라왔다.


인성이 대학교에 막 입학했을 즈음엔 그 모든 설정 값이 포텐으로 터져 일주일에 너댓은 다정해 인간 김인성에게 네가 먼저 나한테 추파를 던지지 않았냐며 고백했다 차였으며 선배 중엔 네가 그렇게 잘났냐며 이유없이 고깝게 구는 또라이 같은 인간들도 있었다. 그걸 제일 가까이에서 지켜 본 미취학아동 시절부터 죽마고우였던 김영빈은 아무리 사람이 착해도 거절할 건 거절해가며 정색할 땐 정색해가며 살라고 매일을 타박했다.


그러다가 김인성이 도망치듯 군대에 입대하게 된 사건이 터졌다.


2학년에 올라 오자마자 선배들의 협박 반, 학우들의 열렬한 지지 반으로 학회장을 떠맡은 김인성은 평소와 같이 새로운 곳이 낯설 신입생 후배들을 참 살뜰이도 챙겼고 정확하게 한 달 뒤에 학과 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학회장 김인성이 신입생 여자애들을 후리다 못해 남자 애들 한테도 손을 댔다고. 소위 먹버 당했다는 애들이 한 둘이 아닌데 정작 본인은 뻔뻔하게 얼굴을 들고 다닌다고.


그게 학교 SNS 대나무 숲까지 올라와 타과인 영빈이 알게 됐을 땐 이미 김인성은 쓰레기같은 인간이 되어 과내에서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하고 있었더랬다. 넌 이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말도 안했냐고 화를 내는 영빈에게 인성은 아무도 자기 앞에서는 대놓고 그런 소릴 하지 않아서 변명할 기회조차 없었다고 지쳐서 말했다. 다행히 영빈의 친한 형이 언정과 조교인 덕에 영빈에게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듣고는 사태가 커지기 전에 신입생 전원을 소집했는데, 김인성 본인과의 면대면 전에서 우습게도 김인성의 핸드폰 번호로 사적인 연락을 취해 본 사람이 1학년 과대와 오티 후에 안부를 주고받은 다섯명 정도가 다였다는 웃지 못 할 tmi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물론 대놓고 말하진 못했지만 고백했다 차인 사람이 열이 넘긴 했다.).


다정은 하되 자기 나름의 선은 칼같이 지키는 게 김인성이었다. 인성은 다년간의 수많은 거지같은 인간관계들로 인하여 나름대로 제 바운더리를 만들었고 그 바운더리 안에 사람을 잘 들이지 않았다. 모두에게 친절하지만 특별한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다시 말하면 그건, 누구에게나 친절하다는 말도 됐다. 그 바운더리는 오직 김인성만 아는 것이어서 평범한 사람들은 대게 인성의 그 친절과 배려가 호감이고 작업이라고 생각한다는 게 문제였다.


그 모종의 사건은 김인성을 열렬하게 사모한 남학생 하나가 그 바운더리 안에 들었다고 착각 아닌 착각과 함께 김인성에게 치대다가 다정말랑 인간 김인성이 의외로 철벽처럼 이런 건 좀 불편한데, 하고 말하는 바람에 복수심에 벌인 일이라는 게 밝혀졌지만 그 마저도 조교님 앞에서 면대면으로 신입생들을 다 모아 놓고 물으니 당사자들이 수치심에 밝히지 못했을 거라는 악의적인 루머로 돌아왔다.


이젠 남자도 꼬이는 구나. 영빈은 이마를 탁 치며 한탄했고 그 이후로도 학과 내 소문은 너무 흉흉하여 결국 김인성은 도망치듯 머리 깎고 군에 입대했다.


그 이후엔 인성도 무턱대고 타인에게 다정하진 않았다. 물론 모태 다정해 인간이 하루 아침에 변하진 않았지만 누가 봐도 아 영업용 이구나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바운더리를 좁혀 행동거지를 바꿨다는 말이었다. 아 물론 김영빈이 이 오랜 과거를 회상하는 건,


"상혁아! 오늘은 무슨 맛 마카롱 먹고 싶어?"


이상혁한테는 처음부터 그 영업용이 없길래.



***



"그, 제가... 점장님한테 불쌍하게 구나요?"

"어?"


상혁은 물론, 영빈이나 재윤이 봐도 참 귀여운 동생이었지만 넉넉하지 못한 환경 탓인지 그늘진 면이 있어 보였다. 영빈이 보기엔 눈치도 꽤 고단수처럼 보였고 똑똑은 해도 똑 소리는 못 내는 인성이 감싸고 돌기엔 좀 영악한 면이 있지 않을까, 영빈은 생각했다. 물론 이건 그저 편협한 제 편견과 기우일수도 있으나 그래도 이십년지기 친구의 짝사랑(?) 대상인데 걱정이 되는 참에 속마음 좀 떠 보려 퇴근하려는 상혁을 살며시 불러냈다. 제 딴에는 아주 자연스럽게 오늘 형들이랑 쏘주 일 잔, 어떠냐며 재윤까지 덤으로 꼬셨다. 물론 김인성은 모르게.


너도 이제 3개월만 있으면 성인인데, 원래 술은 어른한테 배우는 거라며 거드름을 피우던 재윤은 영빈과 상혁이 소주 2병을 비울 때까지 꽉 채운 소주잔 3잔을 야금야금 꺾어 마시다가 테이블 위에 머리를 박은 채 쓰러져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 거리는 중이였고 의외로 영빈의 페이스를 맞춰 소주 한 병 거뜬하게 비워 낸 상혁은 알딸딸한 얼굴로 뺨을 붉히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영빈에게 고민상담을 시작했다.


"저는요, 형. 저도 알아요. 제가 좀 불쌍하게 컸어요. 돈이 없어서 학교에서도 계속 왕따였고, 그래서 그런가... 선생님들도 계속 외면하고. 엄마는 어릴 때 돌아 가셨고, 아빠는 다리가 불편해서 일도 제대로 못하시고. 가끔..."


절 때리시고.


아, 이런 개인사까지 전부 들추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냥 김인성한테 잘 해줘라, 불쌍한 놈이다. 그 한 마디 하려고 어린 애한테 술까지 먹이면서 포차에 자리를 잡았 건만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서도 처연처연 열매 백 개 먹은 상혁의 사연은 빛을 발하고 김인성이 불쌍하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불우한 19년 인생을 자랑했다.


"저도 모르게, 그게 무기가 돼서... 그렇게 불쌍한 척이라도 하면, 다들 쪼끔은 잘해 주길래... 그게, 막, 막 습관이 됐나...? 그래도 다들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벽이 있었던 거 같은데... 근데, 점장님이랑 형들은... 왜 막 벽도 없이 잘 해 주구, 저를 왜 자꾸 예뻐해 주시는지 모르겠고... 나는, 한 번도, 그런... 그렇게 날 예뻐해 주는 어른들은 만나 본 적이 없는 데에..."


"상혁아, 너 취했어?"


"근데 막... 특히, 점장님이 자꾸... 절, 저를요. 너무 챙겨주니까... 내가 너무 불쌍한 척을 해서, 내가 너무 불쌍해서... 그냥 내가...막 부담스럽게 한 건가 싶어 가지구."


아, 소주 한 병이 어느새 반 병 더 비워져 있는 걸 확인한 영빈이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우울우울 열매의 결실을 맺기 시작한 상혁에게 깜짝 놀라 급하게 소주잔을 빼앗았다. 부담스럽게 치댄 건 누가봐도 이상혁이 아니라 김인성인데 세상살이에 찌든 것처럼 영악할 줄 알았던 고삼이는 잠시 오해한 것이 민망하고 미안할 정도로 역시나 19살 애기애기한 순진쓰여서 인성에게 제가 하는 말들이 부담이라 억지로 제게 호의를 베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 눈치가 빤해서 영악한 건 요 꼬맹이가 아니라 난가 보다. 영빈은 친구를 위해서 였다지만 아주 조금,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근데 넌, 생각하는 것도 참 예쁘다. 이래서 김인성이 널 처음 보자 마자 좋아했나 보다. 영빈은 상혁 대신 가득 채워진 소주 잔을 원샷으로 비워 버린 채 조금 가볍게 웃었다. 내가 김인성 옆에서 온갖 인간 불신을 다 배웠는데 너는 좀 괜찮을 것 같다. 김인성 하는 꼴이 좀, 이게 사랑인가 부성애(?)인가 싶긴 한데 그래도 좋은 사람 하나 더 곁에 있는 건 좋은 일이지. 영빈은 널부러진 재윤의 등허리를 찰지게 두둥탁 때리며 흐느적 거리는 상혁에게 말을 보탰다.


"김인성 돈 많아. 정직원 그런 건 부담도 아닐 걸? 그냥 영악하게 살아 상혁아. 봉으로 보고 뜯어 먹어, 널 불쌍하게 보는 건지 아님 다른 눈으로 보는 건지는 그 후에 생각해도 안 늦어, 그치?"


가물가물 눈이 흐려지는 상혁이 영빈의 말을 알아 들은 건지 아님 그저 졸린 건지 앞뒤로 몇 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 종내에는 푹 숙여지는 동그란 머리통에 어린 애한테 몹쓸 짓을 했다는 찜찜한 표정으로 인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왠 일이야?]

"와서 상혁이 좀 데려가. 나는 이재윤 챙기기도 벅차다."

[... 뭐?]

"얘 좀 데려가서 집에 연락 좀 드려. 오늘은 못 들어 갈 것 같은데, 따듯한 데서 재우고 아침에 보내라. 여기 카페 앞 사거리 ××포차."


전화를 끊고 정확하게 16분만에 달려온 인성은 상혁이 술을 마셨다는 소리에 이미 얼굴이 험악했다. 제 얼굴을 보자 마자 한 마디를 내뱉으려 씩씩 대길래 영빈은 얼른 저보다 큰 재윤을 등에 걸치고 재윤의 긴 다리를 땅에 질질 끌며 어휴 내일보자 상혁이 잘 좀 데려다 주고, 하는 말을 뱉으며 빠르게 사라졌다.


파란 플라스틱 간이 테이블에 폭 익은 찐빵처럼 통통한 뺨이 녹진하게 눌린 상혁은 인성이 살살 흔들어 깨워도 영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별 수 없이 아이를 제 등 위에 업고 깨지 않도록 슬쩍 추켜 올리자 으음, 작게 움찔거리며 인성의 목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목 뒤로 따뜻한 아이의 뺨이 부벼지자 인성은 걸음을 걷다 말고 발을 멈췄다. 술 먹은 건 꼬맹인데 왜 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지 모를 일이었다.


“점장니임.”

“어, 상혁아. 깼어?”

“…담배 냄새나요오…”

“아, 많이 나? 나 많이 안 피는데 전화 받기 전에 딱 한 대 핀 거야.”


“아니이… 몸에… 나쁜데… 피지 마요오…”

“상혁아? 상혁아 자? 어어, 자면 안 되는데.”


점장님 원래 냄새가 더 좋아요… 까무룩 잠이 들어가는 등 위의 무법자가 그렇게 말했다. 미치겠네... 인성의 입 밖을 터져 나온 소리는 순도 100프로였다. 정신차려 김인성! 그래서, 이 취객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미성년자를 이 상태로 집에 데려다 주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연락없이 외박을 시켰다간 그것도 큰일 날 것 같고. 근데 꼬맹인 정신도 못 차리고.


***


일단 상혁을 집으로 데려와 눕혔다. 처음 마시는 술에 정신도 못 차리고 골아 떨어진 상혁을 데리고 거리를 더 배회할 수가 없었다. 미성년잔데 부모님께 연락도 없이 외박을 시킬 순 없어 아이를 대충 편한 옷으로 갈아 입히고 제 침대 위에 눕혀 이불로 폭폭 싸 놓은 다음 상혁의 옷을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최대한 조용히 거실로 나가 비밀번호도 없이 활짝 열린 핸드폰을 또닥거려 연락할 곳을 찾다가 최근통화목록에 자주 등장하는 '영빈이형'과 '재윤이형'에 입술을 삐죽거렸다.


'점장님', 제 번호가 확실한 데 저만 형이 아니었다. 아니, 나도 김영빈이랑 동갑인데 왜 나만... 유치하게 투덜거리다가 슬쩍 이름들을 바꿨다. '김영빈형', '이재윤형' 그리고 '인성이형' 제 이름 뒤에 하트는 썼다 지웠다 난리 부르스를 추다가 결국 지우기로 했다.


아 정신차려 김인성, 꼬맹이 집에 전화 드려야지. 한참을 상혁의 전화번호부에서 꼬물거리다가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린 인성이 상혁의 이력서에서 봤던 가족사항에 어머니는 부재중이었던 걸 떠올리곤 아버지, 아빠 등을 입력했다.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몇 번 더 연락처를 뒤져봤지만 아버지 비슷한 글씨도 찾을 수가 없었다. 요샌 가족들도 이름으로 해놓거나 애칭으로 해 놓는 사람도 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난감한 표정을 지은 인성이 혹시나 하고 최근 통화 목록을 뒤지는데 친구인 듯 보이는 이름들 사이로 '.' 점 하나로 저장된 이름이 눈에 띄었다. 핸드폰 번호로 저장된 다른 이름들과는 달리 지역번호가 달린 7자리 번호기에 여기가 집인가 싶어 일단은 아이의 부재를 알리고자 제 핸드폰으로 번호를 옮겨와 전화를 걸었다.


한참이나 울리던 통화음이 끊기고 전화를 받은 건 걸걸하고 발음이 부정확한 중년 남성이었다. 누구냐고 묻기에 잠깐 당황했던 인성이 혹시 이상혁 학생 집인가요? 하고 묻는 말에 상대는 또 한참을 뜸을 들이다 맞는데 누구요, 하고 답했다.


"아, 저 이상혁 학생이 알바 하는 카페 점장입니다. 죄송한데 상혁이가 직원 회식을 하다가 먼저 잠이 드는 바람에요, 마침 내일이 주말인데 혹시 저희 집에서 재우고 내일 보내도 괜찮을까요?"


술을 마셨다는 말은 쏙 빼고 최대한 예의를 갖춰 묻는 말에 상대는 좀 전 처럼 또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지랄하고 있네.]


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그 후엔 상혁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발신자는 '.'.점 하나가 찍힌 집 번호였다. 인성은 벙쪄 있다 정신을 차리고 긴장하며 대신 전화를 받았고, 받자 마자 욕지거리를 뱉어내는 상대에게 입도 벙긋하지 못한 채 심장을 졸였다.


[아픈 애비 내 팽게 치고 기껏 하는 게 사내 질이냐? 그렇게 굴러먹다 드러운 돈 유세 떨며 가져오지 말고 집에 들어와!! 니 엄마 보험금 어디다 숨겨놓고 그 짓거리야!! 오늘 내로 돈 안 내놓으면 니 앞에서 목 매달아 죽어버릴 테니까 당장 그 돈부터 가지고 와!!]


쓸데없는 짓거리 말고 집이나 들어와 돈이나 달라는 말을 꽤나 험악하고 날카롭고 아프게 쏟아내는 남자의 말에 인성은 묵직한 심장을 누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버님 죄송하지만, 아까 전화 걸었던 점장입니다. 상혁이가 잠이 들어서 제가 대신 받았습니다."


[너 뭐하는 놈이야, 내 아들 놈이 이젠 남자한테 붙어먹어? 너 기둥서방이야? 돈 줄 거 아니면 내 자식한테 수작 부리지 말고 그 새끼 얼른 집에 보내!]


눈에 불이 붙은 듯 뜨거운 감이 핑 돌았다. 불덩이가 앉은 듯 뜨거운 가슴 언저리와는 다르게 흥분했던 머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자 인성은 제 침대에서 곤히 잠든 상혁을 떠 올렸다. 가끔 보이는 세상 지친 얼굴의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했다.


이 순간 아이를 지켜야 겠다는 이 어줍잖은 마음은 도대체 정체가 뭘까, 정말 연민이나 동정일까.


"죄송하지만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저는 그냥 상혁이가 일하는 카페 사장입니다. 상혁이랑 그런 부적절한 관계는 더더욱이 아니구요. 아드님이 미성년자라는 자각은 있으십니까? 이미 잠이 들어서 오늘은 상혁이를 댁에 못 보내 드리겠네요. 오늘은 그냥 주무시고 내일 저랑 다시 연락하시죠."


혼자 아이를 집에 보내면 안 되겠다고 이미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린 인성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끊고 전원을 종료시켰다. 내일은 집에 데려다 줘야 겠네, 상황 설명은 얼굴을 보고 드리는게 났겠지. 설명이 먹히는 사람이기는 할까? 답답함에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 있었다.


돈이 없어서 꿈을 가져 본 적도 없다고 말했던 상혁에게 갑자기 화가 났다.


분노, 연민, 동정.


그게 정말 다일까, 인성은 거실 바닥에 대자로 누워 시끄러운 속을 달랬다. 밤새 무거운 머리에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마침내 이 이상하고 대책 없는 감정에 적절한 이름을 떠올린 건 동이 터 올 무렵이었다. 자야겠다. 자야겠어. 밤새 고민한 것 치곤 싱겁게 내려진 결론에 인성이 까무룩 잠이 든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 감정이 뭐긴,


흑심이지.



***



인성이 눈을 뜬 건 정오가 한참 지난 오후였다. 휘적휘적 손을 뻗어 핸드폰을 찾고 잠금 화면을 풀자 평소 무음으로 해 놓는 핸드폰에 부재중 10통이 지저분하게 화면을 채웠다. 하아- 짧은 탄식과 함께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벽내내 답이 뻔한 질문에 공을 들여 고민하다 도출한 명쾌한 해답은 사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지 않으려 애쓰던 것이었다. 인정하고 보니 뭣하러 망설였나 싶을 만큼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이 뛰는 게 느껴져 아침부터 얼굴이 화끈거렸다.


몸을 일으켜 상혁이 있을 침실로 돌아 서는데 새벽내 제가 덮고 있던 이불에 눈이 절로 휘둥그레 해졌다. 거실에서 잠든 제게 이불을 덮어줄 사람이 아이뿐이라는 사실과 그럼 아이가 벌써 일어났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자 괜히 마음이 급 해졌다. 벌떡 일어서 머리맡에 던져 두었던 상혁의 휴대폰을 찾는데 보이질 않았다. 설마하고 침실 문을 벌컥 열었는데 제가 어제 갈아 입혔던 잠옷가지만 가지런히 침대 위에 있을 뿐 상혁의 옷도 상혁도, 현관의 신발도 감쪽같이 없었다.


혼자 보냈다.


그 사실을 인식하자 마자 온 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얼굴도 모르는 타인에게 제 아들에 대한 성적 폭언을 있는 데로 뱉어 내던 사람이었다. 인성은 다 구겨진 자켓을 빠르게 주워 들고 용수철에서 튀어 나가듯 집밖을 나섰다. 상혁을 데리러 가야했다.



- 상혁이 오늘 아파서 못 온다고 연락 왔는데, 너도 알아?

- 전화도 안 받고 너도 가게 안 오고

-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영빈에게서 온 카톡은 그게 다였다. 오전 10시쯤 온 카톡이니 상혁이 나간 것도 그쯤 이겠거니 싶었다. 전화의 3통은 영빈이었고 3통은 재윤이었다. 그리고 인성을 이토록이나 겁나게 하는 건, 인성이 일어나기 30분 전까지 10분 간격으로 계속 해서 걸려 온 4통의 전화가 모두 상혁이기 때문이었다.


액정을 가득 채운 '꼬맹이' 세 글자가 너무 미안해서 손이 다 떨렸다. 아무리 다시 걸어봐도 신호음은 채 반을 못 가 끊기더니 결국에는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 멘트가 전해졌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전화 수신을 방해하고 전원을 껐을 거라는 생각에 차에 올라타 엑셀을 밟는 발에 힘이 실렸다.



굽이굽이 이어진 골목이 하늘을 향해 가파르게 솟아 있었다. 이런 게 달동네라는 건가, 한참을 오르다 말고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허리를 쭉 펴는데 걸어 올라 온 아래가 까마득 한 만큼 위로도 한참이었다. 꿉꿉하고 습한 공기가 어쩐지 스산해서 오른 손에 쥐고 있는 라이터의 부싯돌을 습관적으로 칙칙- 의미없이 돌리고는 흠, 하고 입맛을 다셨다. 입에 물고만 있는 담배는 바로 어제 금연을 다짐했으니 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여기 어디라고 했는데, 도무지 주소지가 제대로 붙어 있는 집이 없었다. 여기가 34인데 왜 바로 옆이 38이지? 내가 숫자를 잘 못 배웠나 싶어 인성이 헛웃음을 뱉었다.


꽤 쌀쌀한 공기에도 땀이 차오르길래 자켓을 벗어 오른쪽 어깨 위에 대충 두르고는 36번 건물을 애가 타게 찾아 돌아 다니는 인성의 눈과 귀에 반가운 모습의 반갑지 않은 소리가 들린 건 금방이었다.


와장창, 쨍그랑- 요란하게도 울리는 유리 깨지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든 인성이 얼른 고개를 소리가 난 쪽으로 돌리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판자촌 안쪽으로 철컹거리며 녹슨 초록색 대문이 떨어져 나갈 듯 요란하게 열렸다.


너 이 새끼 어딜가냐며 악다구니를 지르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와 함께 급하게 모습을 드러낸 건 인성이 그렇게나 찾던 사람이었다. 오른쪽 코에 코피가 터져 하얀 뺨에 대충 문질러 닦은 상혁이 난폭한 배경음과 딱 맞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미 붉어진 한 쪽 뺨을 문지르며 맨발을 한 채 쩔뚝이며 걸어 나왔다. 힘겹게 가파른 계단을 두 어 개 내려오는데 바로 뒤에서 제법 두꺼운 사기 화분이 거침없이 날아 들었다.


뒤에서 날아 오는 건 미처 보지 못 했는지 바닥만 응시하고 세상 조심스럽게 내려오기에 후다닥 뛰어간 인성이 손에 든 라이터와 입에 문 담배를 던지듯이 버리고는 일단 아이의 머리부터 껴안아 제 품에 끌어 안았다. 아슬하게 인성의 얼굴을 스친 화분이 바로 뒤 시멘트 벽에 부딪혀 또 요란하게 깨졌다.


파열음과 함께 산산 조각난 화분의 사기조각이 인성의 셔츠 위로 자잘하게 튀자 인성은 품안의 상혁을 좀 더 끌어당겼다.


"...점장님...?"

"어, 어 나."

"...왜 여기..."

"너 찾으러."


하얀 얼굴에 가로로 긴 아이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좀 창백하다 싶었는데 뒤에서 다시금 이상혁!!! 하고 부르는 제 이름 세 글자에 인성의 와이셔츠 가슴팍을 와락 잡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인성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일단 아이의 어깨를 감싸 자리를 뜨려 했지만 상혁은 꼼짝도 않고 인성을 올려 보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리가... 안 움직여서..."


자세히 보니 입가도 터져 있고 이마 쪽에도 생체기가 있었다. 덜덜 떠는 게 손뿐만이 아닌 듯 아이는 뒤쪽에서 들리는 고함소리에 간헐적으로 어깨를 떨었다. 인성은 제가 이 가파른 달동네를 얼마나 힘들게 올라 왔는지 따윈 금세 잊고 상혁을 향해 너른 등을 내보였다.


"일단 업히자."


괜한 오지랖이라고 거절하면 어쩌지 싶었는데 제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묵직하게 내려 앉는 등허리의 무게감에 안도했다.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온 인성은 겨우 몇 달 봤던 열 아홉 살짜리 꼬맹이한테 빠져도 단단히 빠졌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



날씨가 축축하다 싶었는데 곧 먹구름이 몰려와 한바탕 쏟아졌다. 집에 들어오자 마자 보일러 온도부터 최대로 올렸다. 어차피 차를 타고 오느라 그렇게 젖은 건 아니었지만 괜찮다고 하기에는 아이가 너무 지쳐 보였다. 일단 씻으라며 수건이며 새 칫솔을 챙겨 아이를 욕실에 밀어 넣고 부리나케 뛰쳐나가 약국, 편의점, 근처 의류점을 빠르게 훑었다.


집으로 돌아와 거실로 들어 서는데 물소리는 그친 지 오래건만 아이가 나올 생각을 않기에 화장실 문을 두어 번 똑똑 두드렸다. 상혁아, 다 씻었어? 하고 묻는데 겨우 손가락 두 마디만큼 빼꼼 열린 문 뒤로 상혁이 저, 옷이...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앞에 벗어 놓은 옷이 사라져 당황한 모양이었다. 뿌옇게 번지는 수증기 사이로 혹시 제 몸이 보일까봐 고개만 살짝 기울인 채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데 그 모습이 좀 귀여워 인성이 픽 바람 빠지는 웃음을 뱉으며, 미안 너 옷은 세탁실로 옮겼어 새 옷은 미리 앞에 뒀는데 내가 말을 안 했다. 하고는 편의점에서 산 속옷과 의류점에서 눈대중으로 사이즈를 골라 사온 트레이닝복을 건넸다.


샤워 후에 혈색이 돌아 발그레한 뺨만 빼고 뽀얘진 아이의 얼굴은 상처 자국이 더 선명했다. 약국을 탈탈 털어 구급약을 사긴 했는데 소파에 앉혀 여기저기를 살피다 보니 목덜미 위로 이어진 상처에 혹시나 해서 티셔츠를 들어 올렸다. 처음엔 당황하고 부끄러워 제 옷을 들추는 인성의 손에 버둥대던 상혁이 점점 굳어지는 인성의 표정에 입을 딱 다문 채 눈치를 살폈다. 목덜미만이 아니라 반팔 트레이닝복 아래로 드러난 팔이며 다리에도 자잘한 흉터가 꽤 많아서 인성은 저도 모르게 입 안쪽을 꾹 물고 한숨을 삼켰다.


"아파?"

"오래 된 상처라서, 이젠 안 아파요."


그 대답이 더 신경 쓰이는 걸 모르는 듯 상혁은 인성의 손에 쥐어 있는 제 티셔츠 자락을 꼼지락거리며 슬슬 내렸다. 크고 작은 흉터들이 자잘했다. 빗장뼈를 가로지르는 긴 흉터를 눈으로 훑자 이게 제일 오래 된 거라 제일 안 아프다는 말도 덧 붙였다. 보지 않아도 등쪽은 더 심할 것 같았다. 인성은 그제야 상혁이 한 여름에도 꼭꼭 긴 팔을 입고 있던 모습이 이해가 갔다.


나만 봄이었네, 넌 겨울을 버텨 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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